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김진영이 암 선고를 받은 후부터 임종 3일 전까지 1년여간의 일기를 묶은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알게 된 철학자 김진영은 선선하면서 온화한 분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감촉의 책이었다. 자기연민 앞에서 나약해지는 자신을 다잡는 모습, 병마를 이겨내야 할 이유를 찾으려 애쓰는 모습, 세상(삶)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읽는 내내,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삶의 유산으로 멋진 일기를 남겨주신 철학자께 감사하다.

아침의 피아노
국내도서
저자 : 김진영
출판 : 한겨레출판 2018.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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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발췌 요약

살아 있는 동안은 삶이다. 내게는 이 삶에 성실할 책무가 있다. 그걸 자주 잊는다. 24

정신이 늘 조용한 것만은 아니다. 정신은 그래야 할 때 우렁찬 것이 되어야 한다. 26

물은 다투지 않는다. 제일 낮은 곳을 제자리로 찾아 흐르기 때문이다. 물은 꿈이 크다. 가장 낮은 곳에는 드넓은 바다가 있다. 그렇게 물은 언어 없이 흐르면서 자유의 진실을 가르친다. 28

돌보지 않았던 몸이 깊은 병을 얻은 지금, 평생을 돌아보면 만들고 쌓아온 것들이 모두 정신적인 것들뿐이다. 그것들이 이제 시험대에 올랐다. 그것들이 무너지는 나의 육신을 지켜내고 병 앞에서 나 자신을 지켜낼 수 있을까. 이제 나의 정신적인 것은 스스로를 증명해야 한다. 자기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29

아침마다 아파트 앞에 트럭을 세우는 이 남자는 방금 떼어 온 야채들처럼 늘 싱싱하다. 그의 목소리가 크지만 시끄럽지 않다. 오히려 듣는 사람의 배 속으로 들어가서 근심을 쫓아내고 마음을 비워준다. 그건 그의 목청을 통해서 밖으로 나오는 생의 명랑성 때문이다. 35

바울은 옥중 편지에 썼다. “내 마음을 고백하자면 저는 죽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도 저는 그 소망을 뒤로 미룹니다. 그건 여러분들이 아직도 나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언젠가 강의에서 말했었다. 나를 위해 쓰려고 하면 나 자신은 너무 보잘것없는 존재라고, 그러나 남을 위해 쓰려고 할 때 나의 존재는 그 무엇보다 귀한 것이 된다. 40

물가에 앉으면 말이 없어진다. 그렇다고 말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존재의 바닥에 이르면 거기는 고요이지 침묵이 아니다. ‘고요의 말’이 있다. 51

나의 삶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타자들의 것이기도 하다. 나의 몸은 타자들의 그것과 분리될 수도 격리될 수도 없는 것이다. 나의 몸은 관계들 속에서 비로소 내 것이기도 하다. 80

그럴 때 나는 세상이 사랑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가득하다는 걸 안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세상을 사랑하는지도 안다. 92

안개를 통과하는 길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 그건 일상이다. 일상을 지켜야 한다. 일상이 길이다. 99

답은 자명하건만 그 자명함 앞에서 매일을 서성인다. 서성임, 그건 자기연민일 뿐이다. 115

내가 가진 것들이 있다면 그건 모두가 내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것이다. 이별의 행복, 그건 빈손의 행복이 아닌가. 178

“얼마나 걸어가야 절이 나오나요?”라고 물으면 촌부는 이렇게 대답한다. “이자뿌리고 그냥 가소. 그라면 나오니께” 182

늙은 제주 해녀들. 리포터가 묻는다. “물에 올라오면 그렇게 허리가 아픈데 어떻게 바다 일을 하시나요?” 늙은 해녀가 말한다. “물질을 사람 힘으로 하는가. 물 힘으로 하는 거지” 216

병원 벤치. 휠체어에 앉은 노파 앞에서 반백의 남자가 취한 목소리로 중얼댄다. “어머니 내가 너무 피곤해요, 사는 게 너무 힘들어요.” 그의 들썩이는 뒤통수를 말없이 쓰다듬는 휠체어의 노파. 220

자유란 무엇인가. 그건 몸과 함께 조용히 머무는 행복이다. 230

나만을 지키려고 할 때 나는 나날이 약해진다. 타자를 지키려고 할 때 나는 나날이 확실해진다. 242 

주말 오후 카페테라스에서 시간을 보낸다. 한곳에서 중년의 여자들이 모여서 수다를 즐긴다. 가끔씩 섹스라는 단어가 건너온다. 저편 원탁에는 남자들이 모여서 정치 얘기를 한다. 모두들 등산복을 입었다. 다른 곳 테이블에서는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자주 건너온다. 나는 그냥 거리 풍경을 바라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247

그때에도 나는 휘청거리는 몸을 꼿꼿하게 세우고 직립보행을 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힘들지만 그 보행을 지켜낼 수 있었다. 모든 것은 걷는다. 몸도 정신도 마음도 걷는다. 보행이 생이다. 나는 이 보행의 권위와 자존감을 지켜야 한다. 248

지금이 가장 좋은 때다. 지금이 가장 안전한 때다. 지금은 ‘아직 그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직 오지 않는 것은 힘이 없다. 252 

환자의 삶을 산다는 것. 그건 세상과 인생을 너무 열심히 구경한다는 것이다. 255

계모 주부인은 왕상을 미워하여 몹시 가혹하게 다루었다. 그러나 왕상은 주부인을 매우 정성 들여 섬겼다. 집의 마당에 오얏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열매가 매우 탐스러웠다. 계모는 항상 왕상에게 그것을 지키라고 했다. 때때로 한밤중 내내 비바람이 갑자기 몰아치면 왕상은 나무를 끌어안고 큰 소리로 울었다. 이 일화에서 중요한 건 왕상을 죽이려는 계모의 악덕도 제모를 정성 들여 섬기는 왕상의 효심도 아니다. 열매가 탐스러운 오얏나무다. 왕상은 왜 그 오얏나무를 껴안고 슬피 울었을까. 함께 슬퍼한다는 것, 그것은 반드시 함께 메마르는 것만은 아니다. 그건 그 슬픔의 크기만큼이나 풍성하게 열매를 맺는 일이기도 하다. 오얏나무의 풍성한 열매는 왕상을 가없이 여기는 오얏나무의 슬픔이었다. 왕상은 그걸 알았고 오얏나무를 사랑했고 그래서 오얏나무를 껴안고 목 놓아 울었던 것이다. 2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