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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Ⅰ/독서노트

[송막내의 독서노트] 김광석 우리 삶의 노래


어느 늦은 밤이었다. 버스는 어제에서 오늘로 달리고 있었다. 그때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눈을 부볐다. 그때는 스스로에게 납득할만한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아마 그 뒤 몇 주를 이 한 곡을 무한히 반복해서 들었던 거 같다. 견딜 수 없는 나날이었고, 그렇기에 내가 견뎌낼 수 있는 어떤 소음이 필요한 나날이었다. 나는 그에게 그 소음이 되달라 부탁했고, 김광석은 기꺼이 그 한 곡을 한결같이 들려주었다.

왜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였을까. 김광석이었을까. 이후에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는 김광석의 노래가 아니었다. 그는 어느 날 버스 안에서 김목경이 부른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훔쳤다는 것이다. 내가 그랬듯이('그가 그랬듯이 나도'라고 하는 게 더 합당하겠지만). 그리고 그는 이 노래를 '다시 부르기'로 했다. 그가 그 순간 무엇을 떠올렸을지, 어떤 상황이었을지 알 수 없다. 어쨌든  ‘그걸' 노래했고, 내 마음도 그걸 느꼈던 것 같다. <김광석 우리 삶의 노래>, 이 책을 읽고 나는 김광석의 책을(또는 그를 다룬) 몇 권 더 주문했다. 그가 더 알고 싶다. 거기에 내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나 역시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나는 이 글 읽을 사람을 위한 어떤 말도, 평도 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누군가는 이 글을 읽을 것이다. 공개 글이란 그런 것이니까. 하지만 스스로는 나만의 글로 남겨두고 싶다.

-이하 요약 

김광석 우리 삶의 노래
국내도서
저자 : 김용석
출판 : 천년의상상 2016.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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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시간과 삶의 텍스트로서의 노래 

김광석은 “제 노래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이야기, 아파하는 이야기, 그리워하는 이야기,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겪고 느끼는, 이런저런 일상의 이야기들을 노래로 담아냅니다”라고 말하곤 했다.그가 남긴 노래들은 그 자체로 ‘인생 텍스트’이다. 그의 음반 레퍼토리를 보면, 삶, 사랑, 사람이라는 단어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이 세상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사랑하며 삶을 만들어간다. 김광석은 가벼우면서도 무겁고 피상적이면서도 깊은 삶의 다양한 주제를 노래의 씨줄과 날줄로 엮은 인생 텍스트를 세상에 내놓곤 했다. 그래서 누구라도 그 텍스트의 매듭들에서 ‘자기 이야기’를 발견하곤 진하게 동감하고 삶을 성찰하는 화두를 얻게 된다. 

김광석 음악의 핵심은 시가, 즉 시와 노래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노랫말이 중요했다. 또한 자신의 목소리가 어떻게 의미를 실어주는지가 중요했다. 여기서 김광석 특유의 곡 해석이 탄생하는 것이다. 그 소리에는 자기 삶의 진한 경험과 고뇌의 미세하고 굵은 결들이 새개져 있다. 자신의 삶과 괴리됨 없이 일치한다. 그러므로 그의 노래를 듣는 타인의 삶과도 즉각 감동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노래'는 ‘너의 노래’가 되고 ‘우리의 노래’가 된다. 사람들은 김광석의 ‘다시 부르기’를 두고 ‘남의 노래’를 완벽히 소화해 ‘자기 노래’로 만들 줄 아는 탁월한 능력을 높이 산다. 그러나 김광석의 진짜 공덕은 남의 노래를 ‘우리의 노래’로 만들었다는 데에 있다. 

그의 곡 해석이 대단한 흡인력을 갖는 또 다른 이유는 '주제의 확장성’이다. 대표적인 것이 <이등병의 편지>이다. 김광석은 이 노래를 ‘입영 노래’가 아니라 ‘인생 노래’처럼 불렀다. 우리 모두가 ‘인생 이등병’이기 때문이다. <서른 즈음에>가 서른 살에 이른 사람만을 감동시키지 않고, 이는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세월의 힘에 못 이겨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해야 하는 이야기지만, 이야기 속의 아들과 딸 역시 또 다른 세상을 헤쳐나가야 하고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주제로 한 김광석의 다른 노래들에서도 세대와 처지를 넘어서는 의미의 확장성을 느낄 수 있다. 이 모든 일은 단순히 가창력이라는 말로 규정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는 그의 곡 해석력에 기인한다. 

두렵고도 아름다운 삶의 시간들

“뭔가 이렇게 공감하시죠? 뭔가 스스로 가진 한계라고 하는 것, 꼭 나이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1995년 6월 29일 KMTV가 주최한 콘서트에서 김광석은 <서른 즈음에>를 부르고 나서 이렇게 말한다. 한계, <서른 즈음에>는 삶의 한계를 노래하고 있다. ‘서른’이라는 나이는 인생의 한계를 느끼는 심리적 순간들 가운데 한 예이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음을 섬뜩하게 느끼는 순간이다.

한계 중에서 가장 근원적이고 분명한 한계는 ‘시간’이다. “사람이라는 게 상황이 있고, 주변이 있고, 시간이 있어서 지나보면 사람들은 늘 변한다.” 그런데 “시간은 놀라지도 아쉬워하지도 않는다.” 김광석의 유고집 <미처 다 하지 못한>에 남긴 말이다. 김광석은 평범한 일상이 품고 있는 근원적 물음을 직감하고 살았던 것 같다. 이는 창의적 시도로 이어진다. 김광석은 “또 하루 멀어져 간다~”라는 마디를 마치 노래의 후렴처럼 부른다. 역설적으로 처음에 나오는 후렴인 셈이다. 이 독특한 후렴은 조금씩 각색되면서 매 연마다 첫 마디로 돌아온다. “점점 더 멀어져간다~” “조금씩 잊혀져 간다~” 형식상의 진짜 후렴은 앞에서 운을 떼어준 덕에 노래 전체의 의미를 도드라지게 하며 더욱 감동적으로 마감한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서른 즈음에>가 삶의 한계를 노래함은 다른 마디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작기만 한 내 기억 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가 그렇고, “내가 떠나 보낸 것도 아닌데 /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데.”가 그렇다. 사랑도 세상일도 종종 자신의 의지에 반해서 일어난다. 하지만 삶에 ‘어찌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것은, 삶의 상당 부분은 어떻게든 우리 의지로 해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김광석의 네 번째 앨범은 <서른 즈음에>와 함께 그런 의지를 잘 보여주는 노래들도 담고 있다. 자신이 작사 작곡한 <일어나>는 삶의 한계, 인생의 덧없음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인생이란 강물 위를 끝없이 부초처럼 떠다니다가 / 어느 고요한 호숫가에 닿으면 물과 함께 썩어가겠지.” 하지만 이것은 복선일 뿐이다. 곧 생명의 의지에 의해 전복되기 위해 있는 것이다. “일어나 일어나 다시 한 번 해보는 거야 / 일어나 일어나 봄의 새싹들처럼.” 그는 포효하기 위해 신음했던 것이다.

우리는 근원적 한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우리 삶에는 ‘사이비 한계’도 많다. 한계처럼 보이는 일상의 갖가지 속박 말이다. 역시 직접 작사 작곡한 <자유롭게>에서 김광석은 이런 ‘일상의 한계”에 갇혀 있음을 고백한다. “쉽게 단정 지은 일들 나와 너를 구속하고 / 쉽게 긍정 지은 일들 나와 너를 얽매이고 / 쉽게 인정했던 일들 나와 너를 부딪히고.” 그리고 벗어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고 해야 할 일임을 노래한다. “열린 마음으로 그저 봐라봐 / 서로가 아끼고 보듬을 우리 / 따뜻한 눈으로 마주할 우리 / 사랑으로 자유롭게 / 사랑으로 자유롭게.” 같이 부르자고 초대하듯이 목에 힘 빼고 자유롭게 흥겨운 추임새를 넣듯 부른다. 

김광석이 4집 앨범의 시작과 끝에 <일어나>와 <자유롭게>를 배치한 건 다분히 의도적으로 보인다. <혼자 남은 밤>과 <맑고 향기롭게>도 그렇다. <혼자 남은 밤>의 후렴은 인생의 덧없음 “되올 수 없는 시간들”과 고독한 인간 “외롭게 나만 남은 이공간”을 극복하려는 밝은 의지를 노래한다. “아 이렇게 슬퍼질 땐 거리를 거닐자 / 환하게 밝아지는 내 눈물 / 아 이렇게 슬퍼질 땐 노래를 부르자/ 삶에 가득 여러 송이 희망을 / 환하게 밝아지는 내 눈물.” 

김광석은 특히 <맑고 향기롭게>에서 그 어느 노래보다도 우리 삶과 인간관계의 모든 긍정적인 면을 발견하는 기쁨을 맑고 향기롭게 부른다. 김광석은 꽃들이 모두 진 후에도 스스로 향기가 되는 사람처럼 이 노래를 부른다.  

오늘도 너를 느낀다 작은 셀레임으로
어둔 곳에서 너만은 변함이 없구나
네 숨결이 널리 내게로 들려올 것 같으니
진정 너의 그 향기는 날개가 있꾸나

말없이 넌 말하지 더욱 같이하는 걸
조금씩 날 물들이지 더욱 너를 닮도록
은은한 내 마음결 따라 피어오는 꿈 속에
맑고 또 향기로움이 멀리 있진 않구나
맑고 또 향기로움이 멀리 있진 않구나

성적 욕망 위에 쌓인 사랑의 켜

카뮈는 “삶이란 캄캄한 어둠 속에서 끝없이 사랑이라는 성냥불을 켜대는 것’이라고 말했다. 삶과 사랑은 엮여 있다. 우리는 살면서 사랑을 많이 노래한다. 음악과 노래의 기원에 대해 다윈은 성선택이론에 근거에 설명한다. “내 결론은 남성이든 여성이든 인류 조상의 어느 한 쪽 성이 이성을 유혹하려고 음악적 운율과 리듬을 획득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인류는 사랑하기 위해 노래를 발전시켰고, 암컷과 수컷이 상대를 유혹해서 번식의 기회를 갖기 위한 수단으로 발전시킨 것이 노래이고 음악이라는 것이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노래는 원래 사랑 노래이고, 그중에서도 ‘작업쏭’이라는 얘기가 된다.

1989년 발표 당시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는 그의 1집에도 사랑 노래가 여럿 실려 있고 ‘작업쏭’도 세 편쯤 실려 있다. 집에는 김광석이 작사 작곡한 곡이 열 곡 가운데 여섯 곡이나 되는데 그 가운데 사랑 노래가 다섯 곳이다. 그는 이 노래들을 매우 다양한 표현형식으로 부른다. 1집 첫번째 곡인 <너에게>는 유혹의 재미와 품위를 느끼게 하고 듣는 사람조차 사랑스러운 장난기가 발휘된 우아한 전략 안으로 끌어들이는 노래이다. ‘작업쏭’ <너에게>를 지나면, 두 번째 트랙에서 벌써 작업을 걸었다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사랑에 지친 듯 능청을 떠는 <내꿈>이 나온다. “우리는 지쳐 지쳐 지쳐 지쳐 / 하늘을 볼 수 없이 너무도 부끄러워” 

다른 한편 이 노래가 던지는 흥미로운 화두는 자아에 대한 인식이다. 사랑에 빠졌을 때 자아는 둘의 결합에 몰입되어버린다. ‘나’가 ‘우리 둘’로 대체되는 것이다. 이건 완전히 배타적인 상황이기 때문에 타자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의식할 수도 없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빠져나올 땐 뭔가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고 자기를 돌아보게 된다. 그래서 노래한다. “나 나나나 찾고 싶어 / 나 나나나 가고 싶어 / 나 나나나 보고 싶어 / 나 나나나 끝이 없는 / 나 나나나 내 꿈들을.” 

세 번째 트랙 <그대 웃음소리>와 네 번째 곡 <슬픈 우연>은 사랑의 상실을 노래한다. <그대 웃음소리>에서 그리움과 상실감은 응축되고 절제된 목소리에 실려 있다. 김광석은 마치 자장가를 불러주듯 노래한다. 사랑은 상대에 대한 연민이자 배려이다. 그건 떠나버린 상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슬픈 우연>에서 김광석의 목소리는 처연하다. 김광석은 <거리에서>를 부를 때 시어로서 각운 효과를 온 마음에 실어 표현했다. “뭐라 말하려 해도 기억하려 해도 / 허한 눈길만이 되돌아와요 / 이젠 그대 모습도 함께 나눈 시간 / 더딘 시간 속에 잊혀져 가요 / 떠나가던 그대 모습 보일 것 같아 / 다시 돌아보며 눈물 흘려요.” <슬픈 우연>에서도 각운의 사랑의 상실감을 깊에 실어 부른다.

긴 세월 흘러간 줄 알았는데
모두 다 잊은 줄 알았는데
이 밤이 또 다가와 내 마음을 울려요
[…]
꿈처럼 흘러간 줄 알았는데
흔적 없이 잊은 줄 알았는데
[…]
잎새마다 이슬이 눈물처럼 흘러요
[…]
너와 걷던 그 길가에 꽃들은 피어
온 세상 꽃향기로 반기는데
잊혀진 추억은 내 마음을 울려요
 
우리는 김광석의 사랑 노래들을 들으며 성적 욕망 위에 쌓인 사랑의 켜가 얼마나 다층위적 감성을 담고 있는지 실감하게 된다. 잠시 친구와 우정에 관한 <안녕 친구여>를 거쳐, 다시 사랑을 노래를 듣게 된다.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트랙에서 아주 특별한 ‘작업쏭’을 만나게 된다. <내 마음의 문을 열어줘>는 김광석이 매우 경쾌하게 부른 노래다. “내 마음의 문을 열어줘!”라고 간청하지만 사실 자신은 이미 활짝 열려 있다. 체면, 자존심, 격식 이런 것은 이미 내동댕이친 지 오래다. 그래서 순수하다. 내가 열었으니 상대도 열 것이다. 이것이 열림을 행하는 지혜다. “여린 달빛 그 속이라도 날아가게”라고 할 땐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E.T.>의 한 장면이 연상된다. 열림의 과제는 사랑의 주제를 우주적으로 확장한다. 

<기다려줘>는 형식상 상대에게 간청하고 애원하며 작업을 거는 구애의 사랑 노래이지만, 동시에 “길을 찾고” 있는 구도의 노래이다. 이 노래에는 사랑과 진리를 향한 구도의 의미가 중첩되어 있다. 사랑이든 진리든 “이해하지 못하기에” 그에 이르는 길을 찾고 있다. 사랑이든 진리이든 “언제나 멀리 있는 그대”이다. 그래서 항상 “찾을 수 있을까” 의심하고 망설이며 길을 찾아 나선다. 사랑이든 진리든 구도의 목표는 “변하지 않는 사랑”이고 “불변의 진리”이다. 

난 아직 그대를 이해하지 못하기에
그대 마음에 이르는 그 길을 찾고 있어

그대의 슬픈 마음을 환히 비춰줄 수 있는
변하지 않을 사랑이 되는 길을 찾고 있어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그대 마음에 다다르는 길 찾을 수 있을까
언제나 멀리 있는 그대

기다려줘 기다려줘
내가 그대를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1집에는 이어서 김광석이 작사 작곡한 또 하나의 사랑 노래 <창>이 실려 있고, 아홉 번째 트랙에 ‘나’에 대한 성찰을 담은 <그건 너의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때문이야>, 그리고 마지막 트랙에 ‘우리’에 대한 성찰을 담은 <아스팔트 열기 속에서>가 실려 있다. 첫 트랙에서 마지막까지 쭉 이어서 들으면 사랑과 우정 그리고 나 자신, 곧 인간관계에 대한 별미를 느낄 수 있다. 

김광석의 사랑 노래는 2집과 3집에서도 다양하게 이어진다. 2집 첫 곡 <사랑했지만>에 이어서 3, 4, 5번 트랙에는 각자 특색 있는 구애의 노래가 실려 있다. <사랑이라는 이유로>, <마음의 이야기>, <너 하나뿐임을>이 그들이다. 이들 노래를 들으면 그가 구애와 사랑의 노래를 무지개처럼 다양한 음색으로 곱고도 서럽게, 서러우면서도 밝게, 밝으면서도 애처롭게 부른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김광석의 노래들에는 무시할 수 없는 결이 있다. 그 결은 살결이나 비단결처럼 눈에 확 띄는 것보다는 물결이나 바람결처럼 은근한 멋을 지닌 쪽에 가깝다. 섹스에 대한 사랑의 메타포도 이런 것 아닐까. 

Chapter 2 편지의 생명, 그 생명 다하도록

시인이든 가객이든 즐겨 ‘편지’를 노래해왔다. 세대가 바뀌고 편지가 사라져가는 시대에도 사람들은 편지를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매체의 은유와 상징으로 삼는다. 편지를 소통의 메타포로 활용하기도 한다. 가객 김광석에게도 편지는 각별한 의미와 상징성을 지녔다. 1980년대 중반에 시작해 1990년내 중반에 그친 그의 노래 인생을 편지라는 화두로 매듭지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보컬그룹 ‘동물원’으로 데뷔한 초기의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로 시작해, <이등병의 편지>를 거쳐, <부치지 않은 편지>라는 새로운 예술적 지평을 열려는 순간 김광석의 삶은 비극적으로 마감되었다. 

말 없이 건네준 편지

편지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쓰기’ 행위와 연관되어 있다. 편지letter는 우편mail이 아니다. 편지의 본질은 ‘쓰는' 것이고 우편의 본질은 ‘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쓰기는 말을 기술화하는 작업이다. 이는 우리의 의식변화에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쓰기는 자신의 의식을 강화함으로써 오히려 사람들 사이의 의식적 상호작용을 훨씬 더 붇돋는다. 편지 쓰기는 상대가 정해져 있으므로 이런 의식의 상호작용이 더욱 분명해진다.

쓰기가 의식을 향상시키면 사람은 진지해진다. 편지의 미덕은 바로 사람을 진지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박한 삶에도 편지의 의미를 끌어들여 진지한 삶의 순간을 회복하려 한다. 그러나 진지하다는 것이 진실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다만 진실을 사유하게 하고 진실을 통해 고통과 방황을 경험하게 하며, 내 의식의 진실과 상대의 진실 사이를 변증법적으로 관계 맺게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편지 쓰기는 자의식을 고양하는 길이자 타자의 의식과 개방적 소통을 할 수 있는 길이다. 말을 할 때는 나의 상대화자가 역시 말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글을 쓸 때 나의 상대화자는 나 자신이고 나의 정신이며 나의 마음이다. 편지글은 진실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진실을 표현하고자 하는, 진실을 알아가고자 하는 인간 노력이 산물이다.

또한 편지는 도저히 말할 수 없을 때에 쓴다. 그래서 때론 '말없이 건네주고' 갈 수 밖에 없다. 편지에는 쓰는 사람의 진지함이 그대로 배어 있다. 그래서 너의 진실을 알아내고, 그 불완전하지만 진지한 진실은 내 가슴을 흐르며 너와 영원히 시적 소통을 할 수 있는 새로운 모티프가 된다.

너에게 편지를 쓴다

편지는 개인사와 관련이 깊다. 대표적인 연애편지다. 사랑, 연모, 후회, 다시 만날 약속, 그리고 무엇보다도 “못다 한 말”들을 담을 수 있는 것이 편지다. 김광석은 자신이 작사 작곡한 <바람이 불어오는 곳>에서 “그대의 머릿결 같은 나무 아래로 / 덜컹이는 기차에 기대어 너에게 편지를 쓴다”라고 노래한다.

그러나 김광석은 연모의 정을 담은 말들로 편지를 쓰더라도 그 노랫말에서는 모호성의 유희를 펼친다. 그는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가지만 그 길은 “꿈에 보았던 길”이다. 의식의 흐름은 꿈길을 따라가는 듯하다. 그리고 그 길에서는 많은 것이 의미의 전복을 시도하고 있다. “설레임과 두려움으로 불안한 행복이고 “힘겨운 날들도 있지만” 길을 가는 사람은 “새로운 꿈을 위해 바람이 불어오는 곳”으로 가고 있다. 노래는 마지막 절에 결정적 반전을 펼친다. “휘파람 불며 걷다가 너를 생각”하지만 “너의 목소리가 그리워도 뒤돌아 볼 수는” 없다고 하며 바람처럼 표표히 바람이 불어오는 곳으로, 가던 길을 계속 간다.  

김광석이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던 작곡가 구자형은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맑고 투명해서 사랑스럽지만, 또한 유난히 수상스러운 노래라고 했다. 그것은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향해 가며 남기는 편지다. 그는 말로는 전할 수 없는 고양된 의식의 편린들을 편지로 남기고 있다. 이는 그 자신의 “못다 한 말”이다. 그것은 “너”에 대한 애모의 정과 함께 새로운 꿈과 새로운 세상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수평선을 향한 그 자신의 방랑의 욕구와 방황의 희열에 대한 진솔한 고백이다. 너에게 편지를 쓰고 있지만 너를 위한 편지만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삶의 모순적 내용이 모호한 노랫말의 유희 속에 담긴 것이다.그의 목소리는 서정적이고 맑고 경쾌하기까지 하면서도 감췄던 말을 꺼내려는 자의 차분함을 지니고자 노력하는 모순을 담고 있다. 노랫소리는 맑고 투명하지만 노래의 의미는 베일의 유희를 펼친다. 

편지를 써

<바람이 불어오는 곳>에서 편지의 은유는 모호하게 반투명하지만, 동물원 2집에 실린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에서 편지의 상징은 도도하다.  가사에 문장 부호는 없지만 김광석은 첫째와 셋째 소절을 물음표가 붙은 것처럼, 둘째와 넷째 소절을 느낌표가 붙은 것처럼 부른다. “떨쳐질까”와 “잊혀질까”는 조심스러운 의혹의 표현이다. “창문을 열어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는 자신의 행동을 묘사하는 말이다. 그러나 김광석의 창법은 이것을 이중적으로 표현한다. 즉 자신이 편지를 쓰면서 동시에 편지를 쓰라고 청하고 명령한다. 일종의 청유형 명령법인 셈이다. 

비가 내리면 음~
나를 둘러싸는 시간의 숨결은 떨쳐질까
비가 내리면 음~
내가 간직하는 서글픈 상념이 잊혀질까

난 책을 접어놓으며 창문을 열어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잊혀져간 꿈들을 다시 만나고파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특히 노래의 둘째와 넷째 소절이자 여러 번 반복되는 후렴에서 “편지를 써”를 부를 때, 김광석은 마치 가사의 혈맥을 짚어가며 그 맥의 기운을 소리로 감아올리는 창법으로 노래한다. 노래는 저 먼 하늘에 가 닿는다. 그것은 간절히 ‘함께’하고자 하는 청유가 명령이 될 정도로 마음 속 염원을 담고 있다. 소망의 편지는 향상된 의식의 집합으로 써야 답신을 받을 수 있따. 그렇게 하늘에 편지를 쓰면 하늘의 별들이 보내는 답신들이 유성처럼 우리에게 떨어질 것만 같다. 

‘인생 이등병'의 편지

김광석은 동물원 2집이 나온 후 가수로서 홀로서기를 하는데, 그 독립 초기에 부른 노래가 <이등병의 편지>이다. 기타 소리는 천천히 굴러가기 시작하는 기차 바퀴 소리 같고, 김광석의 노래는 '공중으로 아스라이 사라져가고야 마는' 증기기관차의 연기 같다.

다른 가수들이 부른 노래이지만, 자신의 개인사(군 복무 중 사고로 사망한 형의 이야기)와 연관이 있어서인지 김광석의 곡 해석은 모든 이로부터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노래로 만들었다. 이는 특별한 시대 상황과 개인적 처지에서 느끼는 그것이 오히려 우리 삶에서 보편적 의식을 일깨우는 것임을 일러주고 있다. 역으로 그것을 통해 우리가 삶의 진실을 엿볼 수 있음을 깨닫게 하고 있다. <이등병의 편지>는 우리나라에서 설사 징병제가 없어지더라고 계속 불릴 수 있는 인간 삶의 보편적 고뇌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다짐에 관한 노래다. 우리 모두는 '인생 이등병'이다. 우리는 삶의 고비마다 이등병 계급장을 단다. 경험 많은 일상생활의 병장도, 성공의 정점에 이른 인생 대장도 강등의 고비가 오면 이등병으로 다시 시작해야 한다.

박찬욱 감독은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이등병의 편지>와 <부치지 않은 편지>를 테마곡으로 삽입했는데, 만들면서 ‘편지’의 역할과 의미를 각별히 다룬다. 남한군 병사 두 명과 북한군 병사 두 명이 어우러져 우정을 나누게 되는 계기에 편지가 있다. 이수혁이 근무초소에 복귀한 후 편지를 써서 돌팔매에 달아 북한군 초소로 던지면서 그들의 관계는 결정적으로 구체화한다. 그렇게 편지가 오가다가, 어느 날 이수혁이 불쑥 북한군 초소에 나타난다. 이도 정우진 전사(신하균)가 이쪽으로 한번 와보라고 편지에 장남삼아 썼던 것이다.

이제 이야기는 성큼 운명의 장난 속으로 뛰어든다. 편지란 이렇게 운명을 부르기도 한다. 운명 같은 그들의 이야기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간다. “열차 시간 다가올 때”의 문명처럼 비극적 파국에 이른다. 이 노랫마디는 북측 순찰 간부가 초소에 들른 순간과 오버랩된다. 수혁이 진담 반 농담 반으로 경필과 우진에게 남쪽으로 와서 함께 살자고 제안 했을 때, “이제 다시 시작이다”라며 새 출발 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운명이 섞어놓은 카드패를 볼 수가 없다. 그럼에도 우리 ‘인생 이등병’들은 김광석의 외침을 잊을 수가 없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생이여.” 모든 시작은 젊은 날의 생처럼 시작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시작은 의미가 있다. 

부치지 않은 편지

김광석은 편지의 또 다른 아이러니를 노래한다. <부치지 않은 편지>다. 이 노래는 그가 저세상으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곡이다. 죽기 전날 밤에 녹음한 것이라고 한다. <부치지 않은 편지>는 1987년 초판에 나온 정호승의 <새벽편지>라는 시집에 수록된 시다.

풀잎은 쓰러져도 하늘을 보고
꽃피기는 쉬워도 아름답긴 어려워라
시대의 새벽길 홀로 걷다가 
사랑과 죽음의 자유를 만나
언 강바람 속으로 무덤도 없이
세찬 눈보라 속으로 무덤도 없이
세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 흘러 그대 잘 가라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 되리니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되리니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
뒤돌아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

시집 <새벽편지>에는 제호가 된 시를 비롯해 ‘편지’라는 말을 제목에 담은 시가 열두 편이나 실려 있다. 단순히 <편지>라는 제목의 시는 두 편인데, 그 첫째 시에서 시인은 꽃잎이 없는 꽃, 풀잎이 없는 풀, 날지 못하는 새, 그림자 없는 사람의 시를 쓰고 있다. 모두 형용모순이다. 다른 시들도 시가 궁극적으로 모순의 비밀과 진실을 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모순은 고사에 등장하는 창과 방패의 관계처럼, 관계라는 조건 때문에 어느 한쪽이 자신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순간 자신의 존재의미를 상실하는 상황이다. ‘모-순’은 상호배제의 구조가 아니라 공존의 구조이다. 우리 삶은 수많은 모순적 공존의 구조를 ‘감내'해야 한다. 사람은 모순적 상황으로부터 도피한다고 해서 해방되거나 자유로워질 수 없다. 헤겔에게 변증법의 과정에서 자유정신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모순의 해결이 아니라 모순을 감내하는 능력이다. 헤겔에게 모순은 절대자의 본성으로, 절대자 또는 신은 모순의 구조를 내적으로 완벽하게 포용하는 존재다. 

김광석도 삶의 한 고비에서 모순의 어느 한쪽을 버리려 하거나 모순적 상황으로부터 도망치거나 하는 자신을 발견했는지 모른다. 그리고는 안고 가야 하는 것임을 깨닫고 모순을 감내하고자 노래를 불러야 겠다고 다짐했는지 모른다. 김광석의 목소리는 모순의 감내를 표현하는 데 잘 어울린다. 김광석 특유의 내지르는 듯한 창법이 있다. 외적으로 내지르는 창법의 이면에는 소리를 내적으로 응집하는 듯한 창법이 있다. 인고의 심연으로 응집되는 소리, 그 소리가 바로 김광석이 모순을 감내하는 시의 비극적 우아함을 표현하며 들려주고 싶었던 것이리라. <부치지 않은 편지>에서도 소리의 응집과 발진은 교묘하게 교차한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김광석이 가창을 위해 가사를 미세하게 변형한다는 사실이다. 정호승이 “사랑과 죽음의 자유를 만나 / 언 강바람 속으로 무덤도 없이”라고 지은 시구를 김광석은 “사랑과 죽음이~ 자유를 만나 / 언 강~ 바람 속으로 무덤도 없이”라고 노래한다. 이 변이는 가창의 유연함만이 아니라, 의미의 유연함을 가져온다. 모순 세계의 특징은 의미의 불확정성이다. 그래서 김광석이 시도한 언어의 변이가 주는 의미가 더 가슴에 와 닿는다. 김광석은 좀 더 젊을 때 “편지를 써!”라고 천진난만하게 명령하듯 청했다. 하지만 불현듯 찾아온 삶의 끝자리에서 ‘부치지 않은 편지’의 모순을 가슴 가득 안고 길을 떠났다. 

Chapter 3 현대의 음유시인, 그리고 연애와 사랑

김광석은 노랫말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가수였다. 노래에 삶의 이야기를 담아낼 줄 알았던 진정한 음유시인이었다.

음유시인과 로맨스

음유시인의 역사적 기원은 중세 유럽에 있다. 그들은 무훈과 기사도를 소재로 하여 서정성 짙은 연애시를 지어 부르며 유랑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1세기 말부터 시작된 십자군 전쟁으로 영주들은 원정길에 올라 영지에 부재했으므로 음유시인(이들 역시 기사이다)의 관심과 충성은 영지에 남은 귀부인을 향한다. 귀부인은 충성의 대상이자 사랑의 대상인데, 그녀의 신하가 된 ‘기사-시인’은 자신의 시와 노래로 귀부인을 정신적으로 유혹하게 된다. 이러한 금지된 관계 속에서 욕망은 더욱 커지고 귀부인은 점점 더 미적으로 승화된다. 그지없이 고결하고 아름다운 대상이 된다. 

문학사가들은 중세시대에 불가능한 사랑이라는 개념, 영원히 충족되지 않는 열정과 달콤한 불행의 근원으로 이해되는 사랑이 발명되었다고 본다. 바로 이 ‘로맨스’는 사랑이 자체라기 보다는 새로운 형태의 특별한 연애 방식 또는 구애 방식이다. 로맨스의 본질은 구애의 방식과 과정이다. 사랑이 “인간의 육체적 기초 위에 꽃피는 자연스러운 애정”이라면, 로맨스는 사랑이라기 보다는 사랑에 관한 일종의 ‘가상놀이’이다.  음유시인의 존재는 인간의 욕망과 그 표현이 얼마나 엉뚱하고 그야말로 다양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이야기와 노래로 표현하고자 한다. 가상현실로서의 사랑, 즉 음유시인의 로맨스도 그런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12세기의 유명한 음유시인 조프레 뤼델의 전설과 그가 남긴 시구들에도 가상적 사랑놀이로서 로맨스가 잠재해 있다. 블라이의 성주였던 뤼델은 제 2차 십자군전쟁에 참여했는데, 그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머나먼 곳의 귀부인’을 열렬히 사랑하게 되었다는 전설이 곧 꽃피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랑의 대상을 찾아 떠난 여정에서 뤼델은 병에 걸렸다. 그가 숨을 거두려는 순간에 이르러서야 이 고통에 빠진 기사의 존재를 알게 된 귀부인은 죽어가는 ‘연인’의 침대로 달려가 그가 눈을 감기 전에 겨우 순결한 입맞춤을 해줄 수 있었다. 19세기 낭만주의 문학가들은은 그토록 갈망했으나 이룰 수 없었던 사랑에 대한 찬미를 발견하며 그를 낭만적 신화로 만들었다.  

김광석은 사랑 노래를 많이 불렀다. 그 노래들은 가락과 가창 방식까지도 매우 다양하다. 그의 레퍼토리를 보면 사랑이라는 정원에 각양각색의 사랑꽃들을 심어놓은 것 같다. 그는 사랑의 열정과 이별의 아픔만 노래하지 않았다. 항상 절규하듯 부르지도 않았다. 이루지 못할 사랑을 또는 알지도 못할 사랑을 오히려 맑은 음성으로 노래하기도 한다.

말하지 못한 내 사랑은
음~ 어디쯤 있을까
소리 없이 내 맘 말해볼까
물어보지 못한 내 사랑은
음~ 어디쯤 있을까
때론 느껴 서러워지는데
[…]
가진 건 마음 하나로
난 한없이 서 있꼬
잠들지 않은 꿈 때문일까
지나치는 사람들 모두
바람 속에 서성이고
잠들지 않은 꿈 때문일까
비 맞은 채로 서성이는 마음의
날 불러주오 나지막이
내 노래는 허공에 퍼지고
내 노래는 끝나지만~

그는 지금 현전(눈앞)하는 어떤 대상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 “음~ 어디쯤 있을까”라는 후렴이 이를 잘 보여준다. 그는 가상의 대상과 사랑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느긋하게 “음~” 콧노래를 부르며 “어디쯤 있을까”하며 사랑놀이(로맨스)를 즐기고 있다. 김광석은 로맨스를 자기 삶에서 길어내 시와 노래로 승화할 줄 알았던 현대의 음유시인이었다. 

연애의 발명과 서사의 시작

음유시인들이 시도했던 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관한 '연애의 방식'이다. 이루어질 수 없을 뿐 아니라 이루어지지 말아야 할 사랑을 위해 상대를 연모했던 음유시인-기사들은 구애의 ‘과정' 그 자체가 목적이었다. 구애의 과정으로서 연애의 발명은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문학사적으로 보면, 음유시인들의 공헌은 사랑이 로맨스가 되게 했따는 데 있다. 스토리텔링이 로맨스의 본질이다.

모든 이야기가 그렇듯, 이야기가 시작되려면 상황이 필요하다. <내 사람이여>를 부를 때 김광석의 목소리는 잔잔하게 시작해 점점 클라이맥스에 이르고 대단원에서 잦아든다. 마치 이야기를 전하는 것 같다. 이들은 모두 구애의 과정을 위한 상황을 만들고 있는 것과 같다. 곧 사랑 이야기를 만들어가기 위한 준비다.

내가 너의 어둠을 밝혀줄 수 있다면
빛 하나 가진 작은 별이 되어도 좋겠네
너 가는 길마다 함께 다니며
너의 길을 비추겠네
[…]
눈물이 고운 너의 눈 속에
슬픈 춤으로 흔들리겠네
[…]
너의 새벽을 날아다니며
내 가진 시를 들려주겠네
[…]
그럴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네 삶의 끝자리를 지키고 싶네
내 사람이여 내 사람이여
너무 멀리 서 있는 내 사람이여

그의 다른 노래 <너에게>는 구애, 즉 사랑으로 초대하는 과정이 마치 동화를 들려주는 듯 하다. 이 노래는 김광석 솔로 앨범 1집의 첫 번째 트랙으로, 그의 음악세계로 사람들을 ‘초대'한다는 은유로 들을 수 있어서 흥미롭다. 삶과 사랑을 이야기로 풀어낼 줄 안다는 점에서 그는 음유시인답다. 

나의 하늘을 본 적이 있을 까
조각구름과 빛는 별들이
끝없이 펼쳐 있는 구석진 그 하늘 어디선가
내 노래는 널 부르고 있음을 
넌 알고 있는지

나의 정원을 본 적이 있을까
국화와 장미 예쁜 사루비아가 
끝없이 피어 있는 언제든 그 문은 열려 있고
그 향기는 널 부르고 있음을
넌 알고 있는지

나의 어릴 적 내 꿈만큼이나
아름다운 가을 하늘이랑
오호~ 네가 그것들과 손잡고
고요한 달빛으로 내게 오면
내 여린 맘으로 피워낸
나의 사랑을 너에게 꺾어줄게

사랑의 발견과 비극의 확인

사랑의 처음은 농담이고 마지막은 올바른 진지함이다.(이븐 하즘) 모든 것이 진지해지면 힘들어진다. 연애가 ‘사랑에 빠지기’의 단계에 이르면 비극이 딴지를 걸기 시작한다. 우리의 의지를 전적으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문제는 이유를 댈 수 없기 때문에,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의지의 차원에서도 비극적이지만 인식의 차원에서도 비극적이다. 

남녀 간의 사랑이 특별한 것은 반드시 ‘사랑에 빠지기’라는 단계를 거치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배타적이 된다. 서로에게만 아낌없이 주는 사이가 된다. 그러므로 그 사랑을 위해서는 가족을 떠날 수도 국경을 넘을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랑에 빠져 비극이 되는 현상의 대표적인 것이 결합을 원하는 상대가 분명히 있는, 그러나 화답받지 못하는 짝사랑이다. 김광석도 그런 사랑을 <외사랑>에서 노래했다. 

내 사랑 외로운 사랑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인가요
사랑의 노래를 불러보고 싶지만
마음 하나로는 안되나 봐요
공장의 하얀 불빛은
오늘도 그렇게 쓸쓸했지요
밤하늘에는 작은 별 하나가
내 마음같이 울고 있네요.
눈물 고인 내 눈 속에
별 하나가 깜박이네요
눈을 감으면 흘러내릴까 봐
눈 못 감는 내 사랑...

그는 이 노래를 부르기 전에 늘 “해서는 안 될 사랑은 없다”라고 말하곤 했다. “마음과 마음이 만나서 이루어지는, 이쁘고 아름다운 사랑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 노래를 부르고 다녔죠”라고 고백한다. 하지만 어느 날 책에서 “사람이 사람을 진실로 사랑한다는 것은 자아의 무게에 맞서는 것인 동시에 외적 사회 무게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기도 하다”라는 구절을 읽고 나서는 사랑에 동반되는 복합적인 갈등의 켜들이 주는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한다. “앞부분은 어떻게 스스로 견뎌나갈 수 있다고 생각되지만 뒷부분은 쉽게 되지 않죠. 암묵적으로 사람들이 만든 그런 틀이 있는 것이고 틀 안에서 살던 사람들이 그 틀을 벗어나기란 보통 힘든 게 아니죠”

김광석이 음유시인처럼 ‘사랑놀이’를 노래할 때와 ‘사랑의 발견자’로서 노래할 때는 그 톤이 분명 다르다. 이때 김광석의 노랫말은 이별을 주로 노래하는데, <사랑이라는 이유로>에서 “나의 눈물이 내 뒷모습으로 가득 고여도 / 나도 너를 떠날 수 없을 것만 같아”라고 노래할 때 그는 절규하지만 결코 애절함을 감추지 않는다. <너 하나뿐임을>에선 이 애절함이 “떠나지 마! 나를 사랑한다면 / 내 곁에 있어줘! / 사랑이여 / 우리가 처음 만날 때부터 느껴왔었던 / 알 수 없는 설레임들을 이제는 말할 거야 / 너 하나뿐임을" 강조하면서 점점 더 상승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김광석이 비극적 차원으로서 사랑을 발견하면서 부른 노래는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 아닐까? 류근 시인의 시에 직접 곡을 붙여 볼렀는데 언제 들어도 애틋하고 애처로운 그 느낌은 잔잔하면서도 격정적이어서 드라마틱하다.

그래 보내고 멀리 가을 새와 작별하듯
그대 떠나보내고 돌아와 술잔 앞에 앉으면
눈물 나누나
그대 보내고 아주 지는 별빛 바라볼 때
눈에 흘러내리는 못다 한 말들 그 아픈 사랑
지울 수 있을까

어느 하루 비라도 추억처럼
흩날리는 거리에서
쓸쓸한 사람 되어 고개 숙이면
그대 목소리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

이제 우리 다시는 사랑으로 
세상에 오지 말기
그립던 말들도 묻어버리기
못다 한 사랑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사랑의 진실에 가장 가까운 사랑을 사랑이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은 마음. 김광석은 그렇게 음유시인의 로맨스에서, 사랑에 빠진 사람의 아픈 경험을 거쳐, 이제 사랑을 부정하는 단계에 이른다. 사랑의 모순, 그 깊은 심연에서 이제 그는 사랑을 할 줄 알게 된 것이다.

비극 서사의 미학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을 통해 시인을 ‘모방기술자'라고 말한다. 역사가의 임무가 일어난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시인의 임무는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재구성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특히 비극적 서사가 설득력을 가지려면 이야기의 ‘필연성’과 사건의 ‘개연성’ 갖추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 삶의 비극의 필연적이라면 극적 구성에서도 이를 모방해야 한다는 것이다. 짐멜은 비극적인 것에서는 겉으로 우연인 듯 보이는 것이 내재적으로는 필연적이며, 희극적인 것에서는 겉으로는 필연적으로 보이는 것이 내재적으로는 우연적인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사랑에 빠지기’에서처럼 비극의 내재적 필연성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다고 비관적일 필요는 없다. 우리에게 진정한 삶의 형태는 인간조건의 비극성을 인정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비극성에 대한 인정은 의식이 깨어 있는 삶의 과정을 가능하게 한다. 인간존재는 비극적 모순과 좌절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고 초월하는 과정 속에서 드러난다. 이 과정에는 존재는 상실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고 결정적으로 감지된다. 비극은 단순히 슬프고 절망적인 사건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근원적이고 포괄적으로 파악하게 하는 암호인 것이다. 김광석이 <그날들>을 부를 때 그는 어쩔 수 없는 것들을 인정하고 떨쳐버리고자 소망한다. 

그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그대를 바라볼 수 있는 것만으로
그대의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느낄 수 있었던 그날들
잊어야 한다면 잊혀지면 좋겠어
부질없는 아픔과 이별할 수 있도록
잊어야 한다면 잊혀지면 좋겠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대를

<사랑했지만>을 부르면서는 삶의 비극성에 대한 인정의 가능성을 내비치고 나아가 체념의 문턱을 넘어서는 듯 하다. "어제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어 / 자욱하게 내려앉은 먼지 사이로 / 귓가에 은은하게 울려퍼지는 / 그대 음성 빗속으로 사라져버려.” 여기까지는 추억의 아련함이 있다. 하지만 "때론 눈물도 흐르겠지 그리움으로 / 때론 가슴도 저리겠지 외로움으로”라고 노래할 때 그는 삶의 조건을 인정하고 체념하려 한다. 그래서 그는 사랑했던 “그대 곁에 머물고 싶지만” 떠나겠다고 다짐한다. 체념은 삶의 조건에 대한 ‘어느 정도의 항복’과 ‘약간의 슬픔’과 ‘많은 깨달음’을 동반하는 마음가짐이다.

체념은 비극적 운명과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에서 미묘한 경험을 하는 것이다. 이 세가지 관계가 구성하는 세계에서 사는 것이 삶이다. 체념은 그 세계에서 자아를 찾는 일이며 그 자아의 눈으로 다시금 자기 정체와 세계를 둘러싼 요소를 바라보는 일이다. 삶과 사랑의 조건에 대한 인정과 체념의 시간을 거치면 사람들은 다시금 삶과 놀이를 할 줄 알게 된다. 음유시인처럼 사랑놀이를 다시 시작할 수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했지만>은 삶과 사랑을 노래한 김광석의 다른 곳들과 다의미적으로 이어지는 ‘고리’와 같은 역할을 하는 작품이다. 

사랑으로 자유롭게

김광석은 사랑에 빠진 연인들과 공감하며 노래하기도 했지만, <자유롭게>처럼 ‘사랑하기’의 의미를 노래하기도 했다. 사랑하기는 배타적 행동이 아니라 우정과 연대감의 표출이다. 관심, 이해, 존중, 헌신, 배려 등의 덕목을 포함한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서로만을 바라본다. 그러나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상대가 누구든 사랑의 눈길로 바라본다. 이는 우리 삶이 비극 서사로부터 자유를 얻는 길이기도 하다.

저마다 소중히 태어난 우리
우리는 모두 다 고귀한 존재
[…]
서로가 아끼며 보듬을 우리
따뜻한 눈으로 마주할 우리
사랑으로 자유롭게
사랑으로 자유롭게

사랑하기의 단계에서는 사랑으로 모두 자유롭게 될 수 있다. 나아가 넓은 마음과 열린 지평의 음유시인이 되어 모든 타자를 위해 <나의 노래>를 부를 수 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이에게
시와 노래는 애달픈 양식
아무도 뵈지 않는 암흑 속에서 
조그만 읊조림은 커다란 빛
나의 노래는 나의 힘 나의 노래는 나의 삶
[…]
나는 마시고 노래하리 나는 마시고 노래하리
[…]
나는 부르리 나의 노래를
나는 부르리 가난한 마음을
그러나 그대 모두 귀 기울이면
노래는 멀리멀리 날아가리
노래는 멀리멀리 날아가리

김광석이 ‘개인적 사랑에 빠짐’에서 ‘타인들을 향한 사랑하기’로 눈을 돌리는 것을 절묘하게 담고 있는 또 하나의 작품은 <슬픈 노래>이다. 김광석은 사랑의 비극을 직감하며 노래를 시작한다.

이룰 수 없는 이와 사랑에 빠졌을 때
너무나 사랑하여 이별을 예감할 때
아픔을 감추려고 허탈히 미소 지을 때
슬픈 노래를 불러요 슬픈 노래를

그러나 노래를 마치면서 그는 사랑의 회한에 어쩌지 못하는 연인이 아니라 차분하지만 놀라울 정도로 사랑의 시선을 더 넓고 깊은 곳으로 돌리는 존재가 된다. 

어린아이에게서 어른의 모습을 볼 때
[…]
노인의 주름 속에 인생을 바라볼 때
슬픈 노래를 불러요 슬픈 노래를 

그는 모든 타자의 아픔을 위해 슬퍼하고 시간이 남긴 상흔을 위로하고자 한다. 이때 ‘슬픈 노래’는 그 자신의 제목을 전복시키며 위안과 희망 그리고 기쁨의 길을 향한 지난한 출발을 예고한다. 슬픈 노래는 그 슬픔을 못 이겨서 노래 부르는 것 같지만 그 슬픔을 결국 노래는 이겨낸다.

Chapter 4 낭만가객과 예술 그리고 혁명

1991년에 나온 김광석 앨범 2집 첫곡으로 실린 노래가 <사랑했지만>이다. 이 곡은 김광석의 대표곡이자 그의 삶과 음악세계를 엿보는 데 중요한 열쇠다. 그를 이해하기 위한 생각의 화두가 될 수 있는 노래다.

어제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어
자욱하게 내려앉은 먼지 사이로
귓가에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그대 음성 빗속으로 사라져버려
때론 눈물도 흐르겠지, 그리움으로
때론 가슴도 저리겠지, 외로움으로
사랑했지만, 그대를 사랑했지만
그저 이렇게 멀리서 바라볼 뿐 다가설 수 없어
지친 그대 곁에 머물고 싶지만 떠날 수 밖에
그대를 사랑했지만

음유시인이자 ‘낭만가객’으로 불리기도 하는 김광석에게 낭만은 무엇을까? 그의 음악에서 낭만성은 어떤 것이었을까?

사랑은 제시간에 오지 않는다

<사랑했지만>은 김경호 등 국내외 여러 가수에 의해 리메이크 되었다. 이들 곡 해석을 비교해보면 흥미롭다. 누군가의 노래는 곱게 부르고 누군가의 노래는 처량하게 들린다. 그에 반해 김광석의 노래는 뭔가 모를 ‘기'가 느껴진다. 기가 살아 있는 슬픔이다. 다른 가수들 모두 “사랑했지만~”부분을 하이피치로 부른다. 그러나 모두 하이피치에서 김광석 같은 힘을 느낄 수 없다. 다른 가수의 하이피치는 퍼져 나가듯 한다. 곧 확산으로서의 하이피치다. 

김광석은 하이피치를 응집력으로 부른다. 확산이 아니라 응집이다. 그 응집력은 우리를 전율하게 만든다. 김광석의 목소리에는 핏기가 서려 있다. 그는 핏덩이를 입에 물고 노래하는 것 같다. 그가 한 움큼 삼켰다 내뱉듯 하는 소리는 핏덩이의 울음 그 자체다. 입안에서 공명하는 그 울음에 입도 크게 벌리지 못하고 소리를 낸다. 그 핏덩이에 혼신의 힘으로 영혼을 응집하는 소리, 그 소리는 목이 아니라 그의 온 몸에서 나온다. 

김광석은 <사랑했지만> 이 노래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시도하지도 않고 그저 멀리서 바라만 보는 수동적인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또 이런 다짐도 한다. “사랑은 늘 제시간에 오지 않습니다. 사실 제가 부르는 사랑 노래는 대부분 자의적입니다. ‘사랑했지만 떠날 수밖에… 사랑했지만 그저 멀리서 바라볼 뿐.’ 하지만 이젠 좀 더 용기를 내고 싶어집니다.” 그는 다짐하듯 말한다. <사랑했지만>을 작사 작곡한 한동준은 이 노래를 직접 부르려고 했지만 김광석에게 빼앗기다시피 양보했다고 한다. “야, 사랑이 앞으로 나가야지, 껴안아야지, 왜 다가설 수 없어?” 그가 한동준한테 한 말이다. 그럼에도 그는 이 노래를 굳이 자기가 부르려 했고 불렀다.

김광석의 음악세계는 서정적이고 감상적인 차원을 포용하면서도 자기만의 독특한 낭만성을 이루어 간다. 감상적인 것과 낭만적인 것은 서로 소통하면서도 갈등하는 사이이다. 감상주의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이다. 낭만주의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다. 이 점에서 서로 갈등한다. 낭만주의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다. 그것이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일탈과 도전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상주의자는 종종 자유를 담보 잡히면서까지 연민과 동정을 유발한다. 그래서 감상적인 것의 극단은 일으켜 세워줄 것을 기대하고 넘어지는 것이며 위안을 부르는 고뇌인 것이다. 반면 둘 사이를 이어주는 공통분모는 사랑이다. 그러나 사랑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둘 사이는 갈등한다. 감상주의는 자기 중심적이고 김광석이 표현했듯 ‘자의적’이다. 낭만은 상호적이거나 공동체적인 것에 좀 더 자신의 열정을 할애한다. 

일탈의 미학사

낭만을 보다 깊게 이해하기 위해 세 가지 차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학사적 차원, 낭만적 운동의 동기적 차원, 낭만적 성향의 결과적 차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낭만은 본디 미학적 개념이다. 미학사에서 낭만의 미학은 ‘조화의 미학’에 반기를 들면서 구체화했다. 고전적 조화의 미학은 척도, 비례, 대칭, 균형의 의미를 내포한다. 낭만적인 미는 이와 달리 강력한 감정과 열정의 미, 상상력의 미, 시적인 것, 서정적인 것의 미, 형식이나 규칙에 종속되지 않는 정신적이고 비정형적인 미다. 조화가 아니라 갈등이다. 고전적 미가 협의(형식적 의미)의 미라면 낭만적 미는 가장 광의의 미 개념이다. 

민중의 노래가 들리는가?

낭만의 미학이 고전적 조화의 미학에 반기를 들었듯 모든 낭만적 운동의 동기는 이미 기성화된 공식에 대한 반란이었다. 빅토르 위고는 “낭만주의는 문학과 예술에 있어서 자유주의”라고 말했다. 이를 통해 낭만주의가 종종 혁명적인 것과 병행하는 이유를 확인할 수 있다. 인간의 영혼이 자신을 낳은 사회에 대해 일으키는 반란이다. 우리 각자에게 내재하는 낭만적 열정이란 ‘틀 지워진 삶에 대한 저항’이다. 

<레미제라블>에는 기존 질서에 지독하게 충실한 자베르 형사가 등장한다. 그는 법과 정의의 화신이다. 그는 '범과 사회질서의 적'인 장 발장이 자신에게 천사같은 충격적 태도를 보이기 전까지는 그 소중한 법의 의미가 자신의 적뿐만 아니라 자신마저 법의 노예로 만든다는 사실을 도저히 인지할 수 없었다. 정의는 조화의 개념을 바탕으로 성립한다. 사회의 조화와 질서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본디 미학적 개념인 낭만은 정치 사회적 개념인 정의와 대립한다. 현대의 미학이 조화의 고전주의에 도전하듯이, 현대의 낭만은 전통적 법과 정의의 신념에 반성을 요구한다. <레미제라블>은 우리에게 공동체 삶의 필요조건으로서 정의에 대한 논쟁하는 것만큼이나 우리 삶에 해소될 수 없는 인간미로서의 낭만에 대해 이야기하라고 일러준다. 

낭만적 성향의 결과적 차원은 ‘다양성’에 귀결한다. 틀을 벗어나 무한히 확장해가는 과정 그 자체로서 다양성의 의미를 알아차릴 수 있게 한다. 무한과 다양성은 동어반복의 의미를 갖는다. 낭만주의는 차이의 인식, 즉 사물 및 예술의 다양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철학자 아서 러브조이는 낭만적 태토를 ‘다양론'이라 하고 이것을 고전주의자의 ‘균일론’과 대립 시켰다. 이처럼 낭만적 운동의 동기가 결과로 이어지는 과정은 낭만주의가 사회 대다수 사람들의 다양한 욕망을 예술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과정과 일치한다. 이것이 정치적 차원에 이르면 ‘민중의 의지’를 표출하는 것이 되며, 정의의 진실을 단호히 묻는 저항의 소리와 혁명으로 산화할 가능성이 된다. 

사랑, 망설임, 어색함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욕망과 감정에 대해 열려 있는 낭만주의의 이런 포용성은 감상주의적 경향 역시 수용한다. 낭만의 폭을 넓히면 종종 감상주의까지 포함한다. 특히나 사랑의 문제에서는 그렇다. 감상적이든 낭만적이든 그 원천은 사랑이다. 독일 낭만주의 문학을 이끌었던 프리드리히 슐레겔은 “감상적 소재를 환상적 형식으로 서술하는 것이야말로 낭만적”이라고 말했다. 빅토르 위고는 감상적인 것과 상투적인 것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을 버릴 게 아니라 어떻게 예술적으로 수용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레미제라블>이 낭만주의 문학에서 큰 자리를 차지했떤 것은 감상과 낭만의 소통과 갈들을 하나의 방대한 작품 안에 얼키설키 엮어 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작품에는 청춘 남녀의 풋푸산 사랑과 위대한 삶을 사는 인간의 숭엄함이 뒤얽혀 있다. 또한 개인의 차원에서도 연민의 정으로 가득하고 마음이 여려서 좀도둑이 된 감상적 범인凡人을 낭만적 영우으로 만드는 과정으로 문학적 서사를 완성해나갔다.

김광석도 사랑을 많이 노래했다. 그는 자신이 시와 음악세계 전체를 감상과 낭만이 씨줄과 날줄로 엮어보려 했던 것 같다. 그의 음악 레퍼토리가 감상적 사랑의 노래와 함께 <나의 노래>, <일어나>, <자유롭게>등 자유와 유토피아적 희망의 노래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는 낭만주의의 특징인 다양성의 추구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것 같다. 

그는 음악의 형식적 측면에서도 다양한 변화를 추구했다. 포크를 고집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요즘 들어 록적인 곡을 만들고 있죠. 포크록 얼터너티브, 슬라브, 컨트리 등등. 할말, 곡의 내용에 따라 장르는 어떤 것이든 수용할 겁니다.” 팬의 질문에 대한 그의 답이다. 그가 음악활동을 계속했다면 우리는 예술형식의 다양함을 추구하는 그의 낭만성을 더욱 깊고 넓게 경험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의 죽음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낭만적 욕구에 대한 호응의 다짐은 그의 유고집 여기저기에 담겨 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술안주는 어색함이라던 친구의 말처럼 / 내 삶 속에 남아 있는 모든 익숙함을 버리고 어색함이 필요하다. / 세상 모든 일을 새롭게 / 세상 모든 일들을 신비롭게 살아가는 법. / 내겐 어색함이 필요하다. / 익숙해진 것 쉬운 것은 나를 잃게 하고 규정짓는 것 / 구분하는 것은 주위를 잃게 한다.” 

그는 물론 어색하게, 새롭게, 신비롭게 살아간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잘 안다. 우리가 흔히 잊고 있는 것이지만, 실연 같은 커다란 상실감만이 아니라 일상의 크고 작은 생활의 요구와 갈등하는 가운데서 삶의 모순을 체감하며 감상적이 되는 경우가 많다. 김광석도 여기에서 예외가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어색함을 찾아야지 / 내 삶 속에 남아 있을 익숙함을 버리자”라고 다시금 다짐한다. 그는 ‘어색함’을 통상적인 의미가 아닌 ‘매우 새로운 것을 대하는 태도’라는 뜻으로 쓰고 있다. 불편함을 느낄 정도의 새로움까지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김광석의 새로운 예술적 창작에의 의지를 느낄 수 있다. 

그의 노괴는 노랫말과 창법에서 느껴지듯 단순히 사랑의 아픔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감상적 비애와 낭만적 욕구 사이의 갈등에 더욱 깊이 자리 한다. 그의 서정성(리리시즘)은 감상적인 것과 낭만적인 것 사이를 소요한다. 그리고 이 소요에는 방황하는 자의 유심有心이 묻어 있다. 방황은 새로운 출발을 위한 준비운동이다. 김광석은 자기 노래의 깊이가 방황의 깊이에서 비롯된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낭만적 영웅이 사랑에 빠졌을 때

김광석은 또 다른 차원에서도 ‘낭만적 고민’을 했던 것 같다. 이는 그가 가수로 데뷔할 때부터 따라다녔다. 당시 우리 나라의 시대적 상황 및 사회적 특성과 연관되어 있다. 

느낀 그대로를 말하고
생각한 그길로만 움직이며
그 누가 뭐라 해도 돌아보지 않으며
내가 가고픈 그곳으로만 가려 했지
그리 길지 않은 나의 인생을
혼자 남겨진 거라 생각하며
누군가 손 내밀며 함께 가자 하여도
내가 가고픈 그곳으로만 고집했지
그러나 너를 알게 된 후, 사랑하게 된 후부터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변해가네
나의 길을 가기보다 너와 머물고만 싶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변해가네
우 너무 쉽게 변해가네 우 너무 빨리 변해가네
우 너무 쉽게 변해가네 우 너무 빨리 변해가네
우 너무 쉽게 변해가네 우 너무 빨리 변해가네
우 너무 쉽게 변해가네 우 너무 빨리 변해가네

동물원 1집에 실렸떤 노래 <변하가네>는 박기영이 불렀고, 김광석은 이 노래를 '다시 부르기 2’에 실었다. 박기영이 부른 노래는 듣기 편하지만 김광석의 노래는 그렇지 않다.  당신을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되면서 모든 게 변해서 행복해진다는 노래로 들리지 않는다.  그는 “우~~”하며 '변화의 문제' 속으로 청자를 끌고 들어간다. 그는 “우 너무 쉽게 변해가네 / 우 너무 빨리 변해가네.” 이 후렴을 끝내지 않을 것만 같이 여러번 반복한다. ‘너에 대한 사랑’이 아닌 ‘모든 것이 변해가는 것’에 방점이 있다. 

이 노래는 ‘사랑에 빠진 낭만적 영웅’의 이야기라는 게 내 생각이다. 바꿔 말하면 낭만적 영웅이 이성과의 사랑을 알게 된 후 부르는 노래라는 말이다. 김광석이 1982년 대학에 입학하고, 대학연합동아리에 가입하면서 이른바 ‘민중가요’를 부르고, 1984년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집에 참여한 때는 군사독재 정권 아래 민주화운동이 거세게 일던 시기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에선 당연히 ‘참여 작가’ 또는 ‘참여 예술인’이 삶의 의미이자 의무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깨달았다고 직접 뛰어들어 사회운동가가 되기에 그의 감성은 너무 여리고 자유로웠다. 끝없이 자유를 추구하는 그의 음악가적 기질에 대해 사회의 이데올로기는 또 다른 제약으로 다가왔다. 사회현상을 인식하면 할수록 그는 적극적으로 저항하기보다 자괴감에 빠졌다. 

구자형은 1989년 김광석이 솔로 1집을 발표한 후 김광석과 만나 나눈 이야기를 전한다. 그때 김광석은 자기가 민중가요집단 ‘새벽’의 멤버였다는 것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형, 내가 ‘새벽’에 있었고, ‘노찾사’ 2집에서 <광야에서>와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를 부르기로 돼 있었는데, 난 아무래도 민중가요만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이유는…” 그 이유는 개인의 삶과 사랑을 찾을 것인가 사회참여를 추구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었고 그는 그 안에서 고뇌하고 아파했다. 구자형은 말한다. “민중가수는 미래의 역사 속으로 대중가수는 사랑의 역사 속으로 자신을 투신해야만 하는 것이다. 사랑은 결코 일부만 줄 수 없다. 그것은 완전한 것, 온전한 것, 전부 다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민중가수인가 대중가수인가 하는 이분법적 구별을 전제로 한 사회의 요구는 예술인을 힘들게 한다. 김광석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김광석은 행동양식에 변화를 요구하는 노래의 힘에 회의적이었다. 자신의 노래에 그만한 힘이 있다고 여기지 않았다. 단지 생각할 거리를 주고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면 그 역할을 다한 것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김광석은 굳이 민중가요와 대중가요를 구분하려고 하지 않았다. 한때 대중성과 의미 있는 노래 사이에서 방황했지만, 3집에 들어 그는 방황을 끝내고 삶의 이야기를 자신의 노래로 받아들였다. 좋은 음악은 좋은 음악으로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에게 좋은 노래란 사는 이야기, 평범하고 솔직한 이야기였다.

세상을 바꾸기 위한 사회참여든 예술가로서의 성공을 향한 길이든 자유 없이는 불가능하다. 인생의 로망, 소설 같은 삶을 사는 낭만적 영웅에게 자유는 의미 충만한 삶의 수단이자 목표이다. 그러나 이런 영웅도 사랑에 빠지면 행복함을 느끼면서도 자유의 훼손을 괴로워한다. 행복이 자유를 담보로 잡을 수 있다는 사실에. “그리 길지 않은 나의 인생을 / 혼자 남겨진 거라 생각하며.” 이건 영웅적 결연함의 전형이다. “그 누가 뭐라 해도 돌아보지 않으며 / 내가 가고픈 그곳으로만 가려 했지.” 낭만적 열정 없이 이런 다짐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너를 알게 된 후 / 사랑하게 된 후 부터 …. 모든 것이 변해가네.” 사랑은 블랙홀이다. 이건 낭만적 영웅의 비극적 순간이다. 정황을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변해가는 것의 진실을 붙잡기 위해서라도 후렴을 끝없이 되뇔 수밖에 없다. 노래하지 않을 수 없다.

노래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때가 있고, 노래가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절망할 때가 있다. 그리고 노래가 언젠가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깨닫는 온건적이고 점진적인 진보주의자가 될 때가 있다. <변해가네>는 혁명가가 사랑을 알게 된 그 이야기다. 결국 물거품이 되고야 말 한 시대를 살 것인가? 아니면 영원한 사랑을 위해서 살것인가? 김광석은 그것이 고민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 노래를 속으로 얼마나 아프게 불렀겠는가. 마치 살점을 도려내듯, 내장을 토해내듯 노래한다고 느껴지는 것은 그래서 과장이 아닌 것이다. 

그래도 낭만을 위하여

혹자는 예술이 있고 혁명이 있는 것이지, 혁명이 있고 예술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혁명을 위한 예술은 이미 예술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술이 혁명을 일으킬 수는 있다. 그러나 혁명을 목표로 창작을 한다면, 예술의 자기훼손을 각오해야 한다. 빅토르 위고는 사회 정치적 차원에서 참여적 행동이 함께했다. 그러나 당시 사회뿐만 아니라 후대에까지 한 최고의 공헌은 장 발장이라는 불명의 낭만적 영웅을 창조해냈다는 것이다. 낭만주의의 혁명성은 무엇보다도 그의 작품 속에서 살아 움직였다. 

김광석은 섣부른 참여를 거부했고, 자신을 통째로 투척할 수 있는 온전한 삶의 방식을 찾았다. 김광석은 참여의 방식을 ‘예술의 완성’을 위해 진지하고 치열하게 사는 것에 두었음이 분명하다. 이 지난한 예술의 완성을 향한 길을 위해 그는 아파했다. 그래서 그의 노래에는 핏기가 서려 있다. 김광석은 <사랑했지만>을 부를 때나, 이른바 민중가요라는 <광야에서>, <타는 목마름으로>를 부를 때나 동일하게 핏덩이를 입에 물고 노래한다. 사랑타령 같은 노랫말과 곡조를 피울음으로 부르는 가객을 우리는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까. 가사는 감상적 사랑을 담고 있지만 가창은 낭만적 숭고를 응집한다. 개인적 감상을 보편적 감동의 숭고함으로 비상시키는 것, 감상과 낭만의 갈등을 포옹으로 승화하는 것, 여기에 김광석의 낭만성이 있다. 

그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그대를 바라볼 수 있는 것만으로
그대의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느낄 수 있었던 그날들

그대는 기억조차 못하겠지만
이렇듯 소식조차 알 수 없지만
그대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흐르곤 했었던 그날들

잊어야 한다면 잊혀지면 좋겠어
부질없는 아픔과 이별할 수 있도록
잊어야 한다면 잊혀지면 좋겠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대를
[…]

그렇듯 사랑했떤 것만으로
그렇듯 아파해야 했던 것만으로
그 추억 속에서 침묵해야만 하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날들

노래의 두 기둥과도 같은 노랫말 “그대를”과 “그날들”을 부를 때 목의 모든 혈관으로부터 분출하는 핏줄기를 입안 가득 받아 핏덩이로 응축해 소리를 싣는다. 그의 고개가 위로 향해 젖혀지는 순간 그 노래는 ‘그대’를 지상에서 천상으로까지 밀고 간다. 이제 ‘그대’는 이 땅에서 만난 그 누구가 아니라 천상에 있는 그 누구이다. “그대의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 그대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그날들’의 환희와 비애가 교차한다. 사랑 이야기가 종교적 숭고를 획득하는 순간이다. 

Chapter 5 지금 여기 있고도 없는 ‘물구나무선 세상'

그의 노래는 천진하게 들어야 한다. 그러면 '물구나무선 세상'을 경쾌히 노래한 <두바퀴로 가는 자동차>의 말하지 않고 감추지도 않고 보내는 신호도 포착해서 흥미롭게 바라볼 수 있다. 

남자처럼 머리 깎은 여자 여자처럼 머리 긴 남자
가방 없이 학교 가는 아이 비 오는 날 신문 파는 애
복잡하고 아리송한 세상 위로 오늘도 애드벌룬 떠 있건만
태공에게 잡혀 온 참새만이 긴 숨을 내쉰다

한여름에 털장갑 장수 한겨울에 수영복 장수
번개 소리에 기절하는 남자 천둥소리에 하품하는 여자
복잡하고 아리송한 세상 위로 오늘도 애드벌룬 떠 있건만
독사에게 잡혀 온 땅꾼만이 긴 혀를 내두른다

“사실 상식적이 아닌 것이 상식화되어가는 그런 모습이 많습니다. 주변에.. 오늘 뭐 또 비상식적인 일이 벌어졌더라고요.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고..”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날 그는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가 이러한 상황을 빗댄 것처럼 애매모호한 표정으로 묘한 웃음을 짓고는 노래를 시작한다. 미소 지으며 시작하고 처진 청중의 기분을 쾌활하게 살려준다는 의도로 마치 아이들이 동요를 부르듯 노래한다. 그런데 수백 명이 압사한 대형 참사 앞에서 김광석의 태도는 이해하기 힘든 구석이 있다. 그가 한 말도 그렇고 상황에 걸맞지 않게 흘리는 웃음도 그렇다. 

동요童謠의 꿈

구자형은 김광석이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그의 노래를 ‘슬픔의 노래’라 여겼으나, 그를 보낸 후 ‘아픔의 노래’로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김광석은 아플 때 오히려 미소 짓고 웃으며 농을 걸고 노래했던 것이다. 그가 부르는 노래의 노랫말만 전복적인 것이 아니라, 가객으로서 세상과 사람을 대하는 그의 자세 또한 종종 전복적이었다. 비상식이 상식의 부정이라면, ‘네 바퀴로 제대로 가는 자동차는 상식이며, 네 바퀴로 제대로 가지 못하는 자동차가 비상식이다. 삼풍백화점은 무너져서는 안되는 상식적인 건물이었다. 그런데 비상식적으로 무너졌다. 그래서 현실은 참담해지고 사람들은 다른 세상을 꿈꾸고 갈망한다. 김광석이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를 심각한 주변 상황에도 불구하고 마치 아이들이 동요를 부르듯 노래한 것은 참담한 현실을 동화적 유희의 정신으로 극복하고자 한 것이다. 모든 게 아프니까. 그저 즐겁게 놀고 장난치고 노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현실을 극복하고 더 나은 삶을 위해 나아가는 꿈은 유희적으로 창조된다. 우리는 꿈을 심각하게 꿀 수 없다. 그렇게 꾸자고 하면 악몽이 되리라. 김광석은 사랑 노래에서도 동화적 상상을 살려 유희하듯 노래한다. ‘너에게’ 자신의 꿈을 살짝 보여주며 마음을 떠본다. 그 꿈은 "조각구름과 빛나는 별들이 끝없이 펼쳐 있는 하늘”과 “국화와 장미, 예쁜 사루비아가 끝없이 피어 있는” 정원으로 은유된다. 꿈의 정원은 네게 언제나 열려 있고 그곳의 향기는 너를 부르고 있다. 그러고는 마치 소꿉장난하는 아이처럼 네가 내 꿈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면 소박하지만 진솔한 보상이 있음을 넌지시 전한다. “나의 어릴 적 내 꿈만큼이나 / 아름다운 가을 하늘이랑 / 오호~ 네가 그것들과 손잡고 / 고요한 달빛으로 내게 오면 / 내 여린 맘으로 피워낸 / 나의 사랑을 너에게 꺾어줄게.” 꿈을 진솔하게 나누는 일, 그것은 갈망의 유토피아에 놀이처럼 깔려 있는 유희적 본질이다. 

희망의 가면무도회

김광석의 레퍼토리는 감상적 사랑의 노래와 함께 자유와 유토피아적 희망의 노래들로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 이는 개인의 이해관계와 공동체적 관심 사이의 소통과 화합을 의미한다. 이것은 사랑의 차원에서도 ‘개인적 사랑에 빠짐’에서 ‘타인을 위한 사랑하기’로 눈을 돌리는 과정이다. 사랑 노래를 부를 때 그는 사랑의 회한에 어쩌지 못하는 연인에 머무는 게 아니라 차분히 사랑의 시선을 더 넓고 깊은 곳으로 돌리는 존재가 된다. 즉 그는 자신의 아픔만이 아니라 모든 타자의 아픔을 위해 슬퍼하고, 냉혹한 시간이 우리 삶에 남긴 상흔을 위로하고자 한다. 김광석이 1980년대 불렀던 노래 가운데 김지하 시인의 시를 노랫말로 한 <녹두꽃>이 있다. <녹두꽃>은 사회참여 의식이 강하게 배어 있는 노래다.

빈 손 가득히 움켜쥔 햇살에 살아
벽에도 쇠창살에도 노을로 불게 살아
타네 불타네 깊은 밤 넋속의 깊고 깊은
상처에 살아 모질수록 매질 아래

날이 갈수록 흡뜨는 거역의 눈동자에
핏발로 살아 열쇠소리 사라져버린 밤 끝없고

끝없이 혀는 잘리어 굳고 굳은 벽속에
마지막 통곡응로 살아 타네 불타네
녹두꽃이 타네 별푸른 시구문 아래 목베어
횃불 아래 횃불이여 그슬려라 하늘을 온 세상을

번득이는 총검 아래 비웃음 아래
너희 나를 육시토록 끝끝내 살아

이 저항의 시가 김광석의 잔잔하면서도 호소력 깊은 목소리에 실리면 저항을 넘어 희망을 부르는 노래가 된다. 그의 노래는 분노의 기운이 서린 저항의 얼굴에 ‘희망의 가면’을 씌우는 마력이 있다. 희망은 우리가 앞에 내세우는 의지의 표현이다. 우리의 본모습에는 저항도 있고 망설임도 있으며, 무엇보다 절망도 있다. 희망이 소중한 것은 이 모든 것의 앞에 내세울 수 있는 의지의 가면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희망은 참 묘한 것이다. 희망은 판도라 사장의 마지막에 마지막 까지 남아 있던 것이고, 마지막으로 세상에 나와서 묘한 매력을 발휘하는 미워할 수 없는 심술의 요정이다. 희망은 그 자체의 힘보다 ‘부정하는 힘’으로 작용할 때 그 진가를 발휘한다. 절망을 없애지는 못하지만 절망이 삶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부정하며 우리의 삶을 감싸기 때문이다. 카사노바는 “고통은 인간본성에 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 없이 괴로워하지는 않는다.”라고 말했다. 김광석은 희망을 노래하지만 우리의 삶이 일상에서 수많은 절망과 좌절을 겪는다는 것을 잘 안다. 

그는 <Little Hero>에서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 타오르는 태양을 보라 / 힘겨웠던 지난날들의 아름다운 꿈들을 펴라 / 수많은 사람들의 함성과 환호 속에서 / 하늘에 날아오른 우리들의 하얀 꿈”을 외친다. 직접 작사 작곡한 <바람이 불어오는 곳>에서는 희망의 진실을 더 담담하게 노래한다. 그는 불안한 행복을 말하고, '힘겨운 날들'과 '새로운 꿈'을 함께 이야기한다.

설레임과 두려움으로 불안한 행복이지만
우리가 느끼며 바라볼 하늘과 사람들
힘겨운 날들도 있지만 새로운 꿈들을 위해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가네

일상적 암호 ‘NOWHERE'

토머스 모어가 만든 ‘유토피아’라는 말은 '없는 장소u-topia’라는 의미다. 영어로는 ‘no-where’이다. 이 말을 달리 띄어 쓰면 ‘지금 여기 now-here’가 된다. 어디에도 없지만 바로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라는 모순. 사랑을 위한 개인의 갈망이나 이상적 정치 사회 공동체를 위한 염원이나 모두 태생적으로 양면성을 갖고 있다.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의 복잡하고 아리송한 의미도 이 태생적 양면성을 품고 있음에 다름 아니다. 

Chapter 6 바람 속으로 떠난 노래의 영혼

바람이 우리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은 모습이 없기 때문이다. 무형인 것이 온갖 기운을 다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바람이 매력적인 것은 타자의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바람이 연출하는 타자의 모습에 우리 마음은 동요한다. 깃발이 펄럭이는 것은 깃발의 의지가 아니라 바람의 의지 때문이다. 바람에 일렁이는 것은 나뭇잎만도 아니고 파도만도 아니며 깃발만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마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자신이 바람이고 싶어한다. 가객 김광석에게도 바람은 각별한 존재였으며,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를 전해주는 메신저였다. 나아가 '바람의 존재'를 의식하는 순간 그것이 곧 ‘존재의 바람’임을 깨닫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데뷔 시절에는 “바람이 불면” 삶에 대한 자성의 시간을 갖기 희망했고, 자신의 음악이 한창 무르익어갈 대 세상과 작별하면서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긴 여행을 떠났는지 모른다. 

바람의 존재

바람은 여러 문명권에서 우주의 기본 요소 중에 하나라고 믿었는데, 흥미로운 것은 공기가 종종 ‘초자연적’ 요소로 여겨졌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뭔가 영적인 존재로 여겨지기도 했다. 영적인 것은 의식에 자극을 주고 소통을 유발한다. 노랫말에 ‘바람’이 들어가는 경우는 많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과 행위를 바람에 비유할 때 주로 쓴다. 그러나 김광석이 사랑 노래에서 바람을 은유할 때는 사랑의 열정이 아니라 그 열정으로부터 ‘자의식'을 찾을 때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에서 그 점을 엿볼 수 있다. 첫 소절부터 그는 애절하게 노래한다. “그대 보내고 멀리 가을새와 작별하듯 / 그대 떠나보내고 돌아와 / 술잔 앞에 앉으면 눈물 나누나.” 그 이별한 아픈 사랑은 도저히 지워지지 않을 듯 하다. 그러나 이 비극의 극단에서 그는 이 사랑을 비추는 거울을 발견한다. “어느 하루 바람이 젖은 어깨 스치며 지나가고 / 내 지친 시간들이 창에 어리면 그대 미워져.” 그러고는 이상의 이면을 깨닫는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바람은 어느 하루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을 뿐이건만 그의 의식은 삶의 거울에서 또 다른 차원을 포착한 것이다. 그가 후렴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여러 번 되풀이해서 노래할 때, 그의 목소리는 앞 소절들을 부를 때처럼 삶의 진액을 짜내듯 애절하지 않다. 삶의 굴렁쇠를 굴리며 고개를 넘어가듯 점점 담담해진다.
 
<거리에서>도 이와 유사한 바람의 은유를 찾아볼 수 있다. 이 노래는 사랑의 상실감이 깊게 밴 노래다. 하지만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쓸쓸함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하는 감동을 느끼게 된다. 바람이란 단어는 한 번 나오지만 지나간 모든 것을 꿈결같이 만들어버린다. “거리에 짙은 어둠이 낙엽처럼 쌓이고 / 차가운 바람만이 나의 곁을 스치면 / 왠지 모든 것이 꿈결 같아요.” 바람은 스쳐 지나는 것일 뿐이지만 내 의식에 의미 있는 흔적을 남긴다. 이제 사랑의 상처는 아물어갈 것이다. 우리 삶에서 바람의 존재가 보여주는 이 모든 것의 바탕에는 바람의 상징적 본질, ‘자유’가 깔려 있다. 자유로울 때 자의식을 획득하고 자유로운 자가 절제할 줄 안다. 김광석에게 바람이 소중했던 것도 이 자유의 상징 때문이었다. 그가 직접 작사 작곡한 <자유롭게>를 김광석은 자유롭게 노래한다. 

하늘에 떠가는 구름들과 같이 바람은 자유롭지
꽃잎 위의 맺힌 이슬방울처럼 때묻음 없이
타오르는 태양 은은히 비추는 달빛과 같이
 저마다 소중히 태어난 우리
우리는 모두 다 고귀한 존재
자유롭게 자유롭게
바람처럼 자유롭게
열린 마음으로 그저 바라봐 너
너너너 너너 너너너 너

존재의 바람

자유의 바람. 그렇기에 김광석은 한대수가 작사 작곡한 <바람과 나>를 불러야 했다. 김광석은 한대수의 노래를 우리나라 포크 음악 계보이 첫자리에 두었다. 여러 추측이 있지만 그는 무엇보다 한대수의 바람 같이 자유로운 모습과 노래를 좋아했던 듯 하다. 

끝 끝없는 바람
저 험한 산 위로 나뭇잎 사이 불어가는
아 자유의 바람
저 언덕 너머 물결같이 춤추던 님
무명무실 무감한 님
나도 님과 같은 인생을
지녀볼래 지녀볼래

물결 건너편에
황혼에 젖은 산 끝보다도 아름다운
아 나의 님 바람
뭇 느낌 없이 진행하는 시간 따라
하늘 위로 구름 따라 무목 여행하는 그대여
인생은 나 인생은 나
인생은 나 인생은 나

“끝, 끝없는 바람/ 저 험한 산 위로 나뭇잎 사이 불어가는 / 아, 자유의 바람.” 끝없음은 자유의 본질적 속성이다. 제한이 없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그다음에 이어지는 “무명무실 무감한 님”도 “무목 여행 하는 그대”도 자유의 의미를 담고 있다. “나의 님 바람”은 자유의 바람이지만 또한 존재하는 모든 것이 살아가는 의미를 전하는 ‘존재의 바람’이다. 바람과 존재의식의 관계는 김광석에게도 데뷔 초기부터 노래 속에 잠재하는 문제였다.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에서 바람이 일깨우는 일상의 의식을 노래했다. “바람이 불면 음~ / 나를 유혹하는 안일한 만족이 떨쳐질까 / 바람이 불면 음~ / 내가 알고 있는 허위의 길들이 잊혀질까.”

의미의 근원, 저 바람 속으로

바람이 우리의 의식을 건드려 존재의 의미를 전하는 매체라면 그 의미를 온전히 체득하고 체화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직접 작사 작곡하고 죽기 1년여 전에 발표한 곡, <바람이 불어오는 곳>은 말하고 있다. “바람에 내 몸 맡기고 그곳으로 가네” 바람이 가리키는 곳으로, 바람이 일깨워준 곳으로, 바람과 함께 가고자 한다. 그의 노랫말은 매우 상징적이지만, 결국 존재에 의미가 있다면 그 의미의 근원으로 가야 한다는 단호한 의지를 표현한다. 

그러나 이 길은 힘든 길이다. 김광석의 고뇌는 이제 진지함과 심각성을 동반한다. 김광석은 바람을 기다리는 나무가 아니라 그 바람과 하나가 되고 싶어했던 것 같다. 그러나 바람을 향해 떠나간 김광석 또한 이미 반쯤은 바람이 되어 있었던 것 아닐까. 그래서인지 홀가분한 이 노래의 인트로는 타악기의 리듬과 함께 덜컹이는 기차를 연상케 하면서도 어딘가 낯선 불안이 스며 있다. 고양된 의식이 주는 필연적 낯선 불안감 때문일 것이다. 같은 4집 앨범에 실린 <끊어진 길>를 <바람이 불어오는 곳>과 같은 선상에서 듣고 의미를 새겨보자.

높푸른 하늘 희고운 구름
먼 산허리 휘돌아 흐르는 강물
아무 말 없어도 이젠 알 수 있지
저 부는 바람이 어디서 오는지
그 길 끊어진 너머로 
손짓하며 부르네 음~

[…]
내 깊은 잠 깨우니 나도 따라가려네
그 길 끊어진 너머로 나는 가려네 음~

가객은 “바람이 어디서 오는지” 이젠 알 수 있다고 노래한다. 그곳은 ‘끊어진 길’ 너머에 있으며, 바람은 그곳으로 오라고 손짓하며 부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행로를 막는 장애를 극복하며 그곳으로 가고자 한다. 존재의 의미를 전하는 바람이 “내 깊은 잠 깨우니” 나도 따라가려 한다. 그러면서 단호하게 반복한다. “그 끊어진 길 너머로 나는 가려네."

김광석은 이 노래를 맑은 고음으로 부르지만 그 특유의 내지르는 창법을 쓰지 않고 매우 차분하게 부른다. 두 소절마다 마지막 연은 허밍으로 마무리하며 의지 실행의 보람과 즐거움을 표현하기도 한다. 이제 왜 김광석이 정호승 시인의 <부치지 않은 편지>에 곡을 붙이고 죽기 직전 그것을 녹음했는지도 이와 연관하여 이해할 것 같다. “시대의 새벽길 홀로 걷다가 / 사랑과 죽음이 자유를 만나 / 언 강~ 바람 속으로 무덤도 없이 / 세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 / 꽃잎처럼 흘러 흘러 그대 잘 가라/“ 이 소절은 ‘그대’에게가 아니라 그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그는 바람 속으로, 모든 의미의 근원으로 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자유의 바람’을 좋아했다. 그래서 바람처럼 자유롭기를 바랐다. 그러면서도 바람이 일깨운 의식으로 삶과 존재의 의미를 보았고, 일상적 삶의 고뇌 속에서도 이를 향한 예술적 철학적 의지를 잊지 않았으며 그것을 음악에 담으려 했다.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나무를 나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무가 나무이기 위해서는 흔들려야 한다. 이는 생각하는 갈대인 사람에게도 마찬가지 이다. 흔들리지 않는 갈대에 사색이 깃들겠는가. 김광석의 감수성은 이 의미를 미리 포착하고 있었던 것 같다. 

Chapter 7 ‘다시 부르기’와 철학하기

김광석은 ‘다시 부르기’라는 새로운 음악장르를 창조했다. 우리 가요의 역사에 굵은 획으로 남은 ‘다시 부르기 1’과 ‘다시 부르기 2’ 음반이 그것이다. 

‘다시’ 부르기

김광석은 라이브 공연 1000회라는 기록까지 세우며 노래 ‘부르는' 일을 천직으로 알고 살았던 사람이다. 그러므로 ‘다시 부르기’에서 그에게 각별한 단어는 ‘다시’라는 부사이다. 아주 평번하고 일상어인 이 부사가 김광석에게는 매우 철학적인 의미를 지닌 단어였다. 그 단어의 의미와 그에 따른 실천이 진실한 삶을 영위하도록 해주었기 때문이다. 유고집에 그는 고백하듯 “불러왔던 노래들을 다시 부르며 노래의 참뜻을 생각하니 또 한 번 부끄럽습니다.” 라고 남겼다.

철학사의 큰 산맥이라고 할 수 있는 칸트는 철학과 철학하기를 구분해 이성의 역할로 철학하기를 강조했는데, 여기서 철학하기란 ‘이성을 활용해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뜻한다. 칸트는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철학 그 자체가 아니라 오로지 ‘철학하기’라고 말한다. 김광석에게 다시 부르기는 ‘참뜻’을 생각하고 찾아가는 일이다. 이는 노래의 참뜻일 뿐 아니라, 세상의 참뜻이다. 삶의 참뜻, 사랑의 참뜻, 사람됨의 참뜻이다. 참뜻을 찾아가는 것, 그에게 '다시 부르기'는 다름 아닌 ‘철학하기’인 것이다.

칸트가 <실천이성 비판>의 결론 부분에 남긴 유명한 문장이 있다. “그에 대해 자주 그리고 지속해서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더 새롭고 점점 더 커가는 경탄과 외경으로 마음을 가득 채우는 두 가지 것이 있다. 그것은 내 위에 있는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에 있는 도덕 법칙이다.” 그렇다. ‘자주 그리고 지속해서 깊이 생각하는 것’, 즉 철학하기가 없으면 우리는 고귀한 것을 발견할 수 없다. 김광석은 뛰어난 감수성과 깊은 사색의 습관이 있었기에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는 시와 노래를 골라내고 자신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표현할 수 있었다. ‘다시’ 무엇을 한다 함은 기존의 것을 단순 반복하는 게 아니라, 그 본질의 ‘탐구'를 통해 거듭 새롭게 태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김광석은 철학하기의 탐구 정신과 재창조의 탁월한 능력을 지닌 아주 독특한 싱어송라이터였다. 

의미의 새로움으로

‘다시’라는 부사에는 ‘거듭’이라는 뜻에 ‘새로움’이라는 의미가 잠재해 있다. '탐구 행위'는 기존의 지식을 확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발견, 앎 그리고 깨우침을 추구한다. 예술에서도 탐구 행위는 기존의 형식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미적 형식을 창조하고 재창조하는 과정과 그것의 표현이다. 과거의 것에서 무엇인가를 찾아내는 일은 현재의 사람에게 새로운 의미를 준다. 숨겨졌던 노래들을 발굴한다는 것 자체도 새로운 것을 창출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새로움은 앞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뒤에도 있다. 새로움은 다양성에 기여한다. 물론 신곡을 발표하는 것도 다양성에 기여한다.

김광석의 다시 부르기를 통해 ‘의미의 새로움’을 창출해냈다. ‘다시 부르기’와 연관하여 김광석에게 쏟아지는 찬사는 모두 그가 남의 노래를 완혁하게 자기 노래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물론 김광석이 다른 작곡가의 노래도 모두 자작곡처럼 들리게 만든 능력은 김광석의 특별한 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1장에서도 말했듯 김광석이 진짜 뛰어난 점은 남의 노래가 ‘우리의 노래’가 되게 했다는 데 있다. 김광석를 통해 노래의 의미는 새롭게 살아나고, 우리는 그 노래 안에서 삶의 보편적 감동과 의미를 느끼는 것이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변화에 대한 갈망은 늘 그를 움직였다. 새로움을 추구하면 변화는 일어나기 마련이다. 또한 변화의 결과가 새로움이기도 하다. 이렇듯 새로움과 변화는 서로 맞물리는 개념이다. 김광석도 이 점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음악을 통해 제가 항상 꿈꾸는 것은 변화에 대한 갈망입니다. 팬들과도 항상 새롭게 만나고 싶고 노래에서도 매일매일 새로움이 묻어나길 바랍니다. 그러나 새로움의 열망, 밑바닥에는 항상 변하지 않는 나만의 목소리, 색깔이 남아서 빛나고 있길 동시에 꿈꿉니다. 변화를 꿈꾸는 것과 변하지 않고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씨를 간직하고 싶다는 열망은 이율배반적인 듯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서로가 서로를 보완해주는 공생공존의 관계에 있다는 게 저의 믿음입니다. 보다 본질적인 변화를 위해서는 그 본질의 빛이 더욱 밝게 빛나고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변화는 변하지 않는 것이 중심을 잃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 더욱 가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로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김광석이 ‘불변’을 논하고 있다는 점이다. 불변의 가능성을 추구하고 논하는 것은 인류 역사에서 철학뿐 아니라 자연과학의 발달을 가능하게 한 직접적 이유였다. 이는 철학사와 과학사를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쉬운 예를 들어보면, 사과가 떨어지는 것은 변화이다. 그 가시적 변화 현상을 통해 발견한 것이 비가시적 불변의 원리인 만유인력의 법칙이다.

이 세상을 불변의 존재로 인식할 것인지 아니면 끊임없는 변화의 연속으로 볼 것인지는 고대로부터 대립해온 두 입장이었다.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내지 않으면 장강은 존재할 수 없다. 세대는 끊임없이 변해도 인간존재는 그대로이다. 세대와 물결의 단절 없는 변화가 인간과 강을 변함없이 존재하게 한다. 지속적 변화는 변함없는 존재를 위해 봉사하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김광석은 자기 콘서트의 백밴드 멤버 이민영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민영아, 벽난로 불은 항상 같은 불인데 똑같은 모습이 한 번도 없다. 파도도 그래.” 이민명은 그 말을 왠지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늘 변함없지만 늘 변화하는 불길과 파도 같은 음악과 노래, 그것이 김광석 음악인 셈이다. 김광석은 불꽃의 심연, 파도의 심연을 보고자 했다. 우리는 ‘다시 부르기’라는 다양한 변화의 불길 그 중심에서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 가객을 본다.

다시 더 한 번, 마지막처럼 부르기

‘다시’라는 말에는 종종 ‘한 번 더’라는 뜻이 함께한다. 그래서 우리말에서는 ‘다시 더 한 번’이라는 표현이 ‘다시’와 ‘한 번’을 연계하면서 의미 전달의 강도와 효과를 높여준다. 김소월의 시 <가는 길>은 이 표현을 아주 절묘하게 사용한다.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 번” 여기서 ‘다시 더 한 번’은 모순의 절대성을 보여준다. ‘다시’는 반복의 뜻을 지니므로 계속됨의 표현이지만, ‘한 번’은 그 지속적 욕구에 고통스럽게 스스로 한계를 씌우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두 사이에 있는 ‘더’는 양 축을 이어주는 모순의 고리이다. ‘더’는 ‘다시’에 의해 첨가되지만 ‘한 번’에 의해 차단된다. 이와 비슷한 표현은 영어 ‘once again’과 ‘once more’, 프상스어 ‘앙코르 윈느 누아 encore uno fois’, 독일어 ‘노흐 아인말 noch einmal’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문화권에 차이 없이 뭔가를 다시 할 때는 ‘한 번만 더’ 하는 것으로 끝낼 것처럼, 곧 마지막 기회인 것처럼 하려는 의지를 보인다는 뜻이다. 그래서 ‘다시 부르기’는 모두 ‘마지막으로 부르기’인 것이다. 그에게 모든 라이브 공연은 다시 부르기 이다. 그  '한 번’의 부르기에 김광석은 몸과 얼을 모두 쏟아 넣는다. 또한 라이브에서 부르는 그의 모든 노래는 ‘마지막 노래’이다. 그 한 번을 마지막처럼 부르기 때문이다. 김광석이 노래하는 순간은 ‘다시’의 상대성이 ‘한 번’의 절대성에 모두 흡수되어버리는 순간이다. 이 모든 것은 예술가의 진정성이 매 순간 실천될 때에만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