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은 함부로 제 이름을 부르지 못하게 하며 시시각각 몸을 바꿔 딴 데로 달아났다.
혹은 누군가 그 이름을 부를 때까지만 그 이름이고자 했다.
나는 내 숨 모양이 궁금해 허공에 대고 '하아' 입김을 불어보았다.
그것은 현상액에 담긴 필름처럼 아스라이 형체를 드러낸 뒤 사라졌다.
희고, 가볍고, 부질없는 게 나의 내계와 외계가 만나 짧은 인사를 한 뒤
헤어지는 모습 같았다. 혹은 추운 계절에만 잠깐씩 모습을 드러내는
영혼의 형상 같았다. 나는 가을의 그 풍경(風格)이 좋아 자꾸만
'하아' '하아' 날숨을 내뱉었다. - p.194
어디선가 잠자리 한 마리가 날아와 무릎 위에 앉았다.
나는 숨죽인 채 녀석을 뚫어져라 바로봤다.
한쪽 눈이 거의 안 보여, 초점을 맞출 때는 오른쪽 눈을
아예 감아버리는 게 나았다.
한 개의 눈을 가진 나와 만 개의 눈을 가진 그가 서로 응시했다.
기이한 긴장감이 돌았다.
두 존재가 아닌, 두 시간이 마주하는 느낌이었다.
그것도 수백만년 전의 시공과 현재가 대면하는 듯한,
실바람에 잠자리의 날개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날개 위로 무지갯빛 기운이 자글대다 잠잠해졌다.
잠자리는 곧 사뿐 날아올라 벤치 끝 팔걸이에 앉았다.
두 쌍의 투명한 날개 위에 새겨진 규칙적이고 기하학적인
무늬가 햇살 아래 빛났다.
그 속엔 녀석이 원시생물이었을 때부터 간직해온 정교한
수학체계가 깃들어 있을 터였다.
아마 우리 몸에도 같은 식(式)이 들어 있겠지.....
그러면 애초에 그 수(數)를 만든 존재는 누구였을까.
그리고 나를 만든 그분께선 어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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