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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Ⅱ/기타

[미나비리스] '이천 개의 의지를 모으면 하늘도 날 수 있다.' [수도원의 비망록 1~2: 주제 사라마구]

1999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수도원의비망록(하)
카테고리 소설 > 기타나라소설
지은이 주제 사라마구 (문학세계사, 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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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로마의 성 빼드루 성당은 기초석에 축복이 내려진 순간부터 봉헌이 이루어질 때까지 120년이라는 기간 동안 노동과 자금을 필요로 했습니다. 제가 잘못 생각하지 않는다면, 폐하는 로마에 다녀오신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폐하 앞에 조립되어 있는 모형으로만 모든 것을 판단하신 모양입니다만, 이제 또다시 그런 성당을 지으려면 240년이란 시간도 충분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건축물이 완성될 무렵이 되면 폐하만이 아니라 폐하의 아들, 손자, 그 손자, 그 손자의 아들, 그 손자의 아들의 아들까지 돌아가신 뒤일 것입니다.- <수도원의 비망록 2> p. 144

 사실 이런 선남선녀가 나오는 테마는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크로노 크루세이드같은 애매한 결말도 싫어하진 않지만 좋아하는 편도 아니다. 그래서 점수를 약간 박하게 줄 수밖에 없었지만, 일단 소설자체는 격하게 내 취향이다. 어떤 분이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감명깊은 소설들 중 하나라느니 어쩌고 해서 나는 그게 허풍치는 줄만 알았는데, 이런 소설이라면 그런 허풍은 한번쯤 떨어줘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주로 타락한 종교와 부패한 왕을 비판하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흘러가지만, 현대의 우리에게 있어선 그닥 충격적인 소재는 아니다. 본인이 가장 깊은 감명을 받은 장면은 바로 수도원이 건축되는 과정이다.

 세계사 만화책을 보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어린시절 어느 집에 놀러가면 닥치고 세계사 만화책들을 들춰보았더랬다. 보통 2~3권 즈음에 등장하는 피라미드 건축장면. 본인의 집에선 이집트의 백성들이 재밌어하고 자부심을 느끼면서 피라미드 벽돌을 쌓았더랬다. 그러나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어떤 이웃의 집에 꽂혀 있는 세계사에선 전혀 다른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대부분의 인부들은 왕의 신하들에게 잡혀 강제로 끌려왔고, 채찍에 맞아가며 혹독하게 일하고 있었다. 본인으로서는 어느 세계가 진짜 세계일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수도원을 짓다가 소리소문없이 죽어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있는 와중에도 건축 모형만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변덕스럽게 제 2의 빼드루 성당을 만들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왕. 과거가 더 살기 좋았다는 말은 단지 현실의 어려움에서 도망치기 위해서이다. 일단 현재 이전의 중세에서는 정말 말도 안되는 변덕들로 인해 사람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노역이나 전쟁에 끌려가야만 했다. 그러나 현실이 만만치않게 어렵다는 건, 현실에서 해결된 일들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과 진배없다. 최초의 비행기 발명자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발띠자르는 결국 그의 자질과는 아무 연관도 없는 막노동을 하다가 죽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저임금과 비정규직 사이에서 꽃 한번 피어보지 못하고 소진되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가. 결국 이유는 단 하나. 부자와 빈자들 사이의 소통과 분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혹시 청와대 안에서 4대강 모형을 가지고 노시는 게 취향이신지요, 쥐각하.

 눈 가지고 장난치는 건 나스 기노코의 전매 아이디어인줄 알았더니 이제보니 그녀의 소설이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을 인용한 티가 많이 난다. <눈먼 자들의 도시>도 사실 너무 유명해진 소설이라 부담이 갔는데 지금 이 책을 보고 나니 볼 마음이 생겼다.
 

보테로라는 사람이 그린 주제 사라마구라고 한다. 그림이 평범해보일 만큼 임펙트한 사진이 많은 분이다.


리뷰어 미나비리스(
김정원) 블로그 '마호가니 서재에서 헤드폰을 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