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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Ⅱ/기타

[양손잡이] 빅브라더가 당신을 보고 있습니다 - 1984 (조지 오웰)

1984 (반양장) - 10점
조지 오웰 지음, 김기혁 옮김/문학동네


  중학교 때 읽은 이후로 꼭 재독하고 싶었던 책이었습니다. 어릴 적이어서 책을 읽은 기억이 너무 어렴풋합니다. 그래도 고전명작이라고 있는 건데 그냥 '읽어봤다'라는 느낌으로 평생을 살 순 없잖습니까. 네, 앞으로 많은 고전명작을 재독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단순한 경험의 기억만 가지고 있으면 안 되니까요.

  10대의 기억에는 단순히 윈스턴과 줄리아가 만나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 문장인 '그는 빅브라더를 사랑했다' 이 세 단어도 있지요. 하지만 20대 중반에 들어 다시 읽은 「1984 」 역시 별 기억에 남지는 않습니다. 결국은 읽었다는 행위보다 텍스트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저는 책을 읽을 때 기억할만한 곳에 작은 포스트잇을 붙여놓습니다. 감상문을 쓰려면 떠올릴만한 건덕지가 있어야 하거든요. 9월 초만 해도 매일 밤 체크해두었던 문구와 거기서 떠올렸던 감상을 노트에 정리하곤 합니다. 헌데 요새는 자기소개서를 쓴다고 바빠서 그런지 일기도 잘 안 쓰더라고요. 나흘 동안 체크해둔 문구를 한번에 정리하니 그것들을 보고 순간의 생각이 기억이 나나요. 다 까먹지. 기억은 사람 머리속에 있기 때문에 쉽게 잊어먹고 변하기 마련입니다.


  과거의 사건들이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기록된 서류와 인간의 기억속에서만 존재한다고 주장된다. 과거란 기록과 기억이 일치되는 것을 말한다. (259쪽)



  소설에는 기억구멍이란 게 존재합니다. 윈스턴이 일하는 곳에 있는 장치입니다. 그는 당이 주장한 잘못된 기록이 인쇄된 단행본의 내용을 적당히 현재와 맞게 고치는 일을 하는데요, 수정한 기록은 상층부로 넘어가 검토받고 원래의 기록은 장치 안으로 들어가 불타 사라지게 됩니다. 이로써 당은 기록을 수정하고 역사, 즉 과거를 지배하는 것이지요.

  역사는 이긴자의 기록이란 말이 있지요. 기억은 그 자체로 불완전합니다. 기억은 인간의 머리속에만 있는 것이고 기록함으로서 실존합니다. 구전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무형의 매개체이고 기록을 하는 것들은 유형의 매개체입니다. 전자의 불완전성을 보완하고자 후자를 선택하는 것은 역사의 당연한 수순이겠지요. 그리고 이 불완전성을 아는 우리는 더더욱 자료를 중시하고 종국에는 기록이 기억을 지배해버리고 마는 것이지요.

  소설 속의 영사는 의도적으로 사람들의 기억을 조작합니다. 아무래도 당의 존폐는 사상의 통일 여부에 있기 때문이겠지요. 개개인의 추억이 담긴 옛 물건을 가지고 있는 것을 금지하고 당의 입장에서의 불온서적을 모두 없애버립니다. 그리고 사원이나 교회 등의 큰 건물은 당이 원하는대로 용도를 바꾸어버리지요.

  이를 동조의 점층적 확산을 막기 위해서라고 생각해봤습니다. 물건을 가진 개개인은 그 자체로는 전혀 힘이 없습니다. 단지 추억만을 떠올리며 옛날과 현재를 비교하고 한탄할뿐이겠지요. 하지만 책은 그들보다는 상위이면서 작은 집단, 즉 지식집단을 계몽시킵니다. 사원이나 교회 같은 큰 건물들은 그 자체로 큰 영감을 줍니다. 그리고 여기에 종교라는 요소가 합쳐지면 현재에 지친 민중을 이끌기 더욱 쉬워지지요. 이 모든 요소들이 점점 확산된다면 민중이 깃발을 들고 일어나며 당은 통제력을 잃게 됩니다.

  그렇기에 역사 상에 그 많은 문화적 탄압이 있었겠지요. 가장 유명한 건 역시 진나라의 분서갱유가 있겠고요, 일제치하의 탄압 또한 같은 맥락 아닐까요. 사람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문화를 지배하라. 그런 겁니다.


  우리는 낱말들을 매일 같이 수십 개 혹은 수백 개씩 폐기하고 있는 거야. 언어를 뼈만 남기고 깎아내는 거지. (67쪽)



  언어란 참 중요한 것입니다. 보통은 우리의 사고가 언어를 만든다고 생각하지만, 소시르는 언어가 사고를 구조화시킨다고 했습니다. 머리속에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언어로 애써 표현하려 할 때가 있지요. 그 생각을 거듭 하다가 문득 한 단어가 떠오르는 겁니다. 그리고 그 언어를 생각하고 말함으로서 결국 처음의 생각이 사용한 언어의 의미로 구조화되버리는 겁니다. 실제로는 '생각=언어의 의미'가 아닌데도 말이죠.

  「1984 」에서 눈에 띄는 또 다른 문화적 왜곡이 있다면 신어제작이 있을 겁니다. 신어는 당의 노선과는 단어를 삭제해버렸습니다. 예를 들면 Free라는 단어가 있긴 하지만 '정치적 자유'라는 뜻은 없고 '~이 없는'이란 뜻으로밖에 사용하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진정한 자유란 없는 것이지요. 아니, 그런 개념 조차 떠올리지 못합니다. 그리고 하나의 단어는 단 하나의 명백한 개념만을 나타낸다. 신어제작의 목적은 사고의 범위를 늘리기 위함이 아니라 줄이기 위해서지요. 신어사용자들의 개인적 감상을 절대적으로 줄임으로서 정신적 폐쇄성을 증가시키고 당에 대한 비판은 절대 없도록 만듭니다. 언어를 고착화시킴으로서 사고의 폭을 줄여버리는 것이지요.


  이 눈 없는 얼굴이 턱만 위아래로 재빨리 움직이는 모습을 보자 윈스턴은 그것이 실제 사람이 아니라 일종의 허수아비라는 괴상한 느낌이 들었다. (71쪽)

  누구 하나 빅브라더를 본 사람은 없다. 게시판에 붙은 얼굴과 텔레스크린에서 나오는 음성이 전부이다. (253쪽)



  그리고 당의 입장에선 이렇게 사고의 폭이 좁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좀비떼처럼 피의 향기에 본능적으로 우르르르 달려가는 게 필요한 거죠. 아무 생각없이 당이 시키는대로 행동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당원을 제외한 사람들은 이모양 이꼴입니다. 역시 자각적인 것보다 무자각적 복종이 무서운 모양입니다. 윈스턴이 그들을 허수아비라고 생각한 것은 당연하죠.

  그는 민중에 의한 봉기만이 이 사회를 뒤엎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민중들은 너무나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은 책을 없애고 지식인의 성장을 막았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적당히 똑똑한 사람은 당에 빌붙을 생각을 하지만 너무 똑똑한 사람은 무자비한 권력보다 매력적이거든요.

  이렇게 뼈와 살이 있고 눈앞에 존재하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반면 막상 사진과 목소리로만 알 수 있는 빅브라더는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이 돼버립니다. 당은 권력을 추구합니다. 권력이 수단이자 목적인 것이지요. 그리고 그 권력의 최정점에 빅브라더를 내세웁니다. 그렇기에 빅브라더는 개념적인 게 됩니다. 당의 통지자로서의 빅브라더는 없습니다. 빅브라더가 권력이자 권력이 빅브라더인 것이지요. 그렇기에 당의 통치는 사실 허구적입니다. 권력이라는 개념을 지켜주는 물질적인 수단이 있기 때문에 빅브라더의 비실존을 알면서도 모두들 벌벌 떱니다. 하긴, 그렇기 때문에 '힘'이겠지요.


  "줄리아한테 해요! 줄리아한테 해요! 내가 아니야! 줄리아야! 그 여자한테는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단 말이에요! 얼굴을 갈기갈기 찢고, 뼈다귀가 나올 때까지 해치워요. 내가 아냐! 줄리아한테 해! 나는 안돼!" (353쪽)



  제가 책을 읽으면서 초반에 가장 답답했던 건 역시나 사람들의 답답한 사고와 행동이었습니다. 물리적 압력이 있지만 빅브라더라는 정신적 장벽을 왜 넘지 못할까, 였지요. 하지만 사람은 다 똑같은가 봅니다. 책 3부에서 윈스턴이 겪는 고통을 보니 생각이 싹 바뀌더라고요. 나는 부당한 이 사회에 항거해야지, 고매한 정신을 잃지 않을 거야, 사랑하는 사람들을 배신하지 않겠어. 윈스턴의 인간적이지 못한 태도, 남들 앞에서 정신적으로 완전히 발가벗겨진 느낌이 처량하기까지 합니다. 우리 인간은 폭력적인 태도 앞에서 망가진 태도만을 보일 수밖에 없는가. 참 슬픈 일입니다.


  그의 얼굴 표정이 변했다. 괴로움이 가시고 잠시 동안 기쁜 표정이 되었다. 지적인 따사로움 같은 것이, 그리고 무슨 소용없는 사실을 찾아낸 현학자와 같은 기쁨이 더럽고 볼품없는 머리카락 사이로 빛이 났다. (283쪽)



  감옥 안에서 만난 시인 앰플포스는 당의 뜻에 따라 발표된 시를 고칩니다. 하지만 운율을 맞추다보니 신(God)이란 단어를 쓸 수밖에 없었고 그 죄로 투옥됩니다. 하지만 윈스턴과 시에 대해 얘기를 하면서 감옥 안이지만 눈에 빛을 내며 시에 대해 말을 해댑니다. 미래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여기서 교화된 후 밖으로 나간다 해도 결국은 총살이 그들의 운명입니다. 하지만, 그런 곳에서조차 시인은 시를 논하며 마지막 생명의 환희 밝힙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어디서든 저런가봅니다. 전쟁과 같은 고난을 겪어도 그 아픔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게 우리 아니잖습니까. 저 아래 깔려있는 최후의 투지, 마지막에 그 생명의 불꽃이 자신을 태우는 한이 있어도 자신을 순교시키는 정신. 그렇기에 이렇게 살아가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막상 다 쓰고 나니 메세지가 하나도 없네요. 에잇, 다 망했어.

  (2011년 9월 14일 ~ 9월 19일, 39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