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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Ⅱ/기타

[프레시안]박원순 인터뷰 "나를 나서게 한 건 부채감ㆍ죄책감"

참여연대에 내가 7년을 있었는데 더 했어야 하나? 아름다운재단 내 이름이 빠져도 모금액이 계속 늘어나는데 그 위에 계속 올라타서 회장이 되고 차도 한 대 내놓으라고 해야 하나? 제 욕심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지금과 다른 세상을 만드는 것이 내 미션이다. 그러니 한 단체를 만들어 어느 정도 시스템 만들어주고 팀웍이 생겨나면 떠났었다. 지금은 요령이 생겼다. 첫째 팀웍, 둘째 사업의 패러다임, 셋째 앞의 두 가지가 지속사능한 재무적 지수. 이걸 갖추면 떠났다.

어떤 단체든 처음엔 설립자의 의중이 제대로 반영되는 조직으로 갈 수 밖에 없다. 제가 일을 해 보니 한 2~3년은 그렇게 (만기친람식으로) 안할 수 없기도 하더라. 그런데 3년이 되면 사람들이 많이 달라진다. 그럼 제가 구체적 간섭을 할 이유가 없어진다. 희망제작소 팀장회의에 안 들어간 지도 1년이 더 됐다. 시민단체는 누가 일 열심히 안한다고 나가랄 수도 없는 조직이다. 서로의 신의와 열정으로 움직였다. -기사중에서

서울시장 출사표를 던진 '박변'은 주저함이 없었다. 15일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직까지 벗어던져 사무처장도, 상임이사도, 소장도 아닌 그냥 박원순 '변호사'가 된 그는 <프레시안>과 인터뷰에서 "오세훈 전 시장의 잔여임기 3년 정도론 부족하다"면서 "재선까지 생각하고 있다"고 잘라 말했다.

일 중독자, 아이디어 뱅크로 자타가 공인하는 그는 구체적 공약 제시는 다음 기회로 미뤘지만 이전 시장들에 대한 평가도 거침 없었고 자신의 청사진도 명확했다.

그는 "대선을 위한 자신들의 욕구에 시정을 종속시켰다"고 이명박, 오세훈 전 시장을 비판했다. 그러면서 "어쩌면 이미 세상이 바뀌어 있다. 그 세상을 행정에 못 끌어들이는 것 뿐이다"고 자신만만한 포부를 감추지 않았다. 참여연대, 희망제작소의 성공 경험을 돌아보는 모습에선 자신감과 자부심이 동시에 느껴졌다.

▲ "재선까지 생각한다"는 포부를 밝힌 박원순 변호사ⓒ프레시안(최형락)
모든 정치인들이 다 그런 면이 있지만 박원순 변호사에게선 '시켜만 주면 잘 할 자신이 있다'는 결기가 유독 강하게 나타났다.

그는 '정치'에 대해선 조심스러웠다. 물론 "경선은 당연히 거쳐야 한다. 나는 열려있다. 치열한 토론을 마다할 이유가 있냐"는 말에선 호기가 드러났다. 하지만 "굳이 말하자면 나는 중도적 진보다"고 스스로를 규정하면서도 "나는 사람을 딱 떨어지게 규정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나로 규정하려는 것은 잘못된 것 아닌가"라고 말할 땐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원장의 모습이 오버랩됐다.

다만 그는 "이명박 정부가 잘 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있나"면서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후, 정치도 사회도 후퇴하고 민생은 도탄에 빠지는데 당신만 혼자 고고하게 손에 물 안 묻히고 사냐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고 자신을 '반MB' 전선 위에 놓았다.

정치색이 옅은 'NGO활동가 박원순'은 중도층에 어필할 수 있고 국정원 사찰을 고발한 '진보인사 박원순'은 반한나라당 정서에 부합한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다면 서울시장 선거는 싱겁게 끝날 것이고 두 모습이 충돌한다면 악전고투를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그는 이제 또 다른 혹독한 검증을 통과해야 한다. 사돈의 팔촌까지 탈탈 털어내는 시험대다. 사정기관은 물론 대한민국의 모든 언론이 그의 뒤를 캘 것이다. 물론 지난 20년을 공적 인물로 살아온 그에게서 아직 큰 흠결은 발견되지 않았다.

박원순은 "제가 살아온 과정에 소소한 먼지는 있을 수 있겠지만 본질적으로 잘못 살지는 않았다는 생각은 한다"고 말했다. 그를 아는 이들도 "그런 말 정도 할 자격은 되는 사람이다"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보수진영에 대한 잣대와 나머지 인사에 대한 잣대는 천양지차였던 적이 어디 한 두 번인가?

36년 전 열아홉 나이 서울대 법대 1학년생이 처음으로 데모에 참여했다가 퇴학생이 되고 소년수가 돼서 감옥에 들어갔다. 감옥에서 "많이 배운" 그는 사법고시 준비를 결심했고 어렵잖게 합격해 사법연수원에서 조영래를 만났다. 짧은 검사 생활 후 조영래의 후배 변호사로 너무나 행복했던 그는 "다른 방법으로 세상을 바꾸겠다"고 결심했고 한국 시민운동의 개척자가 됐다. 그리고 이제 박원순은 "도법 스님이 소개해준 귀정사(歸政寺, 돌아갈 귀 자에 정치할 때 정 자를 쓰는 그 절에서 며칠을 묵으면서 '이것이 운명인가'라는 생각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혁명도, 정치도 아닌 새로운 길을 택했던 그가 뒤늦게 정치에 뛰어들었다. 친구들이 먼저 걸었고, 선배들이 강권했지만 거부했던 그 길을 이제사 택한 이유를 그는 열심히 설명했다.

정치를 바꾼 사람이 될 것인가, 정치판에서 바뀐 사람이 될 것인가? '역시 박원순이다'는 말을 들을 것인가 '박원순도 별수 없더라'는 말을 들을 것인가? 박원순은 "나에게 5년을 달라"고 말했다. 서울시민은 과연 박원순을 선택할까?

다음은 15일 오후 종로의 한 카페에서 진행한 인터뷰 전문.

"퇴학생 소년수 때 '법공부 하면 할 수 있는 일 많겠다' 생각했다"

▲ 박원순은 "본질적으론 잘못 살진 않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박변'이 이른바 저명인사가 된지는 20년이 넘는다. 하지만 정치인으로 나선다는 것은 대중들 앞에서 완전히 발가벗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인과 가족은 준비와 각오가 돼있나?

박원순 : 사실 그런 것은 잘 몰랐는데 맞는 말이다. 정치인으로는 초보고 거쳐야만 하는 검증의 과정이 있다고는 하는데, 제대로 준비하고 나온 상황은 아니다.

갑자기 나오는 과정에서 가족들은 반대했다. 정치 그리고 대중 앞에 나서는 것을 가족들이 싫어했다. 준비를 제대로 했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제가 살아온 과정에 소소한 먼지는 있을 수 있겠지만 본질적으로 잘못 살지는 않았다는 생각은 한다.

프레시안 : 1남 1녀가 있는 것으로 안다. 자녀들은 무엇을 하고 있나?

박원순 : 딸은 유학 가 있고 아들은 최근 군입대 했다가 문제가 있어서 다시 나와 치료를 받고 있다.

프레시안 : 부인과는 언제 만났나?

박원순 : 내가 사법연수원 마치고 대구 지법에서 시보를 할 때 소개로 만났다.

프레시안 : 그렇다면 부인은 운동 쪽과는 크게 관계 없던 사람인가.

박원순 : 그렇다. 국문과를 나왔고 철학을 부전공한 사람이다.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독일에 철학 공부하러 갔을 사람이다.

프레시안: 디자인 인테리어 쪽 사업을 한다고 들었는데

박원순 : 맞다. 이제 나를 먹여살려야지.

프레시안 : 1980년 스물다섯에 사법고시에 합격했으니, 시쳇말로 소년등과다. 대학 퇴학 이후 사법고시로 진로를 설정한 이유는?

박원순 : 대학 1학년 때 잠깐 감옥에 간 적이 있다. 그때 책을 많이 읽었다. 당시 읽었던 책 중에 예링이라는 독일의 법철학자가 쓴 <법의 권리를 위한 투쟁>이라는 책이 인상적이었다. 법의 목적은 평화, 그 목적에 이르는 과정은 투쟁이라는 대목이 있다. 법의 최종 목적은 평화지만 그 평화나 권리가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며 많은 노력과 투쟁의 결과물이란 얘기다. 당시만 해도 운동하던 사람들이 고시 공부를 한다고 하면 '변절'이라곤 안 해도 백안시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난 예링의 책을 읽고 (법을 공부하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참 많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감옥에서 나와서 1년이 지나도록 (서울대에서) 복적을 시켜주지 않았다.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드는데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고시공부였다.

프레시안 : 감옥에 가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나?

박원순 : 긴급조치 9호 위반. 이른바 5.22 사건이었다. 감옥에 가고 퇴학 당했다. (편집자 주: 1975년 4월 8일 서울대 농과대학 4학년 김상진이 유신철폐를 외친 후 할복 자결한다. 박정희 정권은 김상진 사망 후 15시간 만에 장례식도 없이 화장토록 조치했고 각 대학에 휴교 및 휴강 조치를 단행한다. 그러나 서울대생 1000여 명이 그해 5월 22일 김상진 열사 장례식을 거행하고 대규모 시위를 벌였고 정부는 관련자 60여 명을 구속했다. 이를 5.22 사건이라 한다.)

나는 1학년이었고 크게 의식화된 학생도 아니었다. 저녁에 이화여대생과 미팅이 잡혀있던 날이었고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경찰 진압이 너무 심하다 싶어 데모에 참여했다 잡혀 감옥에 갔다. 오히려 감옥에서 공부를 많이 했다. 감옥에서의 경험은 참 좋았다. 그때 내가 열아홉 살이었으니 소년수였다. 소년수들과 함께 지내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 그 이후 법조인 생활을 하면서도 판검사들이 감옥 체험을 해 보면 참 좋겠다 싶었다.

프레시안 : 서울대 복적 기회도 있지 않았나?

박원순 : 내내 없다가 1980년 서울의 봄 때 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단국대를 졸업한 후였다. 굳이 나를 쫓아낸 대학에 다시 가야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프레시안 : 참여연대 창립 전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 이야기 좀 듣자.

박원순 : 고시 합격한 뒤 잠깐 검사로 일했다. 1년이 넘으면서 젊은 청춘을 검사로 지내는 건 아닌 것 같다는 판단이 들어 그만두고 변호사 개업을 했다. 처음에는 일반 변호사로 일했다. 1983년의 일이다. 그런데 그때부터 어마어마한 시국 사건들이 계속 잇따라 몰려오기 시작했다. 당시 내가 조영래 변호사를 비롯해 황인철 변호사 등과 만나게 됐다. 조영래 변호사는 사법연수원에서 제적됐었다 복적해서 나와 같이 졸업했다. 그분들을 모시고 1986년 즈음부터 본격적인 인권 변론을 시작했다. 참 많은 것을 배웠다. 특히 조영래 변호사에게 그랬다. 조 변호사는 탁월한 예지력, 통찰력이 있고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의 통합력도 가지고 있다. 조 변호사가 이런 일(서울시장 선거)에 나서고 내가 기획실장 같은 역할을 했다면 너무 행복하고 좋았을 것이다.

"부채감과 죄책감이 나를 이끌어 냈다"

▲ "부채감과 죄책감이 나를 끌어냈다"고 말하는 박원순ⓒ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그러다 어느 날 외국으로 유학을 갔다.

박원순 : 조 변호사가 생전에 나에게 '외국에 한 번 가보라'는 권유를 많이 했다. 계속 무시하다가 조 변호사가 돌아가신 뒤에 진짜 가야겠다 싶었다. 1991년 영국으로 유학을 갔고 다시 1년 후에 미국 하버드 법대에서 1년간 객원 연구원으로 지냈다. 2년 후에 돌아와서 우리 사회가 조금 새로운 방향으로 가야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 고민에서 만든 것이 참여연대다. 1994년의 일이다.

프레시안 : 참여연대를 만들면서 인권변호사에서 NGO활동가로 진로를 수정한 직접적 계기가 있나?

박원순 : 사실 변호사를 그만두고 외국에 가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증 때문에 영국까지 가게 됐다. 내가 변론하면서 만났던 이들의 새로운 삶, 민주주의가 약동하는 사회 같은 것은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내내 고민했다. 2년 후 돌아올 때 한 트럭 분량 자료를 가져왔다. 그 자료가 참여연대의 수많은 정책과 대안적 법률로 나타났다.

프레시안 : 참여연대 시작한 후부터 계속 정치권의 러브콜이 있었다. 계속 고사하다가 이번에 출마를 결심한 배경은 무엇인가?

박원순 : 부채감과 죄책감 같은 것이다. 우리 시대의 수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정치 때문에 고통 받고 있다. 4대강 사업도, 용산 참사도, 무상급식 문제도 모두 마찬가지다. 조금만 다르게 생각하면, 조금만 다른 리더십을 가지면 얼마든지 좋은 사회로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은 이미 참여연대 때부터 했다. 물론 그때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구상을 가능하면 비영리 단체를 통해 해보고 싶었다. 또 나름대로 그렇게 해 왔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당신이 그런 일을 공공기관이나 정부에 가서 하면 훨씬 더 좋을텐데 왜 시민운동 영역에 머물러 있냐고 물었다. 특히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후, 정치도 사회도 후퇴하고 민생은 도탄에 빠지는데 당신만 혼자 고고하게 손에 물 안 묻히고 사냐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사실 지난 지방선거 때도 출마를 잠시 고민했었다. 그때 생각을 좀 하려고 도법 스님에게 방 하나만 구해 주십사 했더니 귀정사(歸政寺)라는 절을 소개해줬다. 돌아갈 귀 자에 정치할 때 정 자다. 며칠을 묵으면서 '이것이 운명인가'라는 생각을 했다. 이후 시민단체 사람들이 쳐들어 와서 (출마) 하라고 난리였다. 조금만 더 나를 몰아붙였더라면 그 때 결심했을 수도 있다.

"굳이 말하자면 나는 중도적 진보다. 하지만"

프레시안 : 진보적 인사로 꼽히지만 사실 따져보면 보수진영, 한나라당 쪽 하고 관계가 그리 나쁜 것도 아니었다. 특히 이명박 대통령은 서울시장 시절 월급을 아름다운 재단에 기부하기도 했었다.

박원순 : 우리 사회가 너무 과잉정치화 돼 있다고 본다. 10년 전만 해도 생각의 차이도 있었고 진보-보수의 구별도 있었지만 지금처럼 대립하지는 않았다. 구태여 말하자면 난 진보다. 그러나 많은 경우 보수와도 서로 대화하고 협력할 수 있다. 특히 아름다운 가게나 아름다운재단, 희망제작소는 정치적 운동이 아니었다. 당연히 한나라당 사람과도 협력할 수 있었다. 앞으로 정치를 하다 보면 네 편, 내 편이 생길 수 있겠지만 당시는 한국 사회 발전을 위해 모든 사람을 적으로 돌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명박 시장이 환경미화원을 위해 써달라고 하면서 돈을 아름다운재단에 기부했다. 그 돈을 안 받아야 하나? 그렇다면 진보로부터만 돈을 받아야 하나?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프레시안 : 본인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데 이명박 대통령이 그때와 달라졌단 말인가?

박원순 : 그렇다기 보다는 우리나라의 정치적 지형, 사회적 상황이 너무 갈등으로 치달아 왔다는 얘기다. 우리 국민들이 지금 새로운 정치를 바라는 것도 그 맥락 아닌가 싶다. 같은 당이 아니면 모두 적이다. 물론 정치적으로는 적일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여의도에서 나오는 대화나 성명들은 건강한 이슈, 미래적 아젠다를 놓고 벌어지는 논쟁이 아니다.

프레시안 : 사실 안철수 교수도 여도 야도 아닌 포지션이었지만 결국 '한나라당 응징'까지 얘기하게 됐다. 그것도 엄정한 현실 아닌가. 박원순을 놓고도 강경 보수 진영에선 '좌파다'고 했고 진보진영에선 개혁적 정권에 대한 '일종의 2중대'라는 평가가 있었다.

박원순 : 굳이 말하자면 나는 중도적 진보다. 물론 양쪽에서 서로 (우리 편이 아니라는) 얘기를 할 수 있겠지만 나는 사람을 딱 떨어지게 규정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생각은 다양하다. 어떤 면에서는 진보고 어떤 면에서는 보수일 수 있다. 그것을 하나로 규정하려는 것은 잘못된 것 아닌가?

"민주당이 좀 더 혁신과 통합의 과정을 거친다면"

▲ 박원순은 민주당에 입당은 않겠지만 어떤 경선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피력했다ⓒ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안철수 돌풍'으로부터 이어지는 맥락에는 정치적 갈등의 예각화를 피하고 싶어하는 국민적 요구가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반한나라당에 대한 요구도 거세다. 두 가지 흐름이 겹치기도 하고 대립되기도 한다.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

박원순 : 처음에 이명박 정부를 지지했던 사람들에서조차 민심 이반이 일어나고 있다. 사실 이 정부의 여러 정책 중 정말 잘 했다는 것을 찾기 힘들 정도로 많은 실정을 범했다. 경제가 나아졌나? 남북관계가 좋아졌나? 민주주의가 진전됐나? 오죽하면 안철수 교수 같은 사람, 사실 야당 성향이 강한 사람이 아니라 전문직으로 건전한 상식과 합리성을 갖춘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반한나라당 이야기를 했겠나? (안 교수와 가까운) 법륜 스님 등도 제가 잘 안다. 그 분들도 사실 저에게 (정치에 나서라는)요구를 많이 했다. 그런데 독자적 정치세력화는 너무 험난한 길이고 또 현실적 가능성이 굉장히 적다. 그렇다면 기존 정당, 특히 민주당이 조금 실망스럽더라도 정통 야당으로서, 국민들이 부족함을 느낄지 몰라도 이 정부 아래서 투쟁의 중심 역할 해 왔던 건은 사실이다. 물론 진보정당과 시민사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민주당에 제가 입당해 당 후보로 되는 것 보다는 이런 요구를 모두 받아 안는 것이 낫다고 본다. 물론 민주당이 조금 더 앞으로 문호를 열고 저 같은 사람은 좀 더 많이 포함할 수 있는 혁신과 통합의 과정 거치면 나도 기꺼이 같이 갈 수 있다.

프레시안: 현실적 양당 체제를 인정하고 있는 듯 하다. 그리고 혁신과 통합이 되는 야당이라면 함께 못할 이유가 없다는 말도 들은 적 있다. 구체적으로 '이런 당이면 당적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있나.

박원순 : 아직도 사실 민주당이 전국 정당으로서, 물론 지난 지방선거에서 크게 진전했지만, 좀 부족한 면이 있다. 안철수 교수 같은, 각 분야의 전문성과 정치적 센스를 가진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도록 당의 색깔과 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본다. 민주당 안의 분들이라고 그걸 동의하지 않을 리 없다. 앞으로 그런 과정이 있을 것으로 본다. 그렇게 해서 새로운 정당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본다.

프레시안 : 오늘 박영선 의원이 출마 선언을 했다. 민주당은 네 명이 경선을 거칠 것 같다. 그러면 그 다음의 경선 과정인데. 보통 우리가 본 단일화 협상은 밤새도록 피튀기도록 싸우고 또 파기하고 이런 모습이었다. 반면 안철수 교수의 모습은 혁명적인 것이었고. 단일화 프로세스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나.

박원순 : 저는 기본적으로는 다 열려 있다. 제 이해관계 따라 다른 분들이 용납하기 힘든 것을 주장해선 안 된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 저는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룰을 만들어야 한다고 본다. 나한테 유리한 것을 고집할 생각은 없다.

내가 '꽃가마 타는 방식으론 안된다'고 말한 적 있다. 그 때는 지지율이 5% 나올 때다. 그 얘긴 경선도 불사하겠다는 것이다. 이미 거친 황야에 나온 것이다. 기꺼이 (단일 후보를 위한) 시민들의 판단을 묻는 과정을 한 번이든 열 번이든 거치겠다. 그걸 두려워할 순 없다.

"한 5년 정도면 꿈꾸는 것을 정착시킬 수 있다"

프레시안 : 지금 구체적 공약을 제시하는 건 무리지만 과거 서울시정을 평가하는 건 가능할 것이다. NGO활동가로서 조순, 고건, 이명박, 오세훈 4명의 민선 시장을 지켜봐왔는데?

박원순 : 고건 시장이 그야말로 행정의 달인이었다. 안정된 시스템 안착시킨 분이다. 제가 참여연대 사무처장 할 때 고 시장 함께 했던 것도 꽤 있다. 시민옴부즈만 제도를 붙인 청렴계약 제도 같은 것은 지금 전체 정부 기관이 다 도입해놓고 있다. 그게 제가 아이디어를 내고 고 시장이 받아들인 것이다.

그런데 제가 서울시장이 되면, 그런 안정성 위에 미래가 요청하는 도전의 과제에 대해 조금 더 투자하고 창조적으로 가져가야 할 부분이 있다고 본다. 그것은 보통 관료주의가 가진 한계 벗어나는 것이기도 하다. 이명박, 오세훈 두 시장의 시정은 정치화된 것이었다. 무슨 말이냐면 바로 다음 단계 대선에 대한 욕구 때문에 시정을 전부 종속시켰다. 이른바 전시행정이 그런 맥락에서 나왔다. 공무원들, 언론에 한 건 내는 것에 압박당해왔다.

앞으로 제가 여러 공약을 내놓겠지만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다. 창조적 혁신이 필요하지만 업무의 연결성도 소중하다. 기본적인 시정은 연속성이 있었야 한다. 시장이든 대통령이든 자기 임기에 뭐든 다 할 수 있다는 오만으로 다 뒤집어 버리면 아무것도 못 한다.

참여연대나 희망제작소 활동 때도 새 아이디어를 갖고 프로젝트를 진해하면 그게 안착되는데 1, 2년 걸리더라.

프레시안 : 희망제작소 퇴임식 때 말한 것을 보니 '5~10년 이면 다 바꿀 수 있다'고 하던데. 이번에 당선된다고 가정하면 임기가 3년 반 가량이다. 그러면 정말 일을 제대로 하려면 재선을 바라봐야 하는 것 인가?

박원순 : 당선도 안 된 마당에 재선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웃겠다. 이런 이야기가 오만해 보일 수 있어 저어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하자면 (재선에 대한 고려는) 당연하다. 한 5년 정도면 그래도 제가 꿈꾸는 많은 정책들이 정착되게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 안철수 바람이 불 때 "끽 해야 중소기업 운영한 것 아니냐"는 폄하의 시선도 있었다. 참여연대, 희망제작소 경험이 있겠지만 서울시 일년 예산은 20조 원이 넘고 서울지하철, SH공사, 교통방송까지 다 서울시 산하다. 거대정당이 시장을 배출하면 '준비된 선수'들이 같이 들어갈 텐데. 박원순 역시 시민운동 진영의 전문가들이 같이 들어가 공동책임을 지는건가?

박원순 : 제가 이른바 범야권 단일후보가 된다고 하면 야5당, 시민사회와 함께 가는 구조가 생긴다. 그리고 서울시 공무원들은 제가 꿈꾸는 서울을 함께 만드는 파트너가 된다. 이들의 그간 영혼 없는 공무원으로 그동안 내몰린 측면이 있다고 본다. 좋은 공무원, 새로운 시대에 맞는 발상 가진 공무원 많다고 본다. 이런 분들과 함께 할 수 있고 또 외부에 전문가 그룹이 얼마나 많나. 귀만 귀울이면 보석 같은 아이디어들이 얼마든지 행정으로 현실화될 수 있다고 본다. 집단 지성에 대한 <위키노믹스>라는 책이 번역되어 나왔는데 다들 한 번 읽어볼 필요가 있다. 책상머리에 앉아서 하는 기업 경영과 행정 실험은 끝났다. 온라인이라는 너무 좋은 도구가 있다. 선거도 마찬가지다. 늘 소통하고 사람들 얘기를 듣는 리더십을 만들어내면 세상을 바꾼다. 어쩌면 이미 세상이 바뀌어 있다. 그 세상을 행정에 못 끌어들이는 것 뿐이다.

"저는 빚진 자다. 함께 가겠다"

프레시안 : 진보진영 이야기를 들어보면, 박원순이 시장 일을 정말 잘 할 것인데 그게 오히려 문제라는 우려도 있더라. 매끈한 행정 속에서 진보적인 의제들, 사회적 갈등을 통해 표출될 수 밖에 없는 의제가 묻힐 수 있다는 우려다.

박원순 : 박원순이라는 사람을 함께 가는 파트너라고 생각 안 하시고, 따로 노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좀 답답하다.

오늘 민주노동당 이정희 대표 만나서도 그런 얘기를 했다. 사실 제가 부족한 부분이 그런 것이다. 시민사회적 발상은 기층 민중 요구와는 조금 동떨어진 부분이 있다. 진보정당, 민주노총, 한국노총 생각을 충분히 들을 필요가 있다. 공무원 노조와도 갈등할 필요 없다. 대화 해야 한다. 기업과도 대화하는데. 누구만의 시장이 아니다.

프레시안 : 안철수-박원순 현상을 거치면서 민주당은 물론이고 진보진영의 열패감도 상당해 보인다.

박원순 : 과거 이른바 진보정권 10년 기간 동안 사실 (우리 안에서) 갈등도 생겨나고 시행착오도 있었고 이명박 정부 들어와선 열패감도 들고 그 속에 또 다른 갈등도 생겨나고 우리가 여러 가지로 힘들 때 그 갈등이 더 강화되는 것 같다. 그런데 지난 번 지방선거를 기점으로 해서 점점 더 잘 풀려가는 방향으로 가지 않나. 통합이 힘들면 연대라도 하고 그런 힘들이 성취를 맛보고 그 성취가 통합과 혁신에 더 힘을 실어줄 수 있다.

제가 여러 가지 사업을 하면서 정치 현안의 현장에 있지 못한 죄송함이 있다. 김진숙 지도위원, 제가 백두대간 종주 시작할 때 85호 크레인 위에 올라가 있었다. 중간에 정동영 의원이 전화해서 '같이 김진숙에게 가자'고 했는데 그게 여의치 않아서 "내 이름이라도 자유롭게 쓰라"고 했다. 그때도 너무나 미안했다. 많은 고통을 당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저는 빚진 자다. 함께 가겠다.

"자신 없이 시작할 수 있었겠나"


▲ "박원순은 다르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일각의 부정적 평가들도 아마 알 것이다. 새 사업에 대한 아이디어와 펀딩 능력은 탁월한데 지구력이 떨어진다는 평가도 있다. 노마드식 사업 방식의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있다는 말이다.

박원순 : 참여연대에 내가 7년을 있었는데 더 했어야 하나? 아름다운재단 내 이름이 빠져도 모금액이 계속 늘어나는데 그 위에 계속 올라타서 회장이 되고 차도 한 대 내놓으라고 해야 하나? 제 욕심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지금과 다른 세상을 만드는 것이 내 미션이다. 그러니 한 단체를 만들어 어느 정도 시스템 만들어주고 팀웍이 생겨나면 떠났었다. 지금은 요령이 생겼다. 첫째 팀웍, 둘째 사업의 패러다임, 셋째 앞의 두 가지가 지속사능한 재무적 지수. 이걸 갖추면 떠났다.

서울 시정, 정말 잘 되고 시민들이 정말 동의해줘서 열심히 한다면 (잔여임기) 3년 정도는 사실 좀 짧다. 한 번 정도 더 하면 완전히 궤도에 올려놓을 자신이 있다. 그러면 떠나는 것이지 시장을 또 하겠나.

프레시안 : 박원순에 대한 평가를 들어보면 정말 꼼꼼한 일 중독자, 만기친람형 리더라는 평이 많더라. 몇 년 전엔 단체 간사들이 생일선물로 하루 동안 전화기와 컴퓨터가 연결 안 되는 방에 하루 가둬 버린 적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런데 사실 이명박 대통령도 그렇다. 두 사람이 어떻게 보면 거울 이미지다.

박원순 : 어떤 단체든 처음엔 설립자의 의중이 제대로 반영되는 조직으로 갈 수 밖에 없다. 제가 일을 해 보니 한 2~3년은 그렇게 (만기친람식으로) 안할 수 없기도 하더라. 그런데 3년이 되면 사람들이 많이 달라진다. 그럼 제가 구체적 간섭을 할 이유가 없어진다. 희망제작소 팀장회의에 안 들어간 지도 1년이 더 됐다. 시민단체는 누가 일 열심히 안한다고 나가랄 수도 없는 조직이다. 서로의 신의와 열정으로 움직였다.

서울시라는 방대한 조직은 원칙과 비전을 세우고 중요 정책에 대한 공약을 정하면 저절로 움직이는 조직 아닌가? 오히려 공무원 조직도 시민단체처럼 신나게 일하는 조직이 되길 바란다.

프레시안 : 결국 '박원순은 다르더라' 아니면 '박원순도 별거 없더라' 둘 중 하나다. 자신 있나?

박원순 : 자신 없이 시작할 수 있었겠나. 물론 제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회의하기도 하고 때론 절망도 한다. 도전과 위기, 시행착오가 없는 일은 없다. 새 길에 들어서서, 정치의 길에서 얼마나 많은 시련이 있을 지, 이 선거를 내가 장담할 수 있을지 부담이 있었다. 하지만 결심했다. 지지율 5% 나올 때도 결심이 확고했다. 그 결기를 보고 안철수 교수가 양보를 한 것이다. 내가 어정쩡했으면, 본인도 준비를 한 분인데 양보를 했을 리가 없다. 물론 위기와 도전이 계속 나타날 것이다. 이제 가는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