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란의 초기 소설집이다. 청년층의 사회적 가난과 우울의 정서를 뻬어나게 담았다. 개인적으로 앞서 읽은 최은영 작가(쇼코의 미소)의 문체와 스토리에 빠져있던 터라 그에 비해 감흥은 크지 않았다. 그래도 스타 작가답게 초기작임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단편들이 눈에 띈다. 표제작 <침이 고인다>보다 가난한 사랑을 다룬 <성탄 특집>과 모성애를 그린 <칼자국>이 좋았다.

-이하 발췌 요약
침이 고인다
국내도서
저자 : 김애란
출판 : 문학과지성사 2007.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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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후배와 그만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후배가 ‘왜요’하고 묻는다면 ‘네가 젓가락을 이상하게 잡고, 채소를 잘 먹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어쩌면 단지 그 이유 때문일지도 몰랐다. 74 침이 고인다

모르면 물어봤어야지. 후배는 입술을 달싹거린다. 그녀는 자신의 모습이 못마땅해진다. 왠지 후배에게 미안하고, 미안해서 더 화가 난다.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75 침이 고인다

하지만 사랑에 빠졌을 때, 사내는 처음으로 자신에게 방이 있었으면 했다. 꼭 섹스를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소소한 잡담을 나누고, 온종일 함께 있을 수 있으며, 여관처럼 뒷문으로 나가지 않아도 되는, 그런 방이었으면 했다. 86 성탄특선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정말로 사라졌을 때 사내는 혼자 까마득한 계단을 내려다보면 생각했다. 그녀가 떠난 건 마음이 변했기 때문이 아니라고. 단지 조금 다리가 아팠던 것뿐일 거라고. 88 성탄특선

“우리 대학 가서도 연락하자.” 나는 우리가 대학 가서 연락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노량진은 모든 것이 ‘지나가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144 자오선을 지나갈 때

어머니의 칼끝에는 평생 누군가를 거둬 먹인 사람의 무심함이 서려 있다. 어머니는 내게 우는 여자도, 화장하는 여자도, 순종하는 여자도 아닌 칼을 쥔 여자였다. 썰고, 가르고, 다지는 동안 칼은 종이처런 얇아졌다. 씹고, 삼키고, 우물거리는 동안 내 창자와 내 간, 심장과 콩팥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나는 어머니가 해주는 음식과 함께 그 재로에 난 칼자국도 함께 삼켰다. 어두운 내 몸속에는 실로 무수한 칼자국이 새겨져 있다. 그것은 혈관을 타고 다니며 나를 건드린다. 내게 어미가 아픈 것은 그 때문이다. 기관들이 다 아는 것이다. 나는 ‘가슴이 아프다’는 말을 물리적으로 이해한다. 152 칼자국

내가 끊임없이 먹어야 했던 것처럼 어머니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어내야 했다. 딱히 할 일이 없어도 부엌에서 어머니가 이런저런 것을 재우고, 절이고, 저정하는 것을 보면, 나는 새깨답게 마구 게으로고 건방져지고 싶었따. 나무로 된 칼자루는 노란 테이프로 감겨 있었다. 긴 세월, 자루는 몇 번 바뀌었으나 칼날은 그대로였다. 어미니의 칼에서 사랑이나 희생을 보려 한 건 아니었다. 나는 거이서 그냥 ‘어미’를 봤다. 그리고 그때 나는 자식이 아니라 새끼가 됐다. 153 칼자국

‘집’과 달리 ‘방’은 개인의, 혹은 개별성의 상징 공간이다. ‘내’ 방은 휴식, 내밀성, 은밀하고 사소한 행복의 의미 작용을 가진다. 방은 개인에게 있어 비밀스러운 닫힌 공간인 것이다. 집에 관한 바슐라르의 명제를 변형한다면, ‘방은 인간 존재 최초의 세계’라 할 수 있다. 284 해설 | 나만의 방, 그 우주 지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