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게 읽은 작품. 여전히 무엇을 얘기 싶었는지 대부분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느낀다. 다만 작품 속에 묘사되는 희랍어는 너무 매력적이다. 한강이란 작가는 내공이 깊은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그나마 이해할 수 있는 다른 작품으로 재회하고 싶다. 그러면 언젠가 희랍어 시간도 다시 읽어야 겠다 싶은 날이 오겠지. 아무렴.

-이하 발췌
희랍어 시간
국내도서
저자 : 한강
출판 : 문학동네 2011.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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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속에서 어어, 우우, 하는 분절되지 않은 음성으로만 소통하던 인간이 처음 몇 개의 단어들을 만들어낸 뒤, 언어는 서서히 체계를 갖추어나갑니다. 체계가 정점에 이르렀을 때 언어는 극도로 정교하고 복잡한 규칙들을 갖습니다. 고어를 배우기 어려운 것은 바로 그 때문이지요. 29

정점에 이른 언어는 바로 그 순간부터, 더디고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좀더 사용하기 편한 형태로 변화해갑니다. 어떤 의미에서 쇠퇴이고 타락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전진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겁니다. 29

나를 용서하시겠습니까. 용서를 할 수 없다면, 내가 용서를 구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주겠습니까. 37

아마 앞으로 일이 년쯤은 더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랜 시간 더디 진행되어온 일이므로, 마음의 준비는 더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허락받은 담배를 가능한 한 오래 피우는 죄수처럼, 볕이 좋은 날이면 집 앞 골목에 나가 앉아 긴 오후를 보낼 뿐입니다. 38

잘 보이지 않으면 가장 먼저 소리가 잘 들릴 거라고 사람들은 생각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가장 먼저 감각되는 것은 시간입니다. 거대한 물질의 느리고 가혹한 흐름 같은 시간이 시시 각각 내 몸을 통과하는 감각에 나는 서서히 압도됩니다. 39

그 무렵 어디에선가 읽은, 신의 부재에 대한 논증을 적어 당신에게 내밀었지요.
이 세계에는 악과 고통이 있고, 거기 희생되는 무고한 사람들이 있다. 신이 선하지만 그것을 바로잡을 수 없다면 그는 무능한 존재이다. 신이 선하지 않고 다만 전능하며 그것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그는 악한 존재이다. 신이 선하지도, 전능하지도 않다면 그를 신이라고 부를 수 없다. 그러므로 선하고 전능한 신은 성립 불가능한 오류다.
당신은 나에게 펜을 돌려받은 뒤부터 수첩에 휘갈겨 썼지요.
그렇다면 나의 신은 선하고 슬퍼하는 신이야. 그런 바보 같은 논증 따위에 매력을 느낀다면, 어느 날 너 자신이 성립 불가능한 오류가 되어버리고 말걸. 
43

오히려 두 번 다시 인생에서 겪을 수 없을 달콤한 밤들이었습니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귀신에 홀리는 일과 비슷하다는 것을 그 무렵 나는 처음으로 깨닫고 있었습니다. 새벽에 눈을 뜨기 전에 이미 당신의 얼굴은 내 눈꺼풀 안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45

말할 수 있었을 때, 이따금 그녀는 말하는 대신 물끄러미 상대를 바라보았따. 말하려는 내용을 시선으로 완전하게 번역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처럼. 말대신 눈으로 인사하고, 말 대신 눈으로 감사를 표하고, 말 대신 눈으로 미안해했따. 시선만큼 즉각적이고 직관적인 접촉의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녀는 느꼈다. 접촉하지 않으면서 접촉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55

χαλεπὰ τὰ καλά 칼레 파 타 칼라
아름다움은 아름다운 것이다. 
아름다움은 어려운 것이다.
아름다움은 고결한 것이다.
세 번역이 모두 그르지 않은 것은, 고대 희랍인들에게 아룸다움과 어려움과 고결함이 아직 분절되지 않은 관념이었기 때문이다. 69

아름다운 사물들은 믿으면서 아름다움 자체를 믿지 않는 사람은 꿈을 꾸는 상태에 있는 거라고 플라톤은 생각했고, 그걸 누구에게든 논증을 통해 설득해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오히려 모든 꿈에서 깨어난 상태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현실 속의 아름다운 사물들을 믿는 대신 아름다움 자체만-현실 속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절대적인 아름다움만을-믿는 자신이. 94

넌 철학을 하기엔 너무 문학적이야, 라고 너는 이따금 나에게 충고했지. 네가 사유를 통해 다다르고자 하는 곳은 일종의 문학적 고양상태일 뿐이지 않니, 라고. 너와 밤늦도록 이어갔던 논쟁들을 기억해 논쟁이 완전히 끝난 뒤 문득 텅 빈 벽이나 어두운 색 커튼으로 주의를 돌릴 때, 마치 그때까지 우릴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지던 깨끗한 침묵도 그 시절의 넌 깨부술 수 없는 적이었지, 내가 던진 모든 질문들을 너는 명쾌하게 풀어갔지만, 네가 던진 질문들에 난 늘 길을 잃고 말았지. 틀렸어' 라고 너는 말하곤 했어. 미안하지만 지금 네 말은 틀렸어. 라고 긴 논쟁이 마무리지어질 때쯤이면 덧붙여 말했지. 아무래도 넌 문학을 하는 게 좋겠어. 그렇게 넌 까다로운 친구, 지독히 까다로운 동갑내기 스승이었지. 그 스승이 나에게 충고했던 것이 아마도 옳으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지만, 나느 그렇게 할 수 없었어. 문학 텍스트를 읽는 시간을 견딜 수 없었어. 감각과 이미지, 감정과 사유가 허술하게 서로서로의 손에 깍지를 낀 책 흔들리는 그 세계를, 결코 신뢰하고 싶지 않았어. 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