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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Ⅰ/언론보도

[성대신문] 눈이 아닌 손으로 읽는 필사의 세계 - 책읽는지하철 홍대필사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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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껴 쓴다’는 뜻의 필사(筆寫)는 인류 문명의 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디지털과 속도문화로 대변되는 현대문명에서도 필사는 여러 형태로 나타나고 있으며 서점에서 필사책(라이팅북)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시중에 나와 있는 필사 관련 책은 명언이나 글귀, 시부터『어린 왕자』, 『데미안』 등의 명작까지 매우 다양하다. 지난해 6월, 김용택 시인이 엄선한 111편의 시를 감상하고 필사할 수 있는 『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가져갈지도 몰라』가 베스트셀러에 올라 필사본 열풍을 증명하기도 했다. 이처럼 필사는 디지털 기기의 자판으로 글을 ‘치는’ 것에 익숙한 디지털 세대에게, 필기구로 글을 ‘쓰는’ 것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켜 점차 확산되고 있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필사책은 여성 고객의 구매 비중이 높고 20대가 가장 큰 독자층이며 그 다음으로 30대, 40대 순이라고 한다.    

필사 문화가 20대, 젊은층에게 인기를 끄는 이유가 무엇일까? 대학내일 부속연구기관 20대연구소에서는 소소한 것에서 재미를 느끼는 20대의 놀이 문화를 ‘소소잼’이라고 하며 2016 S/S 핵심 트렌드 중 하나로 꼽았다. 시간이나 경제적 여유가 부족한 20대는 사소하더라도 자신의 가치를 추구하며 심신을 달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데, 그 중 하나가 시나 좋은 문구를 그대로 옮겨 쓰는 라이팅북이라는 것이다.

주로 글씨 연습이나 공부방법의 일환 또는 작가를 꿈꾸는 사람들의 문장 실력을 높이기 위한 연습과정이었던 필사가 최근 마음의 안정을 취하고 스트레스를 해소시키는 힐링 문화로도 주목받고 있다. 젊은 세대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 필사의 의미 및 효과를 두 가지로 조망해 살펴보고자 한다. 


 

 일러스트 ┃강도희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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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력 향상을 위한 필사  


필사는 글자를 눈으로 보고 입으로 소리 내어 말하기도 하고, 직접 손을 움직여 써보는 등 다양한 감각을 사용한다. 이러한 필사는 글씨를 옮겨 적는 단순한 작업이 아니라 글이 가지고 있는 내용, 문체, 어휘, 구조를 익힐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정교하게 다듬어진 좋은 글을 빠르게 읽고 지나가지 않고 오랫동안 곱씹으며 따라 쓰다 보면, 글의 내용과 작가의 의도를 좀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다. 더 나아가 표현 방식을 익히게 되어 필력 향상까지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작가 지망생들, 유명한 소설가와 시인들도 문장 실력을 높이기 위해 필사를 경험했다. 정호승 시인은 서정주 시인과 김현승 시인의 시를 필사했고 안도현 시인은 백석의 시를 필사했으며, 신경숙 소설가 또한 필사를 하며 소설가의 삶에 눈을 떴다고 밝혔다. 

이러한 필사의 효과를 활용하고 있는 우리 학교 수업이 있다. 정우택(국문) 교수의 ‘현대시의 이해’ 수업에서는 시 한 편당 2번의 예습과 1번의 복습 필사, 감상, 시 창작 과제가 주어진다. 정교수는 “학생들이 대학교에 들어와 시를 자기방식으로 읽는 것에 낯설어하고 어려워하는 것 같다”며 “시를 자기 몸에 맞게 받아들이고 시와 친하게 더불어 살 수 있게 하는 방법으로 필사 과제를 생각했다. 필사를 통해 시를 절실하고 조금 더 깊이 있게 자기 육화하여 읽고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또 그는 자동화·기술화된 세계, 시각이 강화된 세계에서 압축된 시어들을 손으로 쓰고 감각화하는 수공업적인 작업인 필사는 시를 창작할 때 활성화된 감각이 발휘될 수 있게 한다고 전했다.  

수업을 수강한 유승희(국문 15) 학우는 “시에 할애하는 시간이 늘었다. 속으로 읽는 속도와 손으로 쓰는 속도의 차이가 생겨 그 간극에서 오는 생각의 기회 덕에 느끼지 못했던 시어의 의미를 깨닫기도 한다”며 “잠시나마 시인의 마음이 되어볼 수 있는 것 같다. 필사를 하다 보면 몇 번이고 적어두고 싶은 시를 만나게 되는 데 그럴 때마다 직접 시를 창작하고 싶은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페이스북 ‘임의의반경’이라는 페이지를 만들어 자신의 창작시를 게시하는 차민수(국문 11) 학우는 시를 접하는 데 있어 몸소 체험할 수 있는 필사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내가 직접 손으로 종이에 쓰는 육체적인 경험은 하나하나 모두 자극이 되기 때문에 확실히 머릿속에 더 각인이 된다. 기억에 남는 시 구절이 나에게 다가옴으로 인해 나의 존재의미를 찾게 해준다”며 “때로는 필사를 하다가 멋있는 구절이나 마음에 드는 시인의 시를 모방하고, 때로는 새롭게 깨달은 나의 존재의미를 표출하기 위해 직접 시를 써보게 된다”고 전했다. 이처럼 필사는 눈으로 읽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았던 텍스트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가능하게 하며, 남의 글을 읽고 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글을 써내려갈 능력을 길러주기도 한다.


마음 안정을 위한 필사 


최근에는 필사 책, 일명 '라이팅북'이 힐링의 아이템으로 대두되고 있다. 컬러링북, 나노블록의 뒤를 따라 ‘안티 스트레스(Anti-stress)’ 취미활동으로 그 열풍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정신과 의사 캐리 배런은 <Psychology Today>에서 “손을 움직임으로써 스트레스 및 불안, 우울을 해소할 수 있다”며 “반복적인 동작은 안정감을 느낄 수 있게 하며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생각을 돕는다”고 말했다. 이렇게 시공간적 제약 없이 저렴한 비용으로 혼자 즐길 수 있는 취미인 필사는 좋은 글을 읽고 손으로 따라 적어보면서 위안과 마음의 안정을 얻고, 무언가에 집중하고 몰입하게 한다. 

이러한 필사의 효과를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라이팅북이 서점가에서 인기를 끌며 소규모 필사 모임도 많이 생겨나고 있다. 독서캠페인 소셜벤처 ‘책읽는지하철’에서도 홍대필사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홍대필사모임은 평일 저녁 90분 정도 필사 시간을 가지고, 이후 약 30분 동안 자신이 필사한 책을 소개하고 필사한 부분 중 일부를 낭독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책읽는지하철’의 대표 송화준(32)씨는 책을 보다 즐겁고 효과적으로 읽고 싶은 욕구가 생겨 책 읽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왔다고 한다. 송 씨는 필사의 매력을 세상과의 거리를 두어 정신을 쉬게 하고 다양한 감각을 열고 책에 빠져들면서 새롭게 자신과 대면할 수 있는 것이라 말했다. “글씨를 쓰고 있으면 마음이 가라앉고, 어릴 때 받아쓰기하던 추억이 떠오르는지 어딘가에서 몽글몽글함이 피어나서 기분이 좋아진다”고 말하는 그는 필사모임을 하면서 눈과 손, 입과 귀로 읽고, 더 나아가 ‘사람’을 통해 읽는 여정을 거치게 된다고 전했다. 필사를 함께 즐기고 깊이 있게 즐기기 위한 시도가 촉진되었으면 좋겠다는 그는 △나만의 필사 도서 만들어 선물하기, △밤샘 필사, △여럿이 함께 하는 릴레이 필사 등 놀이와 접목한 다양한 방식을 추천해주기도 했다. 홍대필사모임에 꾸준히 참여한 한아름(31)씨는 “필사모임에서 여럿을 만나 각자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날 참여한 사람의 수만큼 책을 읽고 오는 느낌”이라며 “잔잔하게 이야기를 공유하는 일이 특별하다”고 말했다. 그녀는 소설과 시를 좋아해 대학생 때부터 마음에 닿는 문장을 공책에 베껴 쓰곤 했으며, 필사 책갈피를 만들어 플리마켓에서 따뜻한 마음을 나누기도 했다. 그녀는 “필사하는 시간과 의미 있는 문장들이 만나 든든한 기운이 되는 것 같다. 필사를 하다 보면 느리게 읽고 쓰는 일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데 이런 시간이 흔치 않아 더 특별하게 다가온다”며 “필사한 부분을 읽으면 그날의 내 마음이 보인다. 좋은 문장이 선별된 책들도 있지만, 자신에게 와 닿는 글들을 스스로 찾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고 소감을 전했다. 이처럼 필사는 자신의 감성이 깃든 글자를 한 자 한 자 눌러 쓰면서 힐링의 효과를 얻을 수 있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