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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Ⅰ/독서노트

[송화준의 독서노트]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애덤 스미스 원저/러셀 로버츠 지음)

이 책은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을 경제학자인 러셀 로버츠가 쉽게 풀어쓴 책이다. 경제학자가 왜? 라는 의문이 순간 스쳐 갈 수 있겠으나, 애덤 스미스가 자본주의의 아버지라 불리고 <국부론>을 썼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금세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이 책은 고리타분한 도덕 교과서 같은 책이 아니다. 그럴 수도 없다. 도덕을 경제학적으로 풀었다고 해야 할까. 인생을 경제학의 리트머스 지를 통과해 도덕을 뽑아냈다고 해야 할까. 암튼 이 책은 좋은 책이다.

최근에 읽은 책 중에 가장 어렵게 읽은 책이 아닌가 싶다. 12월 말에 가장 오랫동안 손에 쥐고 있었던 책이기도 하다. 쉽고 가벼운 책만 읽는 내게는 아무리 쉽게 풀어썼다고 해도 인문학적 사고를 요하는 책은 어렵다.(깊은 좌절..) 어렵다고 느끼면서도 계속 이 책을 붙잡고 있었던 이유는 그만큼 내게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읽는 동안 탄식을 내뱉었던 적이 많았다.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은, 그 이상의 감명을 받기를 바란다. 

다른 독자들과 더불어 나눠보고자 독서모임을 연다. 관심있는 사람은 신청하시길. http://onoffmix.com/event/60165

이하 요약이다. 기독자가 아니라면 아래 링크의 도서정보(특히 목차)를 확인 후 읽으시길 추천한다.

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
국내도서
저자 : 애덤 스미스(애덤스미스),러셀 로버츠(Russell Roberts) / 이현주역
출판 : 도서출판세계사 2015.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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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어떻게 우리의 삶이 바뀔 수 있는가

행복하고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250년 전, 스코틀랜드의 한 도덕철학자는 <도덕감정론>에서 이 질문을 정면으로 다루었다. <도덕감정론>은 심리학과 철학, 그리고 오늘날 행동경제학이라 불리는 학문을 모두 담아낸 고전 중의 고전이다. 애덤 스미스는 돈, 야망, 명예, 미덕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해 시대를 초월한 현실적인 방법과 해결책을 제시한다.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지, 어떻게 물질적인 성공과 실패를 다루어야 하는지 알려준다. 또 선량하고 미덕을 갖춘 삶이 어떤 것인지, 나아가 그런 삶의 가치에 대해 설명한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을 쓴 덕에 ‘자본주의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덕감정론>에서의 애덤 스미스는 행복을 얻기 위해 돈을 따르는 삶이 얼마나 헛된 지에 대해 그 누구보다 설득력 있게 말해준다. 자본주의를 추구하고 이기심을 키우는 데 더없이 일조한 애덤 스미스가 어떻게 물욕의 덧없음을 강조할 수 있을까?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다. 

자본주의, 그리고 인생철학

1759년에 처음 출간된 <도덕감정론>은 여섯 번에 걸쳐 개정판이 나왔고, 스미스가 세상을 떠난 1790년에 마지막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개정판에서 상당히 많은 부분을 고쳤다. <도덕감정론>은 애덤 스미스 생애 첫번째 저서이자 마지막 저서인 셈이다. 

이제야 만난 숨겨진 보물

<도덕감정론>을 읽으면 인생의 의미와 도덕, 그리고 사람들의 행동양식은 18세기나 지금이나 크게 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원본을 전부 읽을 엄두를 못 내는 독자들을 위해, 그의 통찰력이 빛나는 훌륭한 원본 문장들을 이 책에서 소개할 것이다. 현재 우리에게 도움 될만한 보석 같은 내용들을 찾아내는 것이 내 주된 임무다. 다들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사람 사는 일은 사실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람들 각자가 지닌 약점과 장점은 거의 비슷하게 마련이니까. 애덤 스미스는 무엇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지, 무엇이 사람의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지 알아내고자 했다. 그리고 단언컨대 이런 것들은 결코 관념적인 게 아닌,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유용한 것들이다. 

내 인생을 바꿀 기막힌 여정

도덕과 인간의 심리적 본성을 다룬 이 책이 애덤 스미스 최고의 유산인 경제학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의아할 것이다. 경제학이야말로 인생을 최대치로 활용하는 방법에 관한 학문이다. 인생은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이다. 인생을 최대치로 활용한다는 것은 곧 인생에서 현명하고 훌륭한 선택을 최대한 많이 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하나를 취하고 다른 하나를 버리는 선택에 대하여, 내 선택이 다른 사람들의 선택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잘 이해하는 것이 바로 경제학의 본질이다. 매 순간 훌륭한 선택을 하길 원하는가? 그렇다면 먼저 자신과 주변사람들을 이해해야 한다. 인생을 최대치로 활용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감히 말하건대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을 이해해야 한다. 자, 이제 시작해보자. 

2장 나에게 질문하는 시간

새끼손가락vs. 수만 명의 목숨
우리는 다른 사람이 겪는 커다란 고통보다 나의 작은 고통에 더 격렬하게 반응한다. 모르는 사람 수만 명이 죽었다는 사실보다 내 새끼손가락 하나가 없어진다는 사실에 크게 상심한다. 우리는 정말로 그 정도로 이기적일까? 스미스는 이에 복합적인 견해를 가진 듯 보인다.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인 존재라 할지라도, 기본 바탕에는 이와 반대되는 선한 본성이 있다. 그래서 인간은 다른 사람의 운명과 처지에도 관심을 갖는다. 또 자신에게 아무런 이득이 없을지라도 다른 사람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기도 한다. -<도덕감정론> 본문

사람들은 자신에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는 경우에도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을 쓴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로 마음을 쓸까? 스미스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당신의 새끼손가락과 수백만 중국인들의 목숨을 맞바꿀 수 있다고 생각해보자. 당신은 그렇게 하겠는가?

자신의 작은 불운을 막기 위해 수억이나 되는 중국인 형제들의 생명을 기꺼이 희생시킬 사람이 있을까? 인간의 본성은 그런 생각만으로도 두려움에 깜짝 놀라게 되는 법이다. 세상이 아무리 부패하고 타락했더라도 그런 상황을 즐길 수 있을 정도로 악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도덕감정론> 본문

<도덕감정론>에서 스미스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여러 가지 미덕을 중점적으로 다루었지만, 이기심은 그가 완성한 미덕의 목록에 들지 못했다. 물론 <국부론>에서 그는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이기적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국부론>에서 스미스가 정의한 이기심이란, 극단적 이기심과 다르다. 인간은 자신이 잘 하는 한 가지 일을 전문화하는 대신, 나머지는 타인의 도움을 통해 얻고자 한다. 이때 인간이 극단적인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는 타인이 원하는 것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기적인 인간은 어떻게 타인이 원하는 것을 주게 된 것일까. 우리는 타인이 원하는 것을 그냥 주는 게 아니라, 타인이 답례로 무언가를 줄 것이라고 전제했기 때문에 주는 것이다. 이것이 <국부론>에서 스미스가 정의한 이기심이다.

우리가 고기와 술, 빵을 먹으며 저녁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이나, 양조업자, 빵집 주인이 관용을 베풀어서가 아니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이익을 중시했을 뿐이다. 때문에 우리는 그들과 거래할 때 그들의 인간애가 아닌 자기애에 호소한다. 또한 우리가 필요한 것을 말하지 않고 그들에게 유리한 점을 말한다. - <국부론> 본문

사람이 가장 큰 신경을 쓰는 대상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이 사실을 기억해두면, 상대로부터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낼 때 상당한 도움이 된다. 우리는 사는 동안 가끔은, 아니 매우 자주 자신이 우주의 중심인 것처럼 착각한다. 각자 우주가 자기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방식, 이러한 '각자의 철칙'이 바로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다.

공정하게 나를 관찰하는 사람이 있다

<탈무드>에 등장하는 위대한 현자 힐렐은 이런 물음을 던졌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하지 않는다면, 누가 나를 위해줄 것인가? 그러나 반대로 내가 나 자신만을 위한다면,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이에 대해 스미스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당신이 당신 자신만을 위한다면, 다시 말해서 수억 명의 목숨과 자신의 손가락을 맞바꾼다면, 당신은 인간이 아닌 괴물이다.'

이것이 바로 나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의 두 번째 단계다. 우리는 모든 것을 내 위주로 생각한다. 하지만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항상 나에게 득이 되는 쪽으로만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스미스 역시 사람들이 이타적인 행동과 이기적인 감정을 어떻게 조화시키는지 궁금해 했다. 

인간이 이토록 비도적적이고 이기적인데도, 어떻게 우리 행동은 종종 그렇게 관대하고 고상할 수 있을까? 남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희생시키는 일이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도덕감정론> 본문

인간 본연의 강한 자기애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자신을 행복을 희생시키고 사심 없이 행동하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한 가지 답은 우리가 친절하고 품위 있는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스미스 식으로 표현하자면 자애롭고,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동정심으로 가득한 존재가 우리들이다. 남에게 마음을 쓰고 남들이 고통 받는 모습을 싫어할 만큼 우리는 이타적인 존재다. 하지만 동시에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는 일보다 내 손가락을 잃는 일에 우리는 더 괴로워한다. 이런 인간의 모순적인 모습이야말로 스미스가 일깨워준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스미스는 이기적인 생각에 야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이 단순한 자애심이나 동정심 때문은 아니라고 강하게 주장한다. 

인간의 여린 힘으로는 자기애가 일으키는 강력한 충동을 이겨낼 수 없다. 조물주가 심어놓은 자애심의 미약한 불꽃도 자기애를 태워 없애버릴 수는 없다. -<도덕감정론> 본문

스미스는 그 이유를 '공정한 관찰자' 때문이라고 답했다. 공정한 관찰자란 이간의 상상 속 인물로, 인간의 행동은 이 공정한 관찰자와의 상호작용에 의해 이루어진다. 공정한 관찰자는 우리와 대화를 나누며 우리의 행동이 도덕적인지 확인해주는 공정하고 객관적인 인물이다. 즉, 어떤 행동이 도덕적인지, 어떤 행동이 옳은지 판단해야 할 때 우리는 이 인물과 얘기를 나눈다. 

공정한 관찰자는 양심과 아주 비슷해 보이지만, 스미스는 이 둘의 차이점을 친절히 알려준다. 양심은 각자의 가치관이나 종교 등의 원칙이 정한 기준에 어긋났을 때 자극을 받는다. 그런데 이런 기준은 상대적이고 개인적이기 때문에 스미스는 큰 가치를 두지 않는다. 이보다는 어깨 너머로 나를 쳐다보는 사람이 인간 대 인간으로 나를 심판한다고 상상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공정한 관찰자는 이성, 원칙, 양심, 가슴 속 동거인, 내부 인간, 우리 행동의 위대한 심판자이자 결정권자다. 그는 우리가 타인의 행복을 건드리려 할 때마다 우리의 몰염치한 격정을 향해 깜짝 놀랄만큼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친다.
“당신 역시 먼지처럼 많은 세상 사람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당신은 다른 사람보다 특별히 잘나지 않았다. 당신이 계속 그렇게 추잡스러우리만치 이기적으로 군다면, 분명 사람들의 분노와 혐오의 대상이 되고 말 것이다!" -<도덕감정론> 본문

<도덕감정론>에 등장하는 공정한 관차라는 인간이 그저 한낱 미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겸손하라고 조언한다. 

우리는 오직 공정한 관찰자를 통해서 나 자신, 그리고 내가 가진 것들이 미미하다는 것을 배운다. 우리는 공정한 관찰자의 눈을 통해서만 잘못 발현된 자기애를 바로잡을 수 있다. -<도덕감정론> 본문

공정한 관찰자는 우리에게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키시킨다. 내가 남들보다 더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다른 사람들에게 더 친절할 수 있다. 공정한 관찰자는 지나친 이기심은 말도 안되는 것이라고, 타인에 대한 배려심은 훌륭하고 고상한 것이라고 일깨워주는 내면의 목소리다. 

장발장의 노래에서 깨달은 사실

스미스는 신이나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 스스로가 항상 지켜보고 있다고 주장한다. 혼자 있어서 발각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해도, 내가 도둑질하는 걸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해도, 나 자신은 지금 내 행위를 지켜보고 있질 않은가. 그러므로 범죄 계획을 세우는 그 순간에도, 공정한 관찰자가 나의 도덕적 일탈에 어떻게 반응할지 생각할 수밖에 없다. 결국 우리는 스스로에게서 한걸음 뒤로 물러나 다른 사람의 눈으로 자신의 행동을 바라보게 된다. 

소설 <레미제라블>의 주인공 장발장 역시 그랬다. 도망 다니는 탈주자 신세인 그는 공교롭게 그와 꼭 닮은 사람이 체포되었고, 그 사람이 장발장을 대신해 오랫동안 감옥에 갇히게 된다. 장발장 입장에서는 엄청난 행운이 찾아온 셈이다. 하지만 자유의 몸이 될 순간을 앞두고 장발장은 죄 없는 사람이 고통을 받아도 되는 건지 고뇌한다.

나는 누구지? 그래,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그렇다고 내가 나 자신만을 위해도 되는 것일까?
거짓말을 해야  할까? 그럼 내 사람들을 어떻게 마주할 수 있겠는가? 내 자신을 어떻게 마주할 수 있겠는가? 
-레미제라블 동명 뮤지컬 노래 <Who Am I?>의 가사

결국 장발장은 자수를 선택한다.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내가 고통을 겪는 것은, 단순히 이익과 손해라는 기준에서 따지자면 비합리적이다. 그래서인지 스미스는 물질적인 비용과 이득만 생각하는 근데 경제학의 계산법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자선단체에 익명으로 기부하고, 언제 헌혈을 받게 될지도 모르는데 헌혈을 하고, 이 모두가 실은 아주 비합리적인 행동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망설이지 않고 기꺼이 이런 선행에 앞장선다. 과연 왜 그럴까? 

스미스는 인간이 도덕성을 타고난다고 본다. 인간에게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내면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으며, 인간의 도덕의식은 다른 사람들의 지지와 반감을 경험하면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렇듯 사람들은 타인의 반응을 경험하면서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을 심판하는 공정한 관찰자를 상상하게 된다. 공정한 관찰자를 상상하면, 나 자신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서 객관적으로 나를 바라볼 수 있다. 이는 인생을 살면서 우리가 피하거나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용감한 행동이다. 

실수를 인정할 때 보이는 것들

사람들은 모두가 자신이 착하다고 생각한다. 극악한 살인자조차 그렇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도 착한 사람이 되고 싶다면, 나 자신도 피할 수 없는 자기중심적인 성향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거기에 맞서야 한다. 우리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이고 싶어 하며 실제로 그렇든 아니든 스스로 착하다고 생각한다. 바로 그 순간이 공정한 관찰자를 떠올려야 하는 타이밍이다. 

공정한 관찰자를 자주 떠올릴수록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은 본래 자기 자신에 대해 얘기하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자기 의견을 입증하기도 좋아한다. 상상속의 공정한 관찰자가 당신을 대화 스타일을 어떻게 평가할까? 공정한 관찰자를 상상하면, 대화라는 행위가 상대의 얘기가 끝나기 무섭게 내 얘기를 쏟아내는 힘겨운 운동이 아니라 함께 어울려 추는 춤으로 바뀌게 된다. 서로 경쟁하듯 내뱉는 독백이 아니라 함께 나누는 진정한 대화로 거듭나는 것이다. 

무시당하거나 부당한 상황에 처했을 때 나 자신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생각해보라. 사람들은 가끔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일에 부당하다며 마음껏 화를 내곤 한다. 스미스는 그럴 때 한 걸음 물러서서 자신을 지켜보는 누군가에게 이렇게 물어보라고 조언한다. ‘혹시 내가 정의로운 십자군이 아니라 단순한 투덜이로 보이지 않는가?’ 짜증과 화가 솟구칠 때면,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라. 부당하다는 느낌에 불을 붙이지 않고 마음의 평정을 찾게 해줄 것이다.

내 평생에 걸친 업, 즉 인생이라는 업을 더 잘 해내고 싶다면 공정한 관찰자를 자주 떠올려야 한다. 공정한 관찰자에 대해 생각하면,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알 수 있다. 더욱 더 훌륭한 상사, 배우자, 부모, 친구가 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공정한 관찰자에 대해 생각하면, 현실 속의 관찰자와도 상호작용하면서 당신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인생의 평온함과 침착함, 행복까지 모두 얻을 수 있다. 

3장 행복을 위한 새로운 우선순위

당신은 어떤 길을 선택했을 때 더 행복하겠가? 꿈을 따라야 할까, 물질적인 이익을 따라가야 할까? 당신은 꿈을 이루는 데 얼마만큼의 돈을 쓸 의향이 있는가? 인생을 최대치로 활용하고 싶다면, 어떤 길을 선택하겠는가? 엄청난 부자가 되는 것보다 더 큰 즐거움을 안겨주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인생에서 간절히 원하는 것

당신은 이 질문에 쉽게 댇답할 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애덤 스미스는 명예나 재산을 추구하는 삶에 열광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 우리를 정말로 행복하게 만드는 것에 집중하라고 조언했다. 그는 우리를 정말로 행복하게 만드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사랑받기를 원할 뿐 아니라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도덕감정론> 본문

스미스는 우리가 쓰는 것과 다른 의미로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스미스는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하고, 존경하고, 자신에게 관심을 갖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이 표현을 썼다. 사람들은 사랑받기를 원한다. 애덤 스미스는 이것이 바로 인간의 본성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행복이란 감정은 사랑받는다는 느낌으로부터 생겨난다.’라고 덧붙였다. 이와 더불어 단지 사랑받는 것만이 아니라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스미스는 사람들이 비도덕적인 일을 안하려는 이유에 대해서도 공정한 관찰자를 적용한다. 즉, 사람들의 행동이 객관적인 관찰자의 판단에 의해 저지된다는 뜻이다. 스미스는 주위에서 우리의 행동이나 본모습을 관찰한 사람들이 ‘당신은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해.’라고 말해줄 때, 우리가 진정한 행복을 느낀다고 말한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다시 말하면 사랑받을 수 밖에 없는 자격을 갖추고 싶어 한다. 또한 인간은 선천적으로 미움받는 사람이 될까 봐 두려워한다. 미움받아 마땅한 사람이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인간은 칭찬받을 만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아무도 자신을 칭찬하지 않는다고 해도 마음으로는 칭찬받을 자격을 갖추고 싶어 한다. -<도덕감정론> 본문 

스미스에게 있어 사랑받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충분히 사랑스럽기 때문에 생기는 자연스러운 결과다. 사랑스럽다는 말은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고결함과 정직함, 훌륭한 원칙을 지닌 존재로 보이기를 원한다. 우리는 실제로도 존중, 칭찬, 관심, 명성이나 좋은 평판을 얻고 싶어 한다. 한 마디로, 사랑받을 자격을 갖추고 싶어 한다. 

또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건네는 사랑이 진짜이기를 원한다. 스미스는 우리가 자신이 평판, 즉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가에 신경을 쓸 뿐더러, 그 평판을 정직하게 얻었는지, 그 평판이 자신의 진짜 모습에 걸맞는지 신경 쓴다고 말한다. 

사랑받는 사람은 무엇이 다를까

사랑스러운 사람이 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다. 결혼에 대해 생각해보자. 누구나 좋은 배우자가 되고 싶어 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목적이 있어서 좋은 배우자를 꿈꾸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그저 옳기 때문에 좋은 배우자가 되고 싶어 한다.

사랑스러운 사람이 된다는 것은 수익을 얻으려는 투자가 아니다. 때문에 훌륭한 부부들은 상대에 대한 점수를 기록하지 않는다. “내가 장을 봐왔으니, 당신이 축구장에 애들 데려다줘.” 훌륭한 부부는 결코 이런 식으로 대화하지 않는다. 그것은 결혼이 아니라 그저 계약일 뿐이다. 그런 계약은 정육점 주인이나 빵집 주인과도 맺을 수 있다. 나는 아내와 그런 계약 관계를 원하지 않는다. 그저 단순히 좋은 배우자가 되고 싶어서, 다시 말하면 사랑스러운 배우자가 되고 싶어서 아내를 돕고 그로 인해 기쁨을 얻는다. 누가 계약에서 더 유리한지 겨루는 것과는 비교할 가치조차 없다.

스미스의 이상은  내면의 자아가 외면의 자아를 그대로 비출 때, 즉, 사람의 겉과 속에 다름이 없을 때 실현된다. 희대의 금융 사기꾼 버니 메이도프(폰지 사기로 150년 형을 선고 받음)는 발각되기 전 수년 간 금융의 천재로 평가받았다. 그 덕에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메이도프는 자신이 사기꾼이라는 사실 또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까. 소문에 의하면 메이도프가 체포된 뒤에 불안해하기는 커녕 도리어 안도했다고 한다. 더이상 자기를 속이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스미스는 사랑스러운 존재라고 상상만 하지 말고, 실제로도 꼭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그것이 삶의 진리이자 순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스로가 진짜가 되고 싶어 하고 주변 사람들이 나에 대해 갖는 생각이 진짜이기를 바란다. 스미스는 과분한 칭찬을 받는 사람은 그로 인해 괴로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누구나 칭찬을 들으면 기분이 좋다. 그러나 자신이 칭찬받을 자격이 충분치 않다는 사실을 알면 그 칭찬을 즐길 수 없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대신 칭찬을 받는 듯한 어색함 때문이다.

내가 하지 않은 행동에 대해, 혹은 실행하지 않은 나의 동기에 대해 칭찬하는 사람은 나를 칭찬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칭찬으로 부터 어떤 만족도 얻을 수 없다. -<도덕감정론> 본문

그런 다음 스미스는 왜 그런 칭찬에 사람들이 괴로워하는지 새로운 통찰력을 보여준다. 그것은 단순히 그 칭찬이 진실과 달라서가 아니다. 그 칭찬을 듣고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기 때문이다. 

그 칭찬은 우리에게 어떤 비난보다도 더 큰 굴욕감을 안겨준다. 그리고 그 칭찬으로 인해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초라한 반성을 하게 된다. 그 칭찬처럼 되지 못한 지금의 우리 모습에 대하여. -<도덕감정론> 본문

물론 비난을 무시하고 스미스가 말하는 ‘근거 없는 칭찬’을 기꺼이 즐기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다. 그리고 더 나쁜 사람이라면 거짓 생활을 하며 사람들의 칭찬을 유도하려고 한다. 스미스는 내면의 자아와 외면의 자아를 잘 조화시키라고 조언한다. 사람이라면 가끔 실제로 사랑스럽지 않은데도 사랑받고 싶어 할 수도 있다면서.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현명한 사람이라면 그런 충동을 억제할 줄 안다고 날카롭게 말한다. 

위험한 칭찬의 함정

칭찬을 하는 사람의 잘못된 판단에서 비롯되거나 보통 아첨이라고 부르는 거짓 칭찬이 존재한다. 스스로 믿고 싶은 거짓된 칭찬 역시 존재한다. 아첨에는 두 종류가 있다. 누군가에게 호의를 보일 때 사용하는 사교적인 아첨과 진실하지 못한 숨겨진 이유가 존재하는 전략적인 아첨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어 하기 때문에 가끔은 주변 사람들의 기대에 걸맞는 행동을 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우리의 인생은 다방면에서 우리에게 영향을 주고 싶어 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내가 사랑받고 싶어 하는 것처럼, 내 주변 사람들도 똑같이 다 사랑받고 싶어 한다. 때때로 그들은 전략적인 이유 때문에, 또는 그냥 실수로 우리를 속이곤 한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도 내가 그런 사람이라고 착각하게 만든다. 스미스는 우리에게 이런 아첨에 속지 말라고 조언한다. 그는 자기 자신을 솔직하게 대면하라고 권한다. 그래야 현실이 정반대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충분히 사랑스러워!’라며 자기최면을 거는 우를 범하지 않기 때문이다. 

4장 진짜와 가짜 구별하기

당신은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기 위해 무엇을 기꺼이 포기할 것인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늘 크고 작은 선택을 이어간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경우처럼 말이다. 일요일 아침, 점심을 먹기 전이다. 서두른다면 체육관에 가서 운동할 시간이 충분하다. 사실은 이게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들 녀석이 수학 문제 푸는 걸 도와달라 하고, 아내는 서둘러 마트에 다녀올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리고 병원에서 막 퇴원한 이웃 역시 병문안 차 들러주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다. 이 모든 일을 전부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떤 일을 하는 게 가장 옳은 선택일까? 일상의 사소한 결정은 실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다. 하루하루 이러한 선택들이 쌓이고 쌓여 결국 삶을 이루는 게 아닌가. 

자아도취가 불러오는 비극

애덤 스미스는 사람들이 공정한 관찰자가 정한 기준, 혹은 주변 사람들의 기준에 부응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인간이 ‘자기기만'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라고 봤다. 우리는 자기애에 취한 나머지 "공정한 관찰자가 실은 공정하지 않아.”라며 스스로를 속인다. 

인간은 맹렬하고도 부당하기 짝이 없는 이기적인 욕망에 압도당한 나머지, ‘가슴속 그사람’, 즉 공정한 관찰자의 얘기를 제대로 듣지 못한다. 그리고 누가 봐도 옳지 않은 일들을 저지른다. -<도덕감정론> 본문

인간은 매순간 옳은 일을 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많다. 이기적인 욕망 앞에서 너무 쉽게 무릎을 꿇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인 건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침착하게 자신의 행동을 반성할 수 있다. 

실제 이기적인 행동을 저지르고 그 행동을 부추긴 욕망이 사라지고 나면, 그제야 우리는 공정한 관찰자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공정한 관찰자의 눈으로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게 된다. -<도덕감정론> 본문

과거의 행동에 대한 인간의 반성은 깨달음과 배움의 과정을 거쳐 변화의 욕구로 이어질 수 있다.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인간이 과거의 행동을 반성할 때 항상 솔직한 것은 아니다. 자기 행동에 대한 솔직한 평가를 감당하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부정한 사람임을 인정하는 건 매우 불쾌한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종종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외면하려 한다. -<도덕감정론> 본문

사랑받고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에 대한 스미스의 생각을 풀어 쓰면, 우리는 사랑받고 싶어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생각하고 싶어한다. 즉, 자신을 실제 그대로 보지 않고, 이상적인 모습으로 바꿔 생각한다는 뜻이다. 자기기만은 솔직한 자기인식보다 훨씬 마음을 편하게 만든다. 그래서 사람들은 스스로를 속이기를 좋아한다.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게 심적으로 훨씬 즐겁기 때문이다. 솔직한 자기인식에 있어서 사람들은 모두 겁쟁이다. 가끔 나는 나를 가장 속이기 쉬운 사람이 된다. 

두 자매의 엇갈린 본심

행동경제학의 창시자이자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대니얼 카너먼은 아모스 트버스키와의 실험 연구를 통해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그리고 자주 현실을 잘못 인식하는지 밝혀냈다. 2003년 카너먼과 노벨경제학상의 공동 수상자였던 버논 스미스 역시 실험을 통해 사람들의 이런 실수가 오히려 시장에서 이점으로 작용하기도 하는 현상을 증명하기도 했다. 이들에 따르면, 자신의 집이나 혹은 자신의 능력이 실제보다 더 좋고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집을 팔거나 직장을 구할 때 실제로 더 높은 평가와 인정을 받는다.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인간의 특징이 거꾸로 이점으로 표출되는 경우다. 이들 연구 결과처럼, 사람들 중 일부는 약간의 자기 기만이 자신에게는 물론 사회생활을 하는 데 이점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래서 자존심이나 자신감이 조금 과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기기만, 혹은 자신의 장점을 과대평가하는 데 대한 스미스의 생각은 단연코 부정적이다. 현실을 직면하지 못하는 무능함, 자신이 실제보다 더 사랑스럽고 도덕적이라는 착각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결점을 고치지 못한다. 문제는 자신의 결점은 잘 보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도덕적 결점은 빨리 파악한다는 데 있다. 스미스는 이런 시각의 불균형을 경고한다. 

자기기만은 인간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인간이 살면서 겪는 혼란의 절반은 바로 이 자기기만에서 비롯된다. 인간이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자신을 바라볼 줄 알기만 해도 자기기만이란 맹점에 빠지지 않는다. 자기기만을 계속 방치한다면 결국 우리는 거짓된 자기 모습을 견디지 못하게 될 것이다.  -<도덕감정론> 본문

이런 불균형을 바로잡는데는 주위 사람들의 결점을 통해 자신의 결점을 되돌아보는 방법을 이용하면 도움이 된다. 결점이 있는 이웃이 나의 결점을 고치도록 돕는 이상적인 거울인 셈이다. 따라서 동료가 사소한 일에 짜증낸다면, 사소한 일에 예민하게 군다고 당황해 할 것이 아니라 이를 거울삼아 나도 사소한 일에 짜증낸 적이 없는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다. 마친가지로 어린 아들이 짜증을 낸다면, 기억을 거슬러 내가 어릴 때 짜증을 어떻게 가라앉혔는지 생각해내 이를 아들에게 몸소 보여줘야 할 것이다. 

자기기만이 인간의 치명적인 약점이긴 하지만, 다행히 공정한 관찰자의 영향력을 강화시켜 이를 극복할 수 있다. 

조물주는 자기기만이라는 인간의 약점을 방치하지 않았다. 또한 인간이 완전한 착각 속에 빠져 살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았다. 다행히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지속적으로 관찰하면서 스스로 어떻게 사는 게 옳은지 깨닫게 만들었다. -<도덕감정론> 본문

우리는 다른 사람의 행동을 관찰하면서 무엇이 적절하고, 적절하지 않은지 배운다. 세상을 통해 알게 되는 사회적 규범과 도덕적 원칙을 통해 우리는 어떤 행동은 존경을, 어떤 행동은 비난을 부르는지 알 수 있다.이를 통해 이기심으로 가득한 욕망을 잠재우고 이에 맞서 싸울 수 있다. 동시에 우리는 사람들이 어떤 행동 방침을 선택하는지도 지켜본다. 그리고 그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는지 주시한다. 만약 그 행동이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면 그 행동을 따라하지 않는다. 반대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면 직접 그 행동을 하고자 마음먹는다. 혐오스럽거나 반대로 존경스럽다고 생각하는 행동에 대해 우리는 본능적으로 반응한다. 

이렇게 타고난 반응과 경험으로 부터 얻은 교훈을 통해 우리는 무엇이 옳은 행동인지 알게 된다. 이러한 규범들은 우리 삶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리고 이 규범들을 통해 공정한 관찰자는 자기애가 야기하는 나쁜 욕망을 굴복시킬 수 있다. 

'나에게 좋아 보이는 일이 실제로 당신에게도 좋다.’ 사람들이 실제로는 이기적인데도 자신이 이타적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이타적으로 보이고 싶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종의 자기광고다. 사랑받고 싶어 하는 바람을 이타적인 형태로 표현할 뿐이다. 또 다른 이유는, 다른 사람들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납득시키기 위해서이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속여 자신이 사랑스럽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실은 자신에게 가장 득이 되는 일인데도, 마치 다른 사람을 위한 선택이라고 스스로를 납득시킨다. 

거울을 봐도 내가 안 보일 때

스미스에 따르면, 우리가 이상적으로 살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나쁜 사람이어서도 아니고 이기심이 너무 커서도 아니다. 스스로가 이상적인 삶에 부응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해서다. 사람들은 자신의 결점을 자기기만의 베일 뒤로 숨길 뿐 아니라 미덕으로 바꾸어놓기까지 한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공정한 관찰자를 마주보기가 힘들다. 

책을 쓰는 중인데 아들이 숙제를 도와달라고 하면 “아빠 지금 바빠.”하고 거절한다. 그러면서 훌륭한 책을 써내면 성공할 것이고 그러면 아들의 대학 입학금을 벌 수 있다고 스스로를 납득시킨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이렇게 되뇐다. “사실 아들은 내가 자기 숙제를 도와주는 것보다, 훌륭한 책을 써내기를 더 원할거야. 그러니 도와달라는 아들의 부탁을 무시한 것은 이기적인 행동이 아냐. 아주 이타적인 일이라고."

개인의 이익이 걸려 있으면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기 어렵다. 반면 순전히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하면서 옳은 일을 한다고 스스로를 납득시키기는 쉽다. 그러한 상황에서 스스로를 지키는 한 가지 방법은 멘토와 같은 현실에서의 공정한 관찰자를 찾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눈을 자주 멀게 하는 자기기만이라는 짙은 안개를 걷어줄 것이다. 

자기기만에 대한 스미스의 통찰력은 오늘날 '확증 편향’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확증 편향은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박하는 증거를 무시하고 내 믿음을 확인시켜주는 증거만을 열렬히 받아들이는 성향을 말한다. 스미스는 인생에서 겪는 혼란의 절반이 자기기만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사람들은 일상적인 행동에서만 자신을 속이는 게 아니다. 자신의 신념을 구축하는 데 필요한 세계관, 이념과 종교와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 세상에 대한 해석에 대해서도 자신을 속인다. 우리가 인식하고 기억하는 모든 증거를 통해 자신의 관점이 맞는지를 증명해내지만, 그 외의 다른 것들에 대해선 분석에 결함이 있다며 묵살하거나 아예 잊어버린다. 우리는 밝은 가로등 아래서만 열쇠를 찾는 술꾼과 다름없다. 열쇠가 밝은 가로등 아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술꾼말이다. 실은 가로등 아래가 다른 곳보다 밝기 때문에 그 주위만 맴돌며 열쇠를 찾고 있는 것뿐이면서. 

나심 탈레브의 뼈아픈 충고

이렇듯 알면 알수록 복잡한 인간 세계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키워드 중 하나가 바로 사상가 나심 탈레브의 '이야기 짓기 오류’(복잡한 상황을 자기 식으로 해석한 이야기를 통해 받아들이는 것)다. 사람들은 본래 멋지고 깔끔한 패턴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따라서 그런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증거 또한 사람들은 정설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이야기에 맞지 않는 다른 증거는 쉽게 무시하고 잊어버린다. 

미국 신문이나 웹사이트 경제면에는 그 날이나 그 전날의 주식 시장에 대한 기사가 거의 매일 등장한다. 매체에 따르면, 주가가 하락한 이유는 노동통계청의 안 좋은 보고서 때문이거나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의 발언에 투자자들이 겁먹었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면 투자자들이 초조해 하거나 변덕을 부리는 등 심적으로 위축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음날 주가가 올라가면 경제학자들은 갑자기 180도 다른 설명을 들먹인다. 이상해보이지만 실은 전혀 이상할 게 없다. 어제 주가를 끌어내린 요인이 오늘의 주가를 끌어올리는 요인으로 뒤바뀔 수 있다. 투자자들은 하루 만에 위축된 마음을 탈탈 털어버렸고,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은 생각만큼 암울하지 않아서 오히려 투자자들의 기분을 들뜨게 했다. 또한 노동통계청의 데이터가 충격적이긴 하지만, 경제분석국이 내놓은 새로운 데이터는 투자자들에게 충분히 낙관적인 전망을 안겨주었다. 보라보! 그러니 주가는 당연히 상승할 수밖에 없다!

19세기 의사들은 산욕열(분만으로 생긴 생식기의 상처에 균이 침입하여 생기는 병)로 사망하는 산모 수를 줄이려고 무던히 애썼다. 그런 그들이 정작 급히 산부인과 병동으로 달려갈 땐, 시체 부검한 손을 제대로 소독하지 않은 상태였다. 세균범벅이 된 자신들의 손이 산모에게 병을 옮기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한 것이다. 의사들은 가정 분만이 병원 분만에 비해 극적으로 산욕열 발생 빈도가 극적으로 줄어든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산욕열의 위험 인자가 공기 중에 있다는 엉뚱한 결론으로 모아졌다. 이에 의문을 품은 헝가리 출신 의사 이그나츠 제멜바이스는 산욕열과 예방 치료에 관한 이론을 제시하며, 의사들이 소독약으로 손을 철저하게 닦아야 산욕열을 없앨 수 있다고 동료 의사들을 설득했다. 하지만 의사들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그저 병원 공기를 환기하는데 열중했다. 왜 의사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을까? 애덤 스미스는 이를 명쾌하게 설명한다. 동료 의사들은 그 말을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너무 고통스러웠다. 자신들이 사랑스러운 사람이 아니라는 걸 받아들여야 했기 때문이다. 

나심 탈레브는 파리를 여행하는 사람에게 지독  있으면 매우 유용하겠지만, 그 지도가 뉴욕의 지도라면 얘기가 달라진다고 말한다. 길을 잃은 것도 모르면서 지나친 자신감을 갖는 것보다 차리라 길을 잃은 현실을 직면하는 게 낫다. 자기기만에 대한 스미스의 생각은 이성의 한계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든다. 인간에겐 분명 결점이 존재한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곧 지혜의 시작이다.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려는 인간의 욕구는 반대 의견을 아예 묵살해버릴 정도의 무서운 힘을 발휘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속여 자신이 사랑스럽다고 믿을 수 있다. 사랑받으려는 인간의 욕구 자체가 위험하다는 스미스의 말은 그래서 더 의미 있게 다가온다. 

5장 잘되는 사람은 어떤 선택을 할까

21세기에도 여전히 자신에게 관심 갖는 사실을 알게 되면 애덤스미스는 기분이 좋을까? 스미스는 생전에 건강했고, 빚도 없었으며, 깨끗한 양심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실제 그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갖고 있었다. <국부론>과 <도덕감정론>으로 크나큰 부와 명성을 얻었던 것이다. 혹시 이것이 그를 더 행복하게 만들지는 않았을까? 

사람들이 부와 명예를 추구하는 진짜 이유

사람들은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거나 부유해지면 더 행복해질 거라 생각한다. 인간의 행복에 돈이나 일에서의 성공은 얼마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가? 스미스의 결론은 부나 명예는 결코 인간의 행복을 완성하지 못한다는 데 있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부와 명예에 대한 야망을 버리지 못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조건이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핵심적인 요소라고 생각한다. 왜 우리 인간은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마음속 무언가로 인해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원한다. 그런데 마음속 또 다른 무언가는 많이 가지는 것이 결코 더 좋은 것은 아니라고 말해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세속적인 부와 명예는 피하기 힘든 매력을 발산한다. 이 두 가지가 결핍됐을 때 과연 진정 행복할 수 있을지 의문도 든다. 자본주의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는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것과 세속적인 부와 명예, 이 둘을 스미스는 어떻게 조화시킬까?

돈에 대한 애덤스미스의 생각

애덤스미스는 <플루타르크 영웅전>에 실린 이야기를 꺼낸다. 
그리스의 일부였던 에피로스의 왕, 피로스는 로마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때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던 키네아스가 물었다.
“폐하, 만약 신께서 로마를 이기도록 허락하신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겠나이까?"
“일단 로마를 정복하고 나면, 이탈리아 반도를 통째로 정복할 수 있을 것이다."
키네아스가 그럼 그 다음은 어떻게 하시겠냐고 물었고, 왕은 다시 대답했다.
“그 다음은 시실리를 정복할 것이다."
키네아스는 다시 그 다음은 어떻게 하시겠냐고 물었고, 왕 또한 다시 대답했다.
“리비아와 카르타고가 우리에게 무너질 것이다."
키네아스는 포기하지 않고 “그럼 그 다음은 어떻게 하시겠나이까?”라고 물었고, 왕은 역시 포기하지 않고 “그리스 전역을 정복할 것이다.” 라고 대답했다. 마지막으로, 키네아스는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겠느냐고 묻자, 왕은 마지막으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내 소중한 친구여, 우리는 편안하게 살 것이다. 그리고 하루 종일 술을 마시고 즐거운 대화를 나눌 것이다."
그러자 키네아스가 왕에게 일격을 가했다.
“그럼, 지금 폐하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시나이까?"

우리는 우리 삶을 만족시킬 도구들을 이미 모두 갖고 있다. 삶의 기본적인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이탈리아 반도를 정복할 필요는 없다. 인생은 경주가 아니라 음미하고 즐기는 기나긴 여정이다.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끈질긴 욕구, 즉 야심이 우리를 삼켜버릴 수 있다. <플루타르크 영웅전>은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에 집필되었다. 돈과 권력이 권력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는 사실은 실로 오래된 진리다. 

스미스는 사람들이 기기의 편리함보다는 기기 자체가 갖는 우아함에 더 신경을 쓴다고 했다. 그러면서 하루에 2분씩 느리게 가는 시계를 예로 들었다. 18세기에는 시계가 몇 분씩 느리게 가는 일이 흔했다. 사실 누구나 돈을 더 주면 시간이 정확한 시계를 살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가졌다고 해서 시간 약속을 잘 지키는 건 아니다. 스미스는 이러한 모순을 꼬집으면서, 그 시계가 더 정확해서 산 것이 아니라 단지 고급스러워서 샀을 가능성이 크다고 얘기했다. 

인간의 삶이 비참하고 혼란스러운 가장 큰 이유는 소유물이 곧 자신이라 착각하기 때문이다. -<도덕감정론> 본문

스미스는 기기나 장비들이 인간의 지위와 부를 드러내는 바로미터가 될 거란 예견도 했다. 효용성을 차치하고, 가장 유행하는 최신 휴대폰, 자동차, 장난감을 원하는 또 다른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세상을 향해 그리고 나 자신을 향해 내가 누구인지 일깨우는 한 가지 방법, 그것은 바로 내가 어떤 물건을 소유했느냐이다. 이런 착각은 인간의 야심에서 비롯되었다고 스미스는 지적했다. 

사람들은 더 부자가 되거나 더 유명해지거나 더 나은 일자리를 얻을 때만 더 행복해질 거라고 상상한다. 우리가 갖고 있는 거에 대해 불만을 품게 하는 악덕을 스미스는 탐욕, 허영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사람들이 돈이 적은 것보다는 많은 것을 선호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나의 부와 명예를 사람들이 인정해줄 때는 물론 즐겁다. 그러나 소비나 욕구나 대중의 찬사가 주는 쾌감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그러다가는 결국 신중과 정의의 원칙을 어기게 되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유명인에게 열광하는가

스미스는 현대인들의 성공의 요소라 부르는 것들에는 전혀 잘못된 게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를 너무 격정적으로 따른다면 영혼이 좀먹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돈과 명예를 맹목적으로 따라가면 인생은 엉망이 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대체 왜 그렇게 열심히 물질적인 성공을 추구할까? 스미스의 대답은 간단하다.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거나 몰라서 그렇다는 것이다. 부자가 되고 유명해지면 정말로 행복해질 거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스미스는 이보다 더 치명적인 다른 이유가 있다고 했다. 사랑받고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려는 인간의 욕구 때문이라는 것이다. 세상은 현명하고 도덕적인 사람뿐 아니라, 돈 많고 유명하고 유력한 사람들에게도 관심을 갖는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지혜와 미덕이 존경의 유일한 대상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부도덕하고 어리석은 행위가 유일한 대상도 아니라는 사실 역시 깨닫는다. 실제로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지혜로운 사람, 도덕적인 사람보다는 부자와 권세가들에게 존경심 가득한  눈길을 던지는 모습을 자주 목격하지 않는가. -<도덕감정론> 본문

스미스는 돈이나, 명예, 권력을 따르는 행위 모두 동일한 유혹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다. 그 행위들이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과 주목을 받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스미스는 왜 사람들이 유명해지길 원하는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게 왜 관심을 갖는지 설명한다. 

스미스는 우리가 정치적으로 유력한 사람들을 특별히 좋아한다고 말한다. 그가 살던 시대에는 왕과 귀족이 정치적으로 유력한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의 숭배를 받는 독재자, 권력을 거머쥔 지도자들도 과분한 칭찬을 받고 한다. 그들이 받는 과분한 칭찬이 실제 업적과는 어울리지 않는 경우도 많지만, 어쨌든 왕이나 대통령 암살은 일반인을 살해한 경우보다 훨씬 극악한 범죄로 치부된다. 

군주를 살해하려고 음모를 꾀하는 반역자는 살인자들 중에서도 가장 극악무도한 놈으로 인식된다. 때문에 찰스 1세의 죽음은 엄청난 공분을 불러 일으켰다. 왕의 죽음은 내전 중에 무고한 사람들이 흘린 엄청난 양의 피보다 훨씬 강력한 분노를 야기한다. 

저명인에게 과하게 동조하는 인간의 성향 때문에 폭군마저도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따라서 폭군의 위대함과 행복을 이상화한 우리에게, 폭군에 대한 저항은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는 행동일 수밖에 없다. 머리로는 비합리적이고 저항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심정적으로 그들을 따른다. 

그러나 세인의 관심은 유명인에게 있어 끔직한 마약과도 같다. 유명한 정도가 아니라 대중에게 흠모의 대상이 된 경지에 올랐다면, 일상이 주는 즐거움에 만족할 수 없다. 

세력을 잃고 자리에서 물러난 정치인들을 보라. 그들은 스스로 편해지기 위해 마음을 다스린다. 야심을 가라앉히고 더 이상은 가질 수 없는 명예를 하찮게 여기려고 애써 노력한다. 그러나 그들 중 이런 노력에 성공한 사람이 얼마나 있었던가.

날마다 격렬한 환성을 받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아마도 똑같은 흥분을 느끼기 위해 계속 복용량을 늘려야 하는 마약과도 같을 것이다. 그렇다면 명예와 성공을 손에 쥐는 것은 축복인가, 저주인가?

진정 통하는 것은 따로 있다

브래드 피트처럼 살면 행복할까? 아름다운 아내, 엄청난 재산, 세계적인 명성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아주 크게 성공한 사람들이 특별히 행복해 보이지 않는 경우도 많다. 엘비스 프레슬리, 휘트니 휴스턴, 마이클 잭슨, 메릴린 먼로를 생각해보자. 짜릿했던 인기는 사라졌고 잃어버린 것은 늘어만 갔다. 그 어떤 짜릿함도 인생에서 잃어버린 것을 보상해주지 못했다. 부자가 되거나 유명해지거나 아니면 둘 다가 되려는 욕망은 인생에 있어 반드시 피해야 할 독약이다. 페달에 일단 발을 올리고 나면, 멈추지 않고 계속 밟아야 하니까.

유명해지고 부자가 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지만 그것만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늘 겸손해야 한다. 가능하면 내가 좋아하고 존중하는 일을 하고, 그렇게 해서 가족이 먹고 살 수 있다면, 그것에 만족하라. 그 외에 모든 것은 ‘뜻밖에 얻은 횡재’로 생각하라.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그만인 것이다. 탈무드는 이렇게 말한다. 부자란 '자기 운명에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다. 내 운명에 내가 가진 것에 만족이 잘 안 된다면 스미스가 말한 두 가지를 기억하라. 관심 받기를 원하는 인간의 욕구와 관심 받기 위해 필요한 것 이상으로 더 많은 것을 원하는 인간의 심리 말이다. 

스미스는 인생의 만족에 이르는 길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돈예 명예 말고도 우리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다. 재산이나 명예, 권력을 통해 세인의 관심을 추구하는 대신, 지혜롭고 선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부자, 유명인, 권세가 되어 타인의 사랑받는 방법 외에 현명하고 도덕적인 사람이 되어도 타인에게 충분히 사랑을 받을 수 있다. 

우리에게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인간 표본이 제시된다. 우리는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성격과 행동을 만들어간다. 그 중 하나는 천박하고 화려하게 반짝반짝 빛나는 반면, 다른 하나는 비록 화려하진 않지만, 윤곽이 선명하고 우아하며 또 아름답다. 전자가 목적 없이 헤매는 사람들의 주목을 끌어당긴다면, 후자는 열심히 배우고 신중하게 관찰하는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다.

전자의 길을 걷는 사람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는다. 지혜와 미덕의 길을 선택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이 아니라 ‘열심히 배우려 하고 신중하게 관찰하는 사람’에게만 존경을 주목을 받는다. 그러니 환호하는 청중도 많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스미스는 사람들에게 존경과 감탄을 받을 만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결과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를 향한 사랑은 시대를 초월하여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고 스미스가 불멸의 명성을 얻기 위해 일부러 계획했거나 노력을 기울였던 것은 아니다. 그가 얻은 불멸의 명성은 ‘뜻밖에 얻은 횡재’였다. 

우리도 그처럼 삶에서 지혜와 미덕을 추구해야 한다. 언제나 공정한 관찰자가 우리를 지켜보는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공정한 관찰자의 시선으로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돈과 명예의 유혹을 피해야 한다. 그것들은 결코 우리를 만족시켜주지 못하니까. 나는 이런 선택이 충분히 이익이 남는 거래라고 확신한다. 

6장 사랑받는 사람이 되는 법

스미스가 제시하는 행복 처방전은 단순하다.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내 모습이 실제의 나와 같은, 즉 정직한 방법으로 사람들의 존경과 존중을 받는 것이다. 사랑을 받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부자가 되고 유명해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현명하고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스미스는 그 중 두 번째 방법, 즉 지혜와 미덕의 길을 선택하라고 충고했다.

그렇다면 미덕이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스미스의 첫 번째 답은 ‘적절성’이라 부르는 최소한의 기준을 지키는 것이다. 스미스는 이 단어를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만하고 상황에 어울리게 행동한다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했다. 이는 주변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며 말과 행동을 한다는 것을 뜻한다. 나의 목적과 의도가 좋아도 적절한 방법을 선택하지 못하면 결과적으로 기대하는 방식과 반대로 행동하게 되고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없게 된다.

적절과 부적절의 경계는 어디인가

적절한 행동에 대한 주위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면, 관계가 매우 순조로워질 뿐 아니라 그들과 우아하고 즐겁게 지낼 수 있다. 적절성은 모든 사람들이 참여하는 교양곡에서 자신의 파트를 연주하는 것과 같다. 교향곡이 아닌 솔로 연주와 즉흥 연주라 해도, 모두가 기대한 방향으로 연주할 때 가장 큰 박수를 받는 법이다. 

적절성은 시대별로 차이가 있다. 하지만 어떤 시대, 어떤 사회든 대체적으로 적절하다고 혹은 부적절하다고 여기는 행동의 기준은 언제나 존재한다. 스미스가 말하는 적절성은, 인간 본성 그리고 타인의 감정에 대한 반응에 집중한다. 즉, 주위 사람들의 감정과 경험에 공감되거나 공감되지 않는 기준의 문제라는 뜻이다. 그의 책 제목이 왜 <도덕감정론>인지 드러나는 부분이다. 

스미스는 타인과 나의 반응이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면, 각자의 반응을 서로가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다소 가혹하게 들린 만하다. 내 고양이가 죽어서 나는 흐느끼는데 당신은 냉정을 유지하고 있다. 이 경우 당신은 정말로 내 반응을 인정하지 않는 것일까? 나는 매번 들을 때 마다 눈물이 나는 곡이 있다. 나는 그 노래를 최고의 노래라고 칭찬하지만 당신은 그 곳이 진부하다고 빤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각자 좋아하는 노래가 충분히 다를 수 있지 않을까? 남의 취향이 나와 다른 게 무슨 큰 문제란 말인가? 이게 적절성이나 사람 관계에 있어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인가? 

이런 생각을 하다 나는 사람들이 타인의 반응에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는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궁금해졌다. 이에 대해 스미스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감정의 조절이 빚어내는 마법

각자의 취향이 다를 수 있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내가 좋아하는 것을 상대도 좋아하길 바라는 마음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스미스는 말한다. 때로는 바라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상대도 좋아하도록 설득하기까지 한다고 했다. 내 슬픔에 대하여 상대가 과도하게 슬퍼하거나 별로 슬퍼하지 않는다면, 나는 당혹스럽고 불편한 감정을 느낀다. 친구들과 정치에 대해 얘기할 때 서로 의견이 다르면 불편하고 화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나와 상대방이 느끼는 감정의 격차가 커질수록, 둘은 서로의 반응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하면서 점점 멀어질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의 감정이 어긋나기보다는 조화하는 쪽을 선호한다. 스미스가 다룬 감정과 사회적 공감에는 이 조화의 개념, 즉 내 감정과 상대의 감정이 일치할수록 좋다는 개념이 관통한다. 스미스는 우리가 비극적인 사건을 겪거나 승리를 맛볼 때, 상대의 감정이 내 감정과 같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비극적인 사건에 맞설 때, 나는 상대가 내 슬픔에 동조하길 원한다. 상대가 내 슬픔의 일부를 나눠갖는 것으로 나는 충분히 위로를 받는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상대는 내 슬픔을 상상만 할 수 있을 뿐, 나와 온전히 같은 입장은 될 수 없다. 상대는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대의 감정을 느끼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 100퍼센트 공감할 수는 없다. 

여기서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진다. 상대가 나와 똑같이 고통스러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나는 상대 앞에서 일부러 내 슬픔을 누그러뜨린다. 나만큼 슬퍼하기를 기대하는 대신, 내 슬픔을 조금 낮추는 것이다. 반대로 상대는 나만큼 슬픔을 느끼려고 무진 애를 쓴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상대가 느낄 수 있는 수준에 맞춰 슬픔의 감정을 더 세밀하게 조절한다. 친구들보다 가족 앞에서 훨씬 편하고 격하게 울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가족은 친구보다 내 슬픔에 더 가까이 있으므로, 굳이 조절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격렬한 슬픔에 빠진 나를 주변 사람들이 위로해줄 때, 나는 큰 위안을 받는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내 슬픔에 온전히 공감할 수 있도록 나의 감정을 적절히 억제한다. 그래야 위안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감정의 강도를 서로 맞춘다는 개념을 정확히 표현하기 위해 스미스는 음악을 빗대어 화음을 위해 올라간 반음을 내린다고 표현했다. 그리고 다행히 고통 받는 사람이 위안을 받는 데 반드시 감정의 일치가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두음이 똑같은 것이 동음이다. 반면 두음이 똑같지 않아도 듣기에 좋은 것이 협화음이다. 동음이 아닌 협화음이야말로, 사람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최상의 결과다. 

또한 스미스는 가까운 친구가 곁에 있다면, 슬픔이 없어질 수도 있다고 말한다. 친구로부터 위안을 받는 것은 친구의 눈을 통해 자신의 고통을 들여다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친구의 시선으로 자신을 본다. 그러면 자연적으로 슬픔이 줄어든다. 

우리는 곧바로 친구가 내 처지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볼지 생각한다. 그리고 친구와 똑같은 시각에서 내 처지를 바라보기 시작한다. 이러한 공감의 효과는 즉시 나타난다. 

단순한 지인에게 우리가 기대하는 공감은 친구에게 기대하는 공감보다 덜하다. 친구에는 드러낼 세세한 사정들을 단순한 지인에게는 모두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인 앞에서는 더욱 평온한 척하고, 그가 기꺼이 마음 써줄 일만 털어놓는다. 그런가 하면 낯선 사람에게는 이보다 훨씬 더 적은 공감을 기대한다. 따라서 우리는 낯선 사람 앞에서는 훨씬 더 평온한 척한다. 아무리 내 감정이 격해도 그가 공감할 만한 수준까지 낮추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지인이나 낯선 사람 앞에서 평온한 척하는 것이 꼭 가식은 아니다. 이는 실제로도 우리의 격한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우리가 우리 마음을 자유로이 제어할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우리는 친구보다는 단순한 지인과 있을 때 실제로 마음이 더욱 진정된다. 그리고 지인보다도 낯선 사람과 함께 있을 때 훨씬 더 진정된다. 

때문에 모르는 사람들이 주위에 있으면 친구가 옆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평점심을 되찾을 수 있다. 자못 독특한 시각이다. 감정적인 문제를 겪던 사람이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평정심을 찾았다면, 이는 단순히 평온한 척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기분이 나아졌다는 얘기다. 모르는 사람은 나의 처지를 완벽하게 공감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그 사람의 공감 정도에 맞게 격한 감정을 확 조절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쁨은 어떨까? 사람들은 기쁨에 대해서도 똑같이 행동한다. 승진을 했거나 연봉이 올랐을 때, 혹은 회사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거나 공들여 쓴 제안서가 통과됐다고 생각해보자. 집에 가서 가족들에게 그 소식을 전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힘겨울 지경이다. 자, 그때 마침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가끔 학교 행상에서 마주친 이웃을 만난다. 평소에도 이런저런 수다를 떨곤 했던 사람이다. 이웃이 요즘 잘 지내냐고 묻는다. 순간 갑자기 놀를 부르고 싶을 만큼 마음이 들뜬다. 신나서 외치고 싶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웃에게 그런 모습을 보일 만큼 친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에 와서 가족들을 보자마자 곧바로 참았던 기쁨을 표출하며 서로 부등켜안는다. 

우리는 이렇게 배우자나 부모, 가장 친한 친구들과 인생의 성공과 행복을 함께 나눈다. 그런데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내가 느끼는 기쁨을 온전히 똑같이 느끼지는 못한다. 스미스는 타인의 슬픔과 기쁨에 반응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많이 난다고 말했다. 상대가 작은 성공을 거두면 나도 함께 좋아한다. 그러나 상대가 갑작스럽게 크게 성공하면, 내가 기뻐하는 데 다소 힘이 들 수 있다. 질투심이 추악한 고개를 들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작가인 고어비달은 이에 대해 더욱 직설적으로 말했다. ‘친구가 성공할 때마다 나는 조금씩 죽어간다.'

슬픔과 기쁨에는 차이점이 있다. 일반적으로 기쁨은 작을수록, 슬픔은 클수록 쉽게 공감하는 경향이 있다. 갑작스런 운명으로 생활 여건이 과거보다 훨씬 높아진 사람이 있다. 그는 친한 친구들이 건네는 축하 인사가 모두 진심은 아니라는 걸 눈치 챌 것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만나는 작은 기쁨으로도 충분히 행복해진다. 이렇게 우리가 작은 기쁨들을 주위 사람들과 나누면, 그들에게도 행복이 잔잔하게 퍼진다. 하지만 우리가 누린 큰 성공에 대해서는 그 기쁨이 너무 큰 까닭으로, 가장 친한 친구나 가족하고만 그 기쁨을 나눈다. 

슬픔은 정 반대다. 보통 우리는 사소한 고민거리로 짜증이 난 사람에게는 쉽게 공감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고민거리는 공감을 얻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했다. 사람들이 그런 사소한 고민거리를 비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교외에 나갔는데 날씨가 나쁘다고, 여행 중에 도로 상태가 좋지 않다고, 시내에 나갔는데 친구도 없고 재믿 없다고 성이 난 사람들이 있다. 물론 그들 나름대로 화가 난 이유가 있겠지만, 다른 사람의 공감을 얻어내지는 못할 것이다. 인간에게는 악의라는 것이 존재한다. 이로 인해 타인이ㅡ 사소한 고민거리에 전혀 공감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것을 비웃을 수도 있다.

그런데 고통의 정도가 매우 심하다면, 이는 반대로 강력하고 진지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스미스는 사람들이 허구라는 것을 알면서도 비극에 눈물 흘리는 이유가 여기 있다고 했다. 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처럼 훌륭한 예술작품은, 인간이 비극에 대해 갖는 타고난 공감을 잘 활용하곤 한다. 

기쁨과 슬픔의 벽

스미스가 알려준 인간 내면의 첫 번째 불균형을 이해했는가? 사람들은 기쁨이 작을수록, 슬픔이 클수록 더 쉽게, 더 빨리 공감한다. 그러나 복잡하게도 사람이란 슬픔보다는 기쁨에 공감하길 좋아한다. 결혼식에서 느끼는 기쁨과 즐거움을 생각해보라. 장례식에서 느끼는 슬픔보다 감정의 강도가 훨씬 더 크지 않은가. 스미스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장례식에서 느끼는 슬픔에 대해 ‘엄숙한 척하는 수준에 불과하다’고 말했을 정도다. 그러나 결혼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잠깐 동안이지만 당사자만큼 기뻐하며 그 자리를 즐긴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친구를 진심으로 축하할 때, 그의 기쁨은 문자 그대로 우리의 기쁨이 된다. 아무리 인간이 천성적으로 진심을 다해 상대를 축하하지 않는다 해도, 우리가 친구를 축하하는 그 순간만큼은 우리도 친구 못지않게 행복하다. 반대로 고통을 당한 친구를 위로할 때, 우리는 친구가 느끼는 슬픔에 비하면 턱없이 얕은 슬픔밖에 못 느낀다.

사람들은 친구의 슬픔에 전적으로 공감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상심한다. 때문에 이를 인위적으로라도 만들려고 애쓴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이 일시적으로 생겼다가 사라져버리는 특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미스는 그 정도면 딱 알맞은 정도의 관심이라고 결론 내렸다. 만약에 관심이 과하다면, 살면서 마주할 수없이 많은 슬픔들을 어떻게 감당하면서 살겠는가. 그러니 그저 친구를 위로해줄 수 있을 정도의 공감이면 충분하다. 

이렇듯 기쁨과 슬픔에 대한 인간의 선호도는 첨예하게 다르다. 이는 돈 많고 유명한 사람들이 가난하고 평범한 사람들보다 더 많은 관심과 환호를 받는 이유와 일맥상통한다. 우리가 그런 사람들의 성공 스토리를 즐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반면 가난하고 평범한 사람들의 스토리에 대해서는 얘기를 듣는 동안 잠시 안타까운 감정이 들긴 하지만, 그 감정은 오래가지도 않고 그 깊이도 얕다. 스미스는 이 때문에 부유한 사람들이 자기 재산을 과시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의 결핍을 숨긴다고 말했다. 

슴픔보다 기쁨에 더 많이 공감하는 인간의 성향때문에, 우리는 부를 과시하고 가난을 감춘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고통스러운 우리 모습이 드러나는 것은 매우 치욕스러운 일이다. 가난한 우리의 처지가 만천하에 드러났음에도, 우리가 겪는 고통의 반만큼도 연민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크나큰 비애다. 인간의 이런 본능 때문에 우리는 부를 추구하고 가난을 피하는 것이다. 

만일 내가 크게 성공했다면 크게 성공한다면, 실패한 사람 앞에서 나의 성공을 떠벌릴 수 있을까? 만일 그랬다간, 상대방은 나의 성공에 진심으로 기뻐하지 못할 것이다. 누군가가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면, 나는 타인에 대한 타고난 무관심을 극복하고 상대의 슬픔에 온전히 마음을 쓸 것인가? 만일 내가 힘든 상황에 처해 있다면, 나의 고통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에게 내 슬픔을 한껏 쏟아내겠는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스미스의 가르침을 관계의 적절성에 어떻게 활용할까? 그는 친한 친구들, 그냥 아는 사람들, 그리고 모르는 사람들을 구분하여 이에 맞는 적절한 감정적 교류를 하라고 조언한다. 적절하게 행동한다는 것은 주위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능력이다. 상대는 내 기대에 맞게 행동한다. 나 역시 상대의 기대에 맞게 행동함으로써 상대의 신뢰를 얻는다. 그렇게 주고받은 신뢰를 바탕으로 적절한 반응을 보이면서 감정을 공유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사랑스러움의 시작이고, 이상적 관계의 출발점이다. 

적절한 행동에 대한 스미스의 생각은 신사의 기준에 속한다. 그러나 적절성만으로 사람들이 존경이나 축하를 받지는 않는다. 사람들의 존경과 축하를 받으려면, 미덕이 필요하다. 

7장 끌리는 사람들의 공통점

스미스는 사랑받는 사람이 되기 위한 방법으로 미덕을 갖춘 삶을 권했다. 미덕에서 강조한 세가지는 신중, 정의, 선행이다. 이를 갖춘 인간은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어 주위 사람들에게 존경과 칭찬을 받게 된다. 즉, 이 세가지는 사랑받는 사람이 되기 위한 자격요건인 셈이다. 

신중 = 자기를 돌본다.
정의 =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선행 = 다른 사람을 선한 마음으로 대한다.

‘신중한’은 무모하지 않게 행동한다는 뜻이지만., 스미스가 생각하는 신중함은 건강과 돈, 평판 등 인생과 연결된 모든 것들을 현명하고 진지하게 보살핀다는 의미다. 따라서 신중한 사람은 활동적이며 자신을 꾸준히 관리한다. 또한 열심히 일하고 빚을 지지 않으며 벼락부자와 같은 허황됨을 멀리 한다. 즉, 한탕주의를 경계하고 성실하게 일해 조금씩 나아지는 삶을 살고자 한다. 그렇다면 신중한 사람은 자신의 평판을 어떻게 관리할까? 

스미스에 따르면, 신중한 사람은 진실하고 정직하다. 본인이 잘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해도 나서서 말하지 않는다. 논의 중에 언제나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좋은 친구지만 사람들을 대할 때 과장된 행동은 삼간다. 그에게 우정이란, 신중하게 고른 몇몇 친구들에게  충실한 믿음을 주는 것이다. 그는 결코 무례하게 구는 적이 없으며,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는 내일의 더 큰 편안함과 즐거움을 위해 오늘의 안락을 기꺼이 희생할 만큼 절제심이 있다. 그는 또한 남의 일에 끼어들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조국의 부름을 받으면 열심히 봉사는 하겠지만 공직생활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기꺼이 남에게 맡기고자 한다. 성공에 대한 야심 이면에 숨겨진 공허함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훌륭하고 관대하게 행동함으로써 얻는 영광 역시 굳이 바라지 않으며, 그저 방해받지 않고 평온함을 즐길 수 있는 삶을 살기를 바랄 뿐이다. 스미스가 개인주의를 찬양하는 것처럼 느낄 수도 있겠지만, 스미스는 공적으로 현명하고 분별 있는 행동도 높이 평가했따. 신중함을 지닌 장군, 국회의원, 정치가는 신중이라는 미덕을 용기나 자애, 정의 같은 다른 미덕들과 조화롭게 결합시키는 사람이라고 봤다.  

스스로 삶의 품격을 높이는 법

그렇게 다른 미덕들과 결합된 신중은 도덕적으로 가장 완벽한 상태라 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가장 완벽한 미덕과 가장 완벽한 지혜가 결합한 상태가 바로 신중이다. 

신중한 사람은 언제나 진지하고 열심히 연구한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분야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지식을 매개로 다른 사람을 잘 이해시키기 위해서다. 때문에 비록 그의 재능이 늘 훌륭한 것은 아닐지라도 언제나 진실한 것만은 틀림없다.

신중한 사람은 진실하다. 그는 자신의 재주와 성공에 대해 늘 겸손하다. 이를 간단하게 표현하면 ‘적게 말하고 많이 행동하라.’일 것이다. 

신중한 사람은 교활한 사기꾼의 교묘한 계략으로 당신을 속이려고 하지 않는다. 또한 오만한 현학자의 건방진 태도로, 혹은 천박하고 경솔하게 자기 주장만 내세우는 사람처럼 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떠벌리지도 않는다. 그의 대화는 늘 간결하고 겸손하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대중의 관심과 명성을 얻기 위해 자주 이용하는 엉터리 홍보 기술들을 끔찍이 싫어한다. 

무분별한 자기 홍보는 품위를 떨어드린다. 사람들은 때로 단지 사람들의 관심을 얻기 위해 트위터, 페이스북, 블로그 등 SNS와 인터넷 같이 다양한 홍보 기술을 무차별적이고 무분별하게 활용한다. 점점 품위가 떨어지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품위를 유지할 것인가? 현대인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관심 받기 좋아하고 자신을 알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사람들 앞에 나서기 좋아하는 자신의 성격을 그대로 인정하라. 대신 자신에 대해 신중하고 품위 있는 방식으로 말하면 된다. 어떻게 하면 될까? 거짓말을 하거나 부풀려 말하지 말 것. 자신의 성과물이나 능력을 과장하지 말 것. 

관심을 끌고자 상대를 괴롭힌다면, 반대로 영영 상대의 관심에서 벗어날 수 있다. 만일 내가 누군가를 이메일로 괴롭힌다면, 그들은 나를 아예 끄집어내버릴 것이다. 내 메일을 ‘스팸메일 폴더’로 밀쳐놓으면 그걸로 그냥 끝이니까. 그러니 자기 홍보 기회를 악착같이 이용하기보다 이를 일부러라도 피해볼 것을 권한다. 그러면 오히려 자기 홍보가 오히려 더 잘 될지도 모른다. 물론 기회를 놓치면 바보가 된 기분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저렴해 보이는 야바위꾼보다 바보가 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스미스가 높이 평가하는 신중한 사람이 다소 재미없고 고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컨대 신중한 사람은 삶에 대한 품위를 잃지 않는다.

생활에서 실천하는 정의의 원칙

두 번째 미덕인 정의는, 타인에게 피해 혹은 상처를 주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는 나쁜 짓을 하지 않는 미덕, 즉 소극적인 미덕을 말한다. 내가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을 타인에게 하지 말라는 얘기다. 스미스는 정의에 대해 얘기하면서 공정한 관찰자의 시각을 언급했다. 

단순히 내 행복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만으로 남의 행복에 행복을 해친다면, 절대로 공정한 관찰자의 지지를 얻을 수 없다. 나에게 유용하다는 이유만으로 남에게서 정말 유용한 것을 빼앗는 것도 마찬가지다. 물론 남을 희생시켜가면서까지 자신의 행복을 중요시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러나 이런 본성에만 몰두하는 사람은 공정한 관찰자의 공감을 절대 얻지 못한다.

또 사람들이 타인보다 자신에 대해 더 많이 신경을 쓰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남을 해치며 사는 것은 공정한 관찰자가 결코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했다. 

모든 사람이 타인보다 자기 자신을 좋아하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다른 사람을 향해 ‘나는 당신보다 나 자신을 더 좋아한다’고 과감하게 말하는 건 곤란하다. 비록 이것이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는 말이라 해도 말이다. 그런 말을 대놓고 하는 건 타인의 눈에 터무니없어 보인다는 사실을 우리 역시 잘 알고 있다. 

공정한 관찰자의 시선을 의식한 인간은 오만한 자기애를 꺾는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공감할 수준으로 자기애를 끌어내린다. 스미스는 또 인생이라는 게임에서의 공정한 플레이란 무엇인지를 밝힌다.

사람들은 부와 영예, 그리고 높은 지위를 얻기 위한 경주에서 이기기 위해 있는 힘껏 달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누군가가 경쟁자들 중 한사람을 밀치거나 넘어뜨린다면,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일제히 분노할 것이다. 시합의 규칙을 위반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남에게 피해를 끼친 사람의 자기애는 고려하지 않는다. 

자기애에 빠진 사람들은 남보다 앞서기 위해 비열하게 행동할 수 있다. 그러나 공정한 관찰자의 눈을 통해 자기 자신을 보면, 그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정의의 원칙은 비교적 흑백이 분명하다. 누군가에게 10달러를 빚졌으면, 돈을 갚기로 합의한 시점에 10달러를 갚아야 한다.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일에 관하여서는 복잡하거나 애매할 일이 없다. 

스미스는 정의의 원칙이 다소 유연하게 적용될 수 있는 상황이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정의를 그런식으로 접근하면 언젠가 파국을 맞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인간은 확고부동하게 정의의 원칙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수록 더욱 칭찬받고 신뢰받는 사람, 즉 사랑스러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특별한 상황에서는 정의의 원칙을 무시할 수도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 돼버린다. 나아가 예외를 두기 시작하면 비열한 짓도 서슴치 않게 된다. 

부잣집에서 물건을 훔치는 도둑은, 주인이 그 물건을 도둑맞았는지 모를 것이므로 자신이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친구의 아내와 간통을 저지르려는 남자도 마찬가지다. 친구가 의심하지 않고 그의 가정이 평화롭게 유지된다면, 나쁜 짓을 하지 않은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단 이런 미묘한 상황들에 굴복하기 시작하면, 그 어떤 흉악한 범죄 행위도 거리낄 게 없어진다.

살다보면 주체 못 할 욕망과 평소 옳다고 생각하는 신념이 충돌할 때가 있다. 이때는 세상의 규범과 도덕의 원칙이 공정한 관찰자의 목소리를 지지하는 역할을 한다. 이 원칙이 깨지는 순간, 인간은 자기기만과 자기 합리화에 빠진다. 인간은 다소 헐렁한 규칙보다 매우 엄격한 규칙을 오히려 쉽게 지킨다. 그러므로 정의의 원칙을 지킬 때는 아주 엄격하고 정확하게 지켜야 한다. 정의의 원칙들을 아주 정확하게 지킬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 삶에서도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 

무엇이 과연 진정한 선행인가

세 번째 미덕인 선행은 쉽게 말해 좋은 일을 한다는 의미다. 나쁜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쉽고 간단하다. 하지만 좋은 일을 한다는 것은, 무엇이든 행동을 취해야 한다. 좋은 일이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선행의 원칙들은 정의의 원칙처럼 '맞다, 아니다' 이분법적으로 간단히 분류할 수 없다. 스미스는 '감사하는 마음'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누군가가 큰 조건없이 1,000달러를 빌려준다면,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가 힘들어할 때 반대로 내가 그에게 돈을 빌려줘야 할 것이다. 이때는 그에게 똑같이 1,000달러를 빌려줘야 할까? 이 돈은 언제 빌려줘야 할까? 서로 상황이 다른다면 때론 수치는 큰 의미가 없다. 내가 상대에게 빌린 돈의 10배를 준다 해도, 때론 그것이 감사하는 마음의 100분 1도 안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에 따라 1,000달러를 빌리고 단 1달러를 갚더라도 감사한 마음이 충분할 수도 있고, 10,000달러로 갚아도 감사한 마음이 전혀 없을 수도 있다. 이처럼 감사하는 마음은 그 원칙이나 의미가 다소 모소한다. 스미스는 더욱이 우정, 인간애, 환대, 관대함의 원칙은 더욱 애매모호하고 정확히 규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거의 모든 미덕의 원칙들, 즉 신중, 자선, 관대, 감사, 우정이란 무엇인지 규정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이 원칙에 대해서는 예외의 경우가 많고, 수정이 필요한 경우도 대단히 많다. 때문에 이들을 온전히 지키면서 행동을 조절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렇듯 선행의 원칙들에있어 애매한 부분이 많기 때문에, 선하게 사는 일이 힘들 수 밖에 없다. 아주 정학하게 지킬 수 있는 선행의 원칙들이 없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아주 이기적인 일을 하고도 자신이 이타적인 인간이라고 착각하기가 쉽다. 내 도움을 필요로 하거나 대화하고 싶어하는 아들을 내버려 둔 채, 가끔 축구 경기에서 눈을 떼지 못할 때가 있다. 이때 나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내 이기적인 행동을 합리화시킬 수 있다. 첫째, 나에게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강조한다. '가끔은 축구 경기를 보며 쉬어야 다음날 일하는 데도 지장이 없고 또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둘째, 내가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잘 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속일 수도 있다. 실제로는 아들의 얘기를 잘 듣지도 못했으면서, 축구 경기를 보면서도 아들 얘기에 귀 기울였다고 생각해버리는 것이다. 셋째, 아이가 원하는 족족 관심을 기울일 수는 없다고 자기 합리화 해버릴 수 있다. 언제 아들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지 원칙을 까다롭게 선택한다. 그리고 아들이 그날 있었던 일과 같은 사소한 얘기를 할 때는 축구 경기를 봐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관심을 기울여야 할 타이밍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행의 원칙들은 때로 많은 희생과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키기 어렵다. 또한 상대를 돕는 것에만 너무 관심을 기울여도 되레 상대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다. 아이의 숙제를 도와주는 것이 좋을까? 혼자 하도록 놔두는 것이 자립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 아닐까? 어떤 것이 상대에게 더 이로운지 상황에 따라 기준은 달라진다.

스미스는 선행을 실천할 때는 모호한 원칙이라도 있어야 그나마 지키기가 덜 어렵다고 말한다. 그 원칙들이 보편적이지 않고 나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독특한 원칙이어도 상관없다. ‘아이가 도움을 원하면 발 벗고 돕는다’는 원칙을 지난 사람이 있다고 하자. 아이가 혼자 수학 문제를 도저히 못 푸는데도 축구 경기에 빠져 있는 모습을 공정한 관찰자가 바라본다면 과연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그는 자기의 원칙을 어겼음을 알고 창피해 할 것이다. 이처럼 선행의 원칙들이 존재할 때 우리는 자기중심적인 성향을 스스로 경계하면서 선행에 한걸음 다다갈 수 있다. 

8장 불확실한 세상을 잘 살아가려면

세 가지 미덕을 갖춘 이상적인 모습을 갖추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보다 더 큰 뜻을 이루고 싶어한다. 단순히 착한 사람이 되려는 게 아니라 친구나 가족, 동료를 넘어선 선행을 베풀려고 한다. 즉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꾸고 싶어 한다. 왜 그럴까? 사랑받고 싶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 때문이다. 개인의 범주를 넘어선 곳까지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존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히 이것 때문만은 아니다. 인간은 이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드는 데 일조하여 스스로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고자 한다. 당당하게 사랑받고 싶기 때문이다.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정해져 있지 않다. 물론 각자가 선택한 행동을 세상은 더 좋은 곳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세상이 얼마만큼 바뀌느냐는 전적으로 개인의 재능과 열정, 그리고 각자에게 부여된 기회에 달려 있다. 내가 선택한 방법이 세상을 더 좋게 만들지, 내 좋은 의도와 다르게 도리어 위험한 결과를 가져올지 알 수 없다. 어쩌면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드는 최고의 방법은 그저 최고의 남편, 최고의 엄마, 최고의 이웃이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직업을 단순히 돈을 버는 수단으로 여기고, 이기적인 부분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자선 단체에 기부하거나 자원 봉사를 하는 행동만이 이타적이라고 오해한다. 하지만 자기 일을 잘 해내는 것 역시 남에게 도움이 되고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한다. 훌륭한 선생님은 학생들의 인생을 바꾸고, 훌륭한 상사는 직원들을 성장시킨다. 훌륭한 식당 주인은 손님들에게 음식 뿐 아니라 손님들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며 우정과 추억을 공유할 소중한 기회를 제공한다. 자신의 일이 타인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보다 더 큰 도움을 주고 싶어 한다. 직접적인 이익이나 대가, 보상을 바라지 않고 타인에게 도움을 주려는 것이다. 

세상의 질서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인생의 많은 부분들은 질서 정연하다. 그러나 어느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는다. 스미스는 사회의 모든 현상이 인간의 복잡한 상호관계의 의해 자연스럽게 생겨난 결과물이라고 생각했다. 

하이에크는 복잡한 인간의 상호관계에서 생기는 질서를 주제로 한 글에서 ‘자생적 질서’라는 표현을 자주 썼다. 여기서 ‘자생적’이라는 말은 미리 계획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 말은 자발적으로 라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때문에 나는 ‘창발적 질서’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창발적 질서에 해당하는 것들이 결정될 때는 일반적인 결정과정과 사뭇 다르다. 그것은 사람들이 계획한 것이 아니라 그저 자연스럽게 굳어져 결정된 것이다. 이런 창발적 질서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개인들은 작게나마 어떤 역할을 한다.

미국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은 수요와 공급 문제를 다루면서, 무시해도 될 정도의 미미함들이 모이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고 말했다. 사과에 대한 한 사람의 수요는 사과 가격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반면, 개인이 모인 사람들 전체의 수요는 사과 가격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우리 모두의 상호관계가 사과 가격을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스미스는 도덕적인 세상을 만드는 데 있어 우리 각자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봤다. 사람들은 사회적 통념이 허용하는 행동이 무엇인지 대체로 잘 알고 있다. 무엇이 상식적인 행동인지 안다. 이런 사회적 상호관계에 대한 원칙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바로 우리 스스로가 결정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방법으로 도덕의 기초를 결정한다.  신뢰, 공감, 존경, 무시, 거부, 친절, 잔인함 등 관계의 기초가 되는 모든 규범들이 이러한 창발적 질서를 이루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다. 

세상을 더 좋게 만들려고 일부러 계획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극소수다. 그러나 우리들의 평소 행동 속에는 세상을 더 좋게 만들려는 의도가 이미 담겨 있다. 우리는 사랑받고 싶어 하고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기를 원한다. 사람들이 내가 하는 일에 동의해줄 때 기뻐하고 반대일 때 실망한다. 이는 우리 안에 박혀 있는 본성이다. 이런 본성을 바탕으로 우리는 어떤 행동이 고결하고 고상하며 친절한지 스스로 자연스럽게 결정을 내린다. 

또 하나의 '보이지 않는 손'

우리에겐 도둑질이나 살인 같은 극악의 범죄를 금지하는 법체계가 있다. 그러나 이보다 강력한 힘, 우리에겐 양심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양심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도를 밟게 만든다. 잔인하고 이기적인 행동은, 교도소행이나 벌금형을 무릅쓰는 것이 아니라, 친구나 가족, 동료와 지인들의 비난을 무릅쓰는 짓이다. 이는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려는 스스로의 욕구를 반하고, 공정한 관찰자의 비난을 무릅쓰는 짓이다. 

스미스는 그렇기 때문에 양심에 기반을 둔 선택이 중요하다고 얘기했다. 매순간 말과 행동에 대한 선택을 대충한다면, 사랑스러움으로부터 한 걸음씩 멀어지게 된다. 그럴 때마다 좋은 세상을 만드는 길에서도 한 걸음 멀어지게 된다. 

나 혼자 그런다면 괜찮다고? 각자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되겠는가.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스미스와 동시대를 살았다. 칸트의 개인 도덕의 원칙은 정언 명령(행위 자체가 선이므로 이유를 막론하고 행해야 하는 원칙)으로 설명된다. 정언 명령에 따르면,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지 결정을 내리거나 도덕적 딜레마에 직면했을 때, ‘나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이렇게 행동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라고 확대해 생각해야 한다. 

경제학자들은 투표가 비합리적인 행위라고 지적하길 좋아한다. 순전히 경제학적 비용편익분석으로 투표라는 행위를 보면 나의 한표가 선거 결과에 도움이 안되는 게 맞다. 그러나 민주주의에 대한 의미 있는 개인의 행동을 지지하는 한, 칸트의 정언 명령은 투표하지 않는 것이 비도덕적이라고 강조한다. 아무리 사소한 행동이라도 타인의 행동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러므로 스스로의 행동에 조심하면서 항상 바르게 살아야 한다. 

인간이 가진 가장 위대한 장점

인간의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이자 위대한 장점은 신뢰다. 자신의 믿음이 악용될 거란 두려움이 없다면, 다시 말해 타인을 전적으로 믿게 된다면, 모두의 인생은 더 아름다워질 것이다. 또한 돈과 관련된 경제생활도 훨씬 편해질 것이다. 신뢰는 무수히 많고 자잘한 사람 관계들이 모여 만들어진다. 신뢰에 더 많이 의존하고 법에 덜 의존할수록, 사회를 움직이는 시스템은 더 잘 작동한다. 타인에 대한 믿음을 입증하느라 많은 시간과 돈, 에너지를 들일 필요가 없어진다면, 세상은 정말 훨씬 더 살기 편할 것이다.

선행은 그 자체가 보상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스미스는 그 이상이라고 말했다. 신뢰와 정직이라는 품위 있는 문화를 유지하고 확대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착한 일을 하고 이를 계속하려고 노력할 때마다 우리는 선행이라는 씨앗을 널리 퍼트리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착한 행동이 더 많은 사람들이 연쇄적으로 착해지도록 선순환 구조를 만든다. 

우리가 빠지기 쉬운 또 다른 유혹이 있다. 세상에 대해 비관적인 태도를 갖는 것이다. 세상은 어차피 형편없는 곳이니, 한 번 친절하게 행동한다고 해서 달라질 게 없다고 치부해버리는 것이다.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다른 사람들은 죄다 잊어버리는 게 더 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나쁜 행동을 하면, 그 영향은 결국 자신에게 돌아간다. 스미스는 이를 한 사람이 사랑스러움에서 한 걸음 멀어지면, 다른 사람들도 점점 사랑스러움에서 멀어진다고 설명했다. 그런 식으로 모두가 조금씩 멀어진다면, 결국에 이 사회에는 사랑스러운 사람이 한 명도 없게 된다. 

세상을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다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존경하자. 좋은 친구가 되어주고 주위에 훌륭한 친구들을 두자. 남의 험담을 퍼뜨리지 말고 남의 감정을 해칠 수 있는 교묘한 농담은 단호하게 거부하자. 친구가 다른 사람을 놀림감으로 삼아 농담을 던지면 웃지 않으려고 노력하자. 그리고 훌륭한 모범을 보이자. 

나 혼자서는 아주 작은 변화만을 일으킬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면, 세상에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9장 살기 좋은 사회가 만들어지는 과정

스미스는 우리가 주의 사람들의 행동에 동의하거나 반대하는 의견을 기초로 이 사회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사람들의 작은 행동은 주위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 영향의 잔물결은 끊임없이 밖으로 퍼져 나간다. 

썰물 때 해안가로 밀려 온 불가사리를 발견한 소녀가 다시 바다로 불가사리를 던졌다. 하지만 불가사리 수천 마리가 해안가로 다시 밀려오는 것을 본 행인이 소녀에게 물었다. 
‘네가 불가사리 하나를 바다로 던져서 뭘 바꿀 수 있겠니?"
그러나 소녀는 또 다른 불가사리를 바다로 던지면서 대답했다.
“적어도 저 불가사리한테는 변화가 생겼잖아요."

우리의 선한행동도 마찬가지다. 그 행동으로 인해 작지만 분명 어떤 변화가 일어난다. 이 작은 변화는 나와 연결된 사람들과의 피드백 고리를 통해 점점 널리 퍼지면서 그 힘을 키운다. 그래서 결국 사회와 세상을 바꾸어놓게 된다. 

모두가 기억해야 할 ‘체스판의 오류'

스미스가 가장 경멸한 사람은 ‘시스템에 갇힌 사람’이었다. 시스템에 갇힌 사람이란, 특정 설계나 비전에 따라 사회를 다시 세우려 하는 지도자를 뜻한다. 그런 사람들은 이상적인 사회를 그리기 위한 비전에 너무 빠진 나머지, 그것이 이상적 상태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못한다. 시스템에 갇힌 사람들은 체스판의 말을 움직이듯 사람들도 쉽게 움직일 수 있다고 착각한다. 그러면서 정작 본인은 체스의 규칙을 무시해버리곤 한다. 이들은 인간 역시 개조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사회를 임의로 개조하려고 한다. 

시스템에 갇힌 사람은 이 거대한 사회의 구성원들을 자기 멋대로 쉽게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치 체스판의 말들을 손으로 배열하는 것처럼 말이다. 체스판의 말들은 오직 사람의 손에 의해서만 움직인다. 그러나 인간 사회라는 거대한 체스판에서는 모든 말 하나하나가 자율성을 갖고 있다. 즉 입법 기관이라는 외부적 힘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율성과 외부적 힘, 그 두 가지가 서로 일치하고 같은 방향으로 작용한다면, 인간 사회라는 게임은 편안하고 조화롭게 진행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 두 가지가 서로 반대되거나 다르다면, 인간 사회는 최악의 무질서 상태에 처할 것이다.

인복잡한 이 세상에서 사람들의 행동을 법률로 제정하는 사람이라면 인간이 태생적으로 각자 특정한 욕구와 꿈이 있음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인간은 각자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어 한다. 그런 성향은 아주 어릴 때부터 시작된다. 아이들은 모든 게 자기 뜻대로 되길 원하고 그러지 않을 때는 울음을 터뜨린다. 인간의 이러한 욕구에 맞지 않는 법을 만드는 행위, 즉 임의로 체스판의 말을 움직이며 법을 만드는 행위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그리고 결국 이 사회를 최악의 무질서 상태로 만들 것이다.

스미스는 거대한 체스판과도 같은 사회에 영향을 미치려면 인간의 행동을 제어하는 강제적인 방법 말고 다른 방법을 이용하는 것이 가끔은 더 효과적이라고 했다. 

태생적인 치유의 힘이란

미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흡연을 법적으로 금지하려고 애써왔지만 아직까지 성공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미국의 1인당 담배 소비량은 20세기 후반 들어 50퍼센트나 감소했다. 담배 소비량의 감소는 무엇보다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일으킨 문화적인 현상에서 그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담배는 더 이상 멋있거나 진보적인 행동을 상징하지 않는다. 담배가 건강에 악영향을 끼치는 의학적 증거가 축적되고 사람들이 그 증거에 반응을 보임에 따라, 어느 순간부터 위험한 습관이라고 생각하는 문화적 규범이 탄생한 것이다. 때로는 간섭하지 않고 그냥 놔두는 것이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드는 최고의 방법이다.  

육아에서도 비슷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두 가지 모순되는 욕구가 있다. 첫 번째 욕구는 사람들은 누구나 간섭받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이를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욕구는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시키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욕구는 서로 충돌한다. 

부모들이 두 번째 욕구에 따라 아이들에게 자신의 뜻을 강요하다보면, 첫 번째 욕구를 망각하기 일쑤다. 그래서 악기를 배우고 싶은 사람은 정작 본인데도, 아이에게 억지로 피아노 레슨을 받게 한다. 내 아이 혹은 다른 사람들을 다그쳐서 바람직하다고 믿는 일을 시키는 것은 의도했던 것보다 훨씬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아이들에게 흡연의 나쁜 점에 대해 엄청난 잔소리를 늘어놓으면, 아이들은 단지 부모의 뜻을 거역하는 스릴을 맛보기 위해 일부러 담배를 피울 수도 있다. 

세상은 복잡한 곳이다. 시스템을 바꾸기 위해 억지로 애쓰지 말라. 내가 손잡이를 힘껏 돌린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문이 열리는 것은 아니다. 

무엇이든 자기 원칙에 따를 권리

법이나 정책이 항상 의도한 결과를 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법이 문제를 악화시키는 경우도 있다. 스미스는 지도자나 정치인들 역시 일반 사람들만큼이나 자기기만에 빠지기 쉽다고 경계했다.

지도자들도 처음에는 긍정적인 세력을 확장할 의도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들 중 대다수가 자기 궤변에 속아 넘어가게 된다. 또한 자신들이 내건 장대한 개혁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혀 이를 열렬히 갈망하게 된다. 그들을 추종하는 나약하고 어리석은 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몽상가는 위험한 인물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일상생활에서 행하는 사소한 일들이 오히려 우리가 열렬히 지지하는 정치 운동보다 때로는 더 큰 영향을 미친다. 바르고 충실하게 사는 하루를 무시하는 사람이 과연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을까? 법을 만들거나 정책을 세우는 정부도 좋은 나쁘든 우리 인생에 영향을 미치지만, 우리에겐 그 외에도 할 일이 많다.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은가? 그럼 자세를 낮춰 아이와 대화해보자. 이메일을 확인하지 말고 배우자와 기분 좋게 데이트를 즐기자. 자극적인 뉴스를 보고 논쟁하는 대신 훌륭한 고전을 더 많이 읽자. 모르는 사람에게도 따뜻한 미소를 지어보자. 그리고 부모님께 효도하자. 이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인생에서 큰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행동들이야말로 진실로 훌륭한 인생을 만드는 재료이다.

우리는 체스판의 말들을 마음대로 옮길 수 있다고 착각한다. 또한 나 자신에게 무엇이 가장 좋은지 스스로 잘 안다고 착각한다. 설사 자신과 타인에게 무엇이 가장 좋은지 잘 알고 있어도, 가끔은 그냥 내버려두라. 그것이 때로 가장 좋을 수 있다.

10장 현재의 우리를 위한 애덤 스미스의 따뜻한 조언

스미스는 어더헥 해서 <도덕감정론>을 쓰게 되었을까? 이기심의 힘을 제대로 알고 있었고 자유방임주의의 지적 토대를 마련했으며 부와 물질주의, 생활과 경제를 다룬 <국부론>의 저자가 어떻게 <도덕감정론> 같은 책을 쓸 수 있었을까?
<국부론>에는 이타주의나 친절, 동정심, 평정심, 사랑스러움을 다룬 내용은 거의 없다. 그는 <국부론>을 쓰기 전에 <도덕감정론>을 썼고, <국부론>이 출간된 뒤에 <도덕감정론>을 여러 번 고쳐 썼다. 그가 <국부론>을 쓰고 있을 때에도 그의 머릿속에는 <도덕감정론>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을까?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어떻게 그토록 달라 보이는 두 권의 책을 쓰게 되었을까? 이에 대한 답을 생각하다보면, 스미스에 대한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스미스가 두 권의 책에서 취했떤 각 관점은 현재를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무언가 유용한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의 차이

원시 시대에는 가까운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생사를 가늠하는 요인이었다. 때문에 사람들 간의 신뢰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서로 나누지 않고 돕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또한 집단의 규모가 작았고, 똑같은 사람을 거의 한평생 매일매일 만났다. 그렇게 익숙하고 반복적인 교류 덕에 잔인하거나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을 처벌하기가 쉬웠다. 

반면, 현대 사회에서의 행활은 매우 다르다.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지적했듯이, 분업을 용이하게 하는 각자의 전문성을 통해 인류는 단순한 생존 문제를 넘어 번영을 이루어왔다. 난방, 전기, 교통, 통신 등 소위 문명이라는 것이 존재하려면, 만날 수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과 매일 관계를 맺어야 한다. 

<도덕감정론>은 자신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들, 즉 가족이나 친구, 가까운 이웃처럼 우리가 적극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다룬 책이다. 가까운 관계 속에서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우기가 그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 다루고 있다. 그에 반해 <국부론>은 스미스는 모르는 사람들과의 교환이 이루어지는 세상에서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거래를 염두할 때는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이기적이라고 보는 것이 최선이다. 그래서 그는 <국부론>에서 인간의 이기적인 측면을 강조했던 것이다.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관계들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은 단지 초점이 다를 뿐이다. 가까운 사람간의 관계를 다룬 <도덕감정론>과 상품의 생산과 교역을 다룬 <국부론>에 나타난 사람들의 행동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이 두 책에서 말하는 영역은 삶에서 서로 다른 범위에 있다. 이렇듯 별개의 책에서 별개의 영역을 다룬 스미스의 선견지명 덕분에, 우리는 인생에서 우리가 어떤 일을 겪게 되고 그때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깨달을 수 있다. 

사랑하는 배우자와 자녀들, 그들과 만들어가는 세계는 따뜻하다. 반면 손익 계산에 따라 협력이 이루어지는 이해타산적인 세계는 차갑기 그지없다. 우리 삶에는 이렇게 두 개의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두 세계의 차이를 받아들일 준비를 미리 하지 않는다.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동시에 두 세계에서 살아야 한다. 사람들은 사회생활을 가족생활처럼 만들고 싶어한다. 하지만 하이에크는 바로 여기에서 독재가 탄생한다고 경고했다. 

인간은 유력한 지도자들을 우러러보고 존경하며, 자신의 운명을 맡기고자 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그리고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나면서부터 부모 같은 존재와 안전을 갈망한다. 문제는 히틀러나 스탈린 같은 사람들이 절대 우리의 부모가 될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런 사람들은 우리를 자식처럼 사랑해주지 못한다. 오히려 우리의 그런 열망을 악용한다. 스미스와 하이에크는 바로 이 점을 경고했다. 정치적 유력자를 향한 우리의 열망이 얼마나 위험한지 말이다. 

인생이 주는 혜택을 제대로 누리려면

현대 경제의 기초가 되는 전문화와 교환에 대해 비인간적이라고 적개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실제 전문화와 교환이 갖는 의미는 단순히 경제를 탄생시킨 것 이상이다. 18세기 중엽, 스미스는 산업혁명이 막 시작한 단계에서 <국부론>을 쓰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 조차 전문화와 교환을 과소평가한 듯 보인다. 전문화와 교환이 우리 삶을 얼마나 획기적으로 바꾸어놓을지 몰랐기 때문이다. 

경제가 우리 삶에 선사하는 갖가지 혜택을 계속 누리려면, 우리는 모든 상품의 거래 시스템이 모르는 사람들과의 거래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전문화의 세계에서는 얼굴을 못 볼 만큼 머나먼 거리의 사람들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밖에 없다. 나는 심장판막, 자동차, 혹은 아이폰을 만드는 기업의 CEO를 사랑할 필요가 없다. 그 기업의 CEO 역시 나를 사랑할 필요가 없다. 인간적 교류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기업의 CEO들은 분명 내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준다. 사랑과 따뜻한 관계는 가까운데서 찾으면 된다. 우리 곁에는 늘 소중한 사람이 존재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