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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Ⅰ/독서노트

[송화준의 독서노트]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이 책은 ‘사실’ 페미니즘에 관한 있는 책이다. 내가 '사실'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적어도 나는 이 책을 읽어내려가면서 그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책이 아니었다면, 페미니즘을 접하는데 꽤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덧붙이자면, 이 책은 그동안 나의 관심사가 아니었던 페미니즘에 매료되게 만들 만큼 매력적이다. 다만 아쉬운 점은 책의 구성이다. 많은 부분이 저자가 기고했던 칼럼을 모아 놓은 거라 흐름이 들쭉날쭉하거나 겹치는 부분들이 존재한다. 게다가 저자의 글쓰기 방식이 이에 따른 혼란을 가중한다. 번역자는 에필로그에서 이런 글쓰기를 소요(meandering)하는 글이라고 표현한다. 가지를 쳐내서 단선적인 내러티브를 구축하는 대신 더 많은 것들을 서로 잇고 드러내어 더 많은 것들을 포함하려는 글이라는 것이다. 각각의 챕터는 개별적으로는 아주 훌륭했지만, 위에 언급한 문제로 인해 발생하는 약간의 불편함은 아쉬웠다.

이 책은 내게 치료제 같은 책이다. 나야말로 작가가 묘사하는 남자의 전형이기 때문이다. 고로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내 안의 폭력성을 인정해야 했고, 그에는 작은 용기가 필요했다. 폭력(특히 여성에 대한)에 매우 비판적이며 그런 상상을 해보지 않았던 내게는 꽤나 큰 충격이었고 깨달음이었다. 하여 이 책은 내게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예방주사이기도 한 셈이다. 남자를 잠재적 성범죄자로 바라보는 사회 시선이 일부 있다. 그리고 과거에 나는 이에 비판적이었다. 이 책을 읽고 역시 기존의 이런 생각에 물음표를 던지게 되었다. 여러 면에서 나를 깨부쉈다는 면에서 이 책은 ‘내게’ 좋은 책이다. 다른 이에게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리고 적어도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이 세상을 더 나쁘게 만들지는 않을 거라 확신한다. 마지막으로 아마도 절대 이글을 읽지 않을 나의 그녀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다. 진작에 이 책을 읽었다면 당신에게 조금은 나은 남자였으리라.

아래는 이 책을 읽을 때 떠올린 질문들이다. 이는 나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면서, 저자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고,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은 질문이기도 하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라는 명제에 대해서 동의하는가? 
-당신은 페미니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리 사회를 이루는 폭력성과 권위주의는 사례는 무엇이 있는가? 
-우리는 변화를 예측할 수 있는가? 
-우리의 사소한 행동은 변화를 만들 수 있는가? 

다른 독자들과 더불어 나눠보고자 독서모임을 연다. 관심있는 사람은 신청하시길. http://onoffmix.com/event/60470

이하 요약이다. 지나치게 길뿐 아니라, 핵심을 잘 담았다고 할 수도 없다. 나 스스로에게 그랬듯이 부디 누군가에는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공개한다. 읽기 전에 아래 링크에서 도서정보(특히 목차) 정도는 확인하고 읽는 게 좋겠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국내도서
저자 : 레베카 솔닛(Rebecca Solnit) / 김명남역
출판 : 창비(창작과비평사) 2015.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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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쌜리와 내가 파티가 끝나고 떠나려는 찰나 한 남자가 막았다. “조금만 더 계시다가 나랑 얘기 좀 합시다.” 다른 손님들이 사라지는 동안 우리는 그를 기다렸다. 이윽고 그는 우리를 앉히고는 물었다.“자자, 책을 두어권 쓰셨다고 들었습니다만."
나는 대답했다. “사실 그보단 더 많이 썼습니다."
그는 친구의 일곱살 난 아이에게 플루트를 얼마나 배웠는지 이야기해보라고 구슬리는 사람처럼 물었다. “그래서, 어떤 내용들입니까?"
나는 그 해 여름에 나온 최신작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림자의 강: 에드워드 마이브리지와 기술의 서부시대>라는 책으로, 시공간의 소멸과 일상의 산업화를 다룬 내용이었다. 내가 마이브리지를 언급하자 그가 내 말을 잘랐다. 
“올해 마이브리지에 관해서 아주 중요한 책이 나왔다는 거 압니까?"
나는 내게 할당된 배역, 순진한 아가씨라는 배역에 워낙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공교롭게도 같은 주제에 관한 다른 책이 출간되었는데 내가 그걸 놓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벌써 그 아주 중요한 책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장광설을 펼치는 남자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거만한 표정으로. 그 아주 중요한 남자분은 내가 처음부터 그 정체를 알아차렸어야 마땅한 책에 대해서 거만하게 떠들었고, 보다 못한 쌜리가 끼어들어 “그게 바로 이 친구 책입니다.”라고 말했다. 쌜리가 “그게 바로 이 친구 책이라고요.”라고 세번인가 네번쯤 말한 뒤에야 그는 말귀를 알아들었고, 그 즉시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 그는 놀라서 할 말을 잃었다. 아주 잠깐. 그리고는 이내 다시 장광설을 펼치기 시작했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그리고 다른 여자들을 가르치려 든다.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든 모르든. 여자라면 누구나 내 말을 이해할 것이다. 잘 모르는 주제에 대해서 까지 자신감에 넘쳐서 정면 대결을 일삼는 사람들은 유독 남자인 경우가 많다. 이런 현상 때문에 여자들은 어느 분야에서든 괴로움을 겪는다. 여자들은 나서서 말하기를 주저하고, 용감하게 나서서 말하더라도 경청되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길거리 성희롱과 마찬가지로 젊은 여자들에게 이 세상은 당신들의 것이 아님을 넌지시 암시함으로써 여자들을 침묵으로 몰아넣는다. 이런 현상 때문에 여자들은 자기 불신과 자기 절제를 익히게 되는 데 비해 남자들은 근거 없는 과잉 확신을 키운다. 여성의 이런 상황이 좀더 극단적으로 드러난 현상은 중동 국가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곳에서 여성의 증언은 법적 효력이 없다. 여성은 남성 강간자의 주장을 반박할 다른 남성 증인을 확보하지 못하는 한 자신이 당한 강간을 스스로 증언할 수 없다. 

폭력은 타인을 침묵시키고, 타인의 목소리와 신뢰성을 부정하고, 내게 타인이 존재할 권리를 통제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한 방법이다. 미국에서는 매일 약 세명의 여자가 배우자나 옛 배우자에게 살해당한다. 데이트 강간, 부부 강간, 가정폭력, 직장 내 성희롱을 법적 범죄로 규정하려고 애써온 페미니즘의 투쟁에서 핵심 과제는 우선 여성을 신뢰할 만하고 경청할 만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었다. 아무리 사소한 대화라도, 남자들은 자기가 이야기하는 내용을 알지만 여자들은 잘 모른다는 소리를 여자들이 자꾸만 듣게 되는 것은 세상의 추악함을 지속시키는 일이자 세상의 빛을 가리는 일이다. 

지금도 지구의 70억 인구 중에서 수십억명의 여자들은 그들이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믿음직한 증인이 되지 못한다는 소리를 듣고 있을 것이며, 현재는 물론이거니와 미래에도 영영 진실은 그들의 소유물이 될 수 없다는 소리를 듣고 있을 것이다. 이 현상은 남자들이 자꾸 여자를 가르치려 드는 현상을 넘어선 일이지만, 둘 다 똑같은 교만의 제도諸島에 속하는 일이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이중의 전선에서 싸우고 있다. 하나는 무엇이 되었든 문제의 주제에 관한 싸움이 벌어지는 전선이고, 다른 하나는 애초에 말할 권리, 생각할 권리, 사실과 진실을 안다고 인정받을 권리, 가치를 지닐 권리, 인간이 될 권리를 얻기 위해서 싸우는 전선이다. 

'내가 남자는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여기서는 저자가 2008년에 쓴 칼럼을 가리킴) 쓰면서 놀란 점은, 처음에는 재미난 일화로 시작한 글이 강간과 살인을 이야기하면서 끝났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나는 여성이 사회에서 겪는 사소한 괴로움, 폭력으로 강요된 침묵, 그리고 폭력에 의한 죽음이 모두 하나로 이어진 연속선상의 현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가 여성 혐오와 여성에 대한 폭력을 더 잘 이해하려면 힘의 오용을 총체적으로 바라보아야만 한다. 가정폭력을 강간, 살인, 성희롱, 협박과 별개의 문제로 취급하지 말아야 하고, 온라인과 가정과 직장과 거리르 전부 아울러야 한다. 그렇게 전체를 보아야만 패턴이 뚜렷해진다.

2. 가장 긴 전쟁

2012년 12월 16일 인도 뉴델리에서 젊은 여성 버스 승객이 강간당한 뒤 끔찍하게 살해된 사건은 이례적일 정도로 특별한 일로 취급되었다. 오하이오 주 스튜번빌 고등학교에서 풋볼팀 선수들이 의식을 잃은 십대 여자아이를 성폭행한 사건이 한창 밝혀지는 중이었고, 집단 성폭행은 미국에서도 그다지 드문 일이 아님에도 말이다. 6.2분마다 한번씩 경찰에 신고되는 강간이 벌어지고 여성 다섯명 중 한명은 살면서 강간을 당하는 나라에서. 이런 사건은 뉴스에 시도 때도 없이 나온다. 다만 그런 사건들에 모종의 패턴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뿐이다. 실제로 여기에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는 패턴이 있다. 이 패턴은 광범위하고 뿌리 깊고 끔찍하지만 지속적으로 간과되어왔다. 매년 남자에 의한 현재 배우자나 옛 배우자를 살해하는 사건이 1,000건을 훌쩍 넘는다. 그렇다면 그로 인한 희생자 수가 매 3년마다 9.11 사건의 사망자 수를 넘는다는 뜻인데, 이런 종류의 테러에 대해서는 누구도 전쟁을 선포하지 않는다. 

폭력의 유행병은 늘 젠더가 아닌 다른 것으로 설명된다. 모든 설명 중에서 가장 광범위한 설명력을 지닌 것으로 보이는 요인을 쏙 뺀 다른 요인들로만. 누군가 미국에서 대량살인은 늘 백인 남성이 저지르는 것처럼 보인다고 지적하는 글을 썼는데, 그 글에 댓글을 남긴 독자들은 오로지 백인 부분에만 주목하는 것 같았다. 미국에서 총을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점은 분명히 큰 문제지만, 누구나 총기에 접근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살인의 90%는 남성이 저지른다. 패턴은 명명백백하다. 게다가 이 패턴은 전지구적으로도 논할 수 있다.

당신을 죽일 권리가 누구에게 있는가? 2013년 1월 쌘프란시스코 텐더로인에서 길을 걷던 여성이 어느 남성의 성적 접근을 거절한 뒤 칼에 찔렸다. 33세의 피해자가 길을 걷던 중 낯선 남자가 다가와서 집적거렸고, 피해자가 남자를 거부하자 남자는 몹시 흥분하여 피해자의 얼굴을 때리고 팔을 칼로 찔렀다. 그 남자는 자신이 고른 피해자에게는 아무런 권리도 자유도 없지만 자신에게는 그녀를 통제하고 처벌할 권리가 있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던 셈이다. 우리는 폭력은 무엇보다 권위주의적이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폭력은 내게 상대를 통제할 권리가 있다는 전제에서 시작한다. 살인은 그런 권위주의의 극단적 행태다. 살인자는 당신이 죽을지 살지 결정할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고 살인을 통해 단언하는 셈이다. 이것은 타인을 통제하는 궁국의 수단이다. 

이것은 통제의 체계이다. 친밀할 파트너에 의한 살인에서 ‘감히' 그와 헤어지려고 한 여성이 피해자인 경우가 그렇게 많은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그렇다보니 수많은 여성이 그 체계에 갇힌다. 사람들은 다들 사회의 주변부 인간이 아니냐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사실은 부유하고 유명한 특권층 남자들도 그런 짓을 저지른다. 2012년 9월, 쌘프란시스코의 일본 부영사는 12건의 배우자 학대 및 흉기를 동원한 폭행을 저지른 죄목으로 고발당했다. 같은 달에 같은 도시에서 메이슨 메이어(야후 CEO 머리사 메이어의 남동생)는 여자친구의 얼굴에 침을 뱉고 머리를 바닥에 찧고 머리카락을 잡아 뜯은 죄로 보호관찰처분을 받았다. 배우자의 폭행은 미국 여성의 부상원인 중 첫번째다. 이 나라에서는 9초마다 한번씩 여자가 구타당한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그런 폭력이 두려워 스스로를 제약하며, 그러다보면 자신도 익숙해져서 그런 상황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게 된다. 

누군가는 내게 편지를 보내 지난 여름 대학 수업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강사는 학생들에게 스스로를 강간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어떤 조치들을 취하는지 말해보라고 했다. 젊은 여학생들은 자신이 늘 교묘한 방식으로 경계하고, 세상에 대한 접근을 제한하고, 사전에 조심하며, 기본적으로 아주 자주 강간에 대해 생각한다고 말했다. 내게 글을 쓴 남자가 덧붙이기를, 남학생들은 그런 이야기를 듣고서 어안이 벙벙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들의 세상을 가르는 간극이 일순간이나마 갑자기 가시화된 순간이었다. 여느 지침들은 그런 상황에 대해서 조언할 때 예방의 책임을 전적으로 잠재적 피해자에게만 지움으로써 폭력을 기정사실화한다. 대학은 여학생들에게 공격자로부터 살아남는 방법을 알려주는 데 집중할 뿐 나머지 절반의 학생들에게 공격자가 되지 말라고 이르는 일에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여기에는 합당한 이유가 전혀 없다.
 
요즘은 온라인에서도 성폭행 위협이 꾸준히 등장한다. 공적 영역, 사적 영역, 온라인만 그런 것이 아니다. 문제는 우리 정치체계와 사법체계에도 박혀 있다. 그 체계들은 페미니스트들이 우리를 위해 싸우기 전까지는 대부분의 가정폭력을 인정하지 않았고, 성희롱과 스토킹도, 데이트 강간도,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도, 부부 강간도 인정하지 않았다. 요즘도 강간에 대해서는 강간범이 아니라 피해자를 단죄하려는 경우가 많다. 마치 완벽한 처녀만이 성폭행을 당할 수 있다는 듯이. 또는 완벽한 처녀의 말만 믿을 수 있다는 듯이. 강간이 욕정의 범죄라는 말도 그만하자. 이런 강간은 계산된 기회주의적 범죄다.

그들은 생식권에을 훼손하는 일에도 나섰다. 생식권이란 여성이 자신의 신체를 통제할 권리는 말하는데, 미국에서는 피해자를 임신시킨 강간법에게 친권을 부여하는 주가 31개나 된다. 심지어 마니스탄 주 폴 라이언 하원의원(전 공화당 부통령 후보자)은 강간법이 낙태한 피해자를 고소하는 것까지 허락하는 법안을 재도입하려는 중이다. 

물론 여성도 온갖 심각하게 불쾌한 짓을 저지를 수 있고, 여성이 폭력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도 있지만, 실제 폭력에 관해서라면 이른바 성의 전쟁은 유달리 일방적이다. 대체 남성성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사람들이 남성다움을 상상하는 방식, 남성의 어떤 특질을 칭송하고 장려하는 방식, 소년들에게 폭력이 전수되는 방식에는 뭔가 고심해볼 만한 문제가 있다.

여성해방운동은 남성의 힘과 권리를 침해하거나 빼앗으려는 의도를 가진 것처럼 묘사되곤 한다. 마치 한번에 한 성만 자유와 힘을 누릴 수 있는 암울한 제로섬 게임인 것처럼. 그러나 우리는 함께 자유인이 되거나 함께 노예가 될 수 있을 뿐이다. 기어코 자신이 이기고 정복하고 처벌하고 우위를 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이야말로 끔찍하고 자유와는 거리가 먼 것이며, 달성 불가능한 그런 목표를 포기하는 것이야말로 해방이다. 아직도 인류의 절반은 갖가지 만연한 폭력에 시달리고, 진을 빼고, 가끔은 인생을 마감하기까지 한다. 우리가 그저 살아남는 데만 매달리지 않아도 된다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다른 중요한 일들에 쏟을 수 있겠는가. 상황은 바뀌어야 한다. 그것은 당신의 일이고, 나의 일이고, 우리 모두의 일이다. 

3. 호화로운 스위트룸에서 충돌한 두 세계 : IMF, 지구적 불공정, 열차에서 만난 낯선 사람에 대한 몇가지 생각

그녀의 이름은 아프리카였다. 그의 이름은 프랑스였다. 그는 그녀를 식민지 삼았고, 착취했고, 입을 막았다. 전지구적으로 대대적인 빈곤과 경제적 불공정을 낳은 IMF를 이끄는 우두머리는 뉴욕 어느 고급 호텔의 스위트룸에서 아프리카 출신 이민자 여직원을 성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다. 두 세계가 충돌했다. 과거였다면 그녀의 말은 그의 말에 눌려 무가치하다고 여겼을 테고, 그녀는 아마도 고소하지 않았을 것이다. 혹은 경찰이 조사에 나서서 빠리행 비행기에 오른 도미니끄 스토로스깐을 이륙 직전에 끌어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구속되었으며, 프랑스 정계는 발칵 뒤집어졌다.

그들은 무슨 생각이었을까. 그가 그런 비행을 저지른다는 증언과 증거가 난무했는데도 그에게 둘도 없는 권력의 지위를 주기로 결정했던 그 사람들은? 이 사건은 이 세상의 구조에 관해서, 그리고 그는 물론이거니와 그와 비슷한 다른 남자들의 행동을 용인한 여러나라들과 단체들이 추구하는 가치에 대해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진화생물학자들이 자주 말하는 공리가 있다.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반복한다.’ 한 생물체의 배아가 발달하는 과정은 그 종이 진화해온 과정을 반복한다는 뜻이다. 총재의 성폭행 혐의라는 개체발생은 IMF의 계통발생을 반영한 것일까? IMF는 원래 각국의 개발을 돕기 위해서 돈을 빌려주는 기관으로 설립되었지만, 1980년대에는 이미 자유무역주의와 자유시장주의 이데올로기를 추종하는 조직이 되고 말았다. IMF는 대출금을 볼모로 삼아서 온 남반구 국가들의 경제와 정치에 막대한 영향력을 획득했다. 

스토로스깐 섹스 스캔들의 울림이 이렇게 큰 것은 가해자와 피해자로 추정되는 두 사람이 세상의 더 큰 관계들, 가령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IMF의 공격같은 다른 관계들을 보여주는 모형이기 때문이다. 그런 공격은 우리 시대에 벌어지고 있는 대대적인 계급전쟁의 일부다. 이 전쟁은 부자들과 정부 내 부자들의 대리인들은 나머지 사람들을 희생해서 자신들의 소유를 늘리는 데 주력했다. 저개발 지역의 가난한 나라들이 맨 먼저 댓가를 치뤘지만, 우리도 이제 댓가를 치르고 있다. 그런 정책들이 낳는 고통이 우파 경제학을 통해 미국으로 돌아와서 민영화, 자유시장, 감세의 명목으로 노동조합, 교육제도, 환경, 가난한 사람들과 장애인과 노인을 위한 복지 프로그램을 결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름은 아프리카였다. 그의 이름은 IMF였다. 그는 그녀에게 올가미를 걸어 약탈당하게 했고, 보건 써비스를 폐지하게 했고, 굶주리게 했다. 자신의 친구들을 배불리기 위해서 그녀에게 쓰레기를 투척했다. 2001년 아르헨띠나 경제를 망가뜨린 상황을 만든 것이 바로 IMF였다. IMF는 포식세력이었다. 개발도상국들의 문호를 열어젖혀 부유한 북반구와 강력한 초국적기업들의 경제공세를 겪게끔 만들었다. IMF는 포주였다. 이민자 호텔 청소 직원이 정의를 요구하고 나선 이 싸움은 우리 시대에 벌어지고 있는 세계적 전쟁의 축소판이다. 우리 시대에 진정한 계급전쟁이 공공연히 치러지고 있다. 

4. 위협을 칭송하며 : 평등결혼의 진정한 의미

동성결혼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런 결합이 전통적 결혼을 위협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위협을 부정하기보다 칭송해야 할지도 모른다. 최근에 미국에서는 동성결혼 대신 ‘평등결혼’으로 바꿔서 부르는 추세다. 원래 이 용어는 동성 커플도 이성 커플이 누리는 권리를 전부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 용어는 결혼이란 평등한 사람들 사이의 관계라는 뜻도 된다. 전통적 결혼은 그렇지 않았다. 서구 역사에서 대부분의 기간에, 법은 결혼을 통해서 남편이 사실상 아내의 소유자가 되고 아내는 사실상 남편의 소유물이 된다고 규정했다. 혹은 남자가 주인이 되고 여자는 하인이 된다고 규정했다. 

영국에서는 1870년과 1882년에 ‘기혼여성재산법’이 제정되기 전까지 모든 것은 남편의 소유였다. 아내는 유산을 얼마나 받았든 스스로 얼마나 벌든 자기 앞으로는 한푼도 가질 수 없었다. 비슷한 시기에 영국와 미국 양쪽에서 아내 구타를 금하는 법이 제정되었으나, 1970년대 이전에는 거의 집행되지 않았다. 요즘은 가정폭력이 (가끔) 기소되는 세상이지만 두 나라에서 만연한 가정폭력을 치료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가장폭력이 경악스러운 것은 그런 폭력의 이면에는 피해자를 통제하고 처벌할 권리가 학대자에게 있다는 가정이 깔려 있다는 점, 그가 그럴 목적으로 폭력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게이와 레즈비언은 어떤 특질과 역할이 남성적이거나 여성적인가 하는 질문을 진작부터 제기해왔고, 그런 물음은 이성애자에게도 해방적일 수 있다. 그들의 결합에는 위계의 전통이 깔려 있지 않다. 동성결혼을 많이 주재한 한 장로교 목사는 말한다. “캘리포니아에서 동성결혼이 합법화된 뒤, 결혼식을 진행하기에 앞서 동성 커플들을 만나면서 이런 깨달음을 얻었지요. 그들의 관계에는 오래된 가부장적 기본 설정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요. 그건 보는 사람에게도 아름다운 일이었어요."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은 이런 평등주의에 겁을 먹거나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것은 전통적이지 않으니까. 그러나 그들은 전통에 대해서도, 자신들이 그 전통에 열광한다는 점에 대해서도 말하기를 꺼린다. 그들이 생식권과 여성권을 꾸준히 공격해왔다는 사실과 2012년 말 ‘여성에 대한 폭력 방지법’ 개정을 둘러싸고 벌인 소동을 떠올리면 그들의 입장을 알아차리기 어렵지 않지만, 그들은 동성결혼을 저지하는 진짜 이유를 시치미 뗀 채 숨기고 있다. 평등결혼은 위협이다. 불평등에 대한 위협이다. 평등결혼은 평등을 소중히 여기고 평등으로 혜택을 입는 모든 사람에게 유익하다. 그것은 우리 모두를 위한 일이다. 

5. 거미 할머니

내 친구의 집안에는 천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족보가 있는데, 거기에 여자는 한명도 나오지 않는다. 친구 자신도 나오지 않는다. 여자는 역사에서 지워진다. 여자는 존재하는 동시에 말소되었다. 나는 그 말소에 관해서 많이 생각한다. 신약 마태복음에는 무려 40세대를 망라하는 아브라함에서 요셉까지 이어지는 부계도가 등장한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작성하는 가계도의 선조라고 일컬어 진다. 이처럼 가부장제의, 가계의, 내러티브의 일관성은 삭제와 배제를 통해 확보된다. 당신의 어머니를 지우고, 두 할머니를 지우고, 네 증조할머니를 지우라. 몇세대를 올라가면 수백명이, 나중에는 수천명이 사라진다. 점점 더 많은 삶들이 세상에 살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지면서 숲이 나무로, 그물이 직선으로 다듬어진다. 혈통이나 영향이나 의미의 내러티브를 단선적으로 구성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여성을 사라지게 만드는 방법은 또 있다. 영어권 나라들에서는 최근까지도 여자가 결혼을 하면 남편의 성 앞에 '부인(Mrs.)’을 붙여 불렀다. 대부분의 다른 문화에서는 여성이 자기 이름을 간직하지만 여자가 낳은 아이에게 아버지의 성이 붙는다. 이름은 여성의 계보를 지우고 여성의 존재마저 지운다. 여성의 비존재에는 정말로 다양한 형태가 있다. 아프가니스탄전쟁 초기 <뉴욕 타임스> 에 어느 가족의 초상이라는 큼지막한 사진이 실렸다. 내 눈에는 남자 한 명과 아이들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내가 휘장 아니면 가구라고 착각했던 것이 바로 머리에서 발끝까지 베일을 쓴 여자였던 것이다. 그녀는 시야에서 가려져 있었다. 베일을 옹호하는 갖가지 주장들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이 사람을 말 그대로 사라지게 만든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내가 젊었을 때, 대학 캠퍼스에서 여학생들이 강간을 당하자 대학 측은 모든 여학생에게 해가 지면 밖에 나가지 말라고, 아니면 아예 나돌아다니지 말라고 일렀다. 그러자 웬 장난꾸러기들이 다른 처방법을 주장하는 포스터를 내붙였다. 해가 진 뒤에는 캠퍼스에서 남자를 몽땅 몰아내자는 처방이었다. 그것은 똑같이 논리적인 해법이었지만, 남자들은 겨우 한 남자의 폭력 때문에 모든 남자더러 사라지라는, 이동과 참여의 자유를 포기하라는 말을 들은 데 대해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1976년에서 1983년까지 벌어진 아르헨띠나의 ‘더러운 전쟁’시절, 사람들은 군사정부가 사람들을 ‘사라지게' 만든다고 말했다. 군부는 반체제인사, 활동가, 좌익, 유대인을 남녀 가리지 않고 은밀하게 처리했다. 15,000명에서 30,000명 사이의 아르헨띠나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제거되었다. 사람들은 이웃이나 친구와의 대화를 중단했다. 누구든 자신을 밀고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다들 입을 닫았다. 사람들이 스스로 비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을 보호하면 할수록 그들의 존재는 점점 더 희박해졌다. 

실종에 대항해 처음으로 목소리를 낸 사람들, 두려움을 극복하고 입을 열고 모습을 드러낸 사람들은 어머니들이었다. 그들은 ‘오월광장의 어머니들’이라고 불렸다. 사라진 사람들의 어머니들이었기 때문에, 대통령 공관 바로 앞에 있는 오월광장에 나타났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한번 나타난 그들은 사라지기를 거부했다. 앉는 것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걸었다. 그들은 공격받고 체포되고 심문받고 쫓겨났지만 몇번이고 다시 돌아와서 자신들의 괴로움과 분노를 공개적으로 말했고, 자식과 손주를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그들은 자식의 이름과 자식이 사라진 날짜를 수놓은 흰 머릿수건을 썼다. 모성이라는 감정적, 생물학적 유대는 당시 나라를 장악한 장군들조차 쉽게 좌익이나 범죄자로 묘사하기 힘든 대상이었다. 모성과 신뢰성은 여자들의 갑옷 혹은 의상이 되어주었으며 여자들은 그 속에서 장군들을 공격했다.

요즘은 천을 기계로 짜지만 산업혁명 이전에는 여자들이 손수 짰다. 그래서 실을 잣고 천을 짜는 여자는 곧잘 거미에 비유되었고, 옛 이야기 속거미는 여성으로 묘사되었다. 내가 사는 대륙에서 호피, 푸에블로, 나바호, 촉토, 체로키 원주민 부족의 창조 설화에서 거미 할머니가 우주를 창조한 장본인으로 등장한다. 그물 같은 거미줄은 비선형성의 이미지, 무언가가 선택할 수 있는 여러 방향들을, 무언가가 생겨날 수 있는 여러 근원들을 보여주는 이미지다. 한줄로 이어진 후손들만이 아니라 할머니들까지 포함하는 이미지다. 그물을 짜되 그물에 걸리지 않는 것, 세상을 창조하는 것, 자신의 삶을 창조하는 것, 자신의 운명을 다스리는 것, 아버지들만이 아니라 할머니들을 호명하는 것, 직선만이 아니라 그물을 그리는 것, 침묵당하지 않고 노래하는 것, 베일을 걷고 모습을 드러내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내가 빨랫줄에 너는 현수막들이다. 

6. 울프의 어둠 : 불가해한 것을 끌어안기

“미래는 어둡고, 나는 그것이 미래로서는 최선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서른세살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당시 울프는 우울증이 발병해 자살을 시도하고 간호사들의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 이 선언은 예사롭지 않다. 이 선언은 우리가 거짓된 점괘를 믿거나 울적한 정치적 혹은 이데올로기적 내러티브를 미래로 투사함으로써 모르는 것을 아는 것으로 바꿀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어둠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무언가를 구별하고 규정하기 힘든 밤이란 한편으로는 우리가 사랑을 나누는 시간이다. 사실 우리는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조차도 모를 때가 허다하다. 빈큼을 메운다는 것은 우리가 완전히 알지는 못하는 어떤 진실을 완전히 안다고 착각하는 어떤 거짓으로 바꾸는 일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다 안다고 착각할 때는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 보다 사실 더 모른다. 

어둠의 가치는 무엇일까? 모르는 것을 찾아 모르는 곳으로 과감히 나서는 일의 가치는 무엇일까? 수전 손택은 자신의 기념비적인 저서 <사진에 관하여>에서 사람들은 잔혹한 이미지를 거듭 접하면 무감각해지기 마련이라고 말했던 것을 철회하며,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것을 계속 바라볼 수 있을지 고민한다. 왜냐하면 잔혹함은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을 테고, 우리는 어떻게든 그것을 계속 다뤄야 하니까. 그녀의 마지막 책이자 유고 산문집인 <문학은 자유다>에서는 이런 주장을 했다. 우리의 저항이 설령 소용없을 것이라고 생각되더라도 우리는 원칙에 의거하여 계속 저항해야 한다. 우리의 행동이 소용없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 행동의 효과는 우리가 예견하지 못한, 심지어 상상하지도 못한 방식으로 펼쳐질 수 있다. 지금 나와 수전 손택이 75년 전에 죽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의 수많은 생각 속에 생생하게 살아남아서 대화의 참가자이자 행동의 계가가 되어주는 여성(버지니아 울프)의 말을 곱씹고 있지 않은가.

희망의 근거는 단순하다. 우리는 다음에 벌어질 일을 모른다는 것. 세상에는 있을 법하지 않은 일과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꽤 자주 벌어진다는 것. 비공식적인 세계사가 이미 보여주었듯이, 헌신하는 개인들과 대중운동들이 역사를 만들 수 있듯이, 헌신하는 개인들과 대중운동들이 역사를 만들 수 있으며 만들고 있다는 것. 우리가 언제 어떻게 이길지, 얼마나 걸릴지는 예측할 수 없지만 말이다. 절망은 확실성의 한 형태다. 미래가 현재와 거의 같거나 현재보다 쇠락하리라고 믿는 확실성이다. 절망과 낙관은 둘 다 행동하지 않는 근거로 작용한다. 현실이 반드시 우리 계획과 일치하진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야말로 희망일 수 있다. 

창조작업이란 무릇 예측 불가한 방식으로 이뤄지는 법이다. 배회할 공간이 필요하고, 일정과 체계는 거부된다. 울프는 길 잃기를 찬양한다. 말 그대로 못 찾는다는 의미에서의 길 잃기가 아니라 미지에 대해 열려 있다는 의미에서의 길 잃기이다. 또한 그녀는 물리적 공간이 정신적 공간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찬양한다. 울프는 텍스트를, 상상력을, 소설 속 인물들을 해방시켰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특히 여성들을 위해서도 그런 자유를 요구했다. 그녀가 칭송했던 해방은 공식적, 제도적, 이성적 해방이 아니라 익숙한 것, 안전한 것, 알려진 것을 넘어서 좀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해방이었다. 그녀가 요구했던 여성해방은 단순히 남자들이 수행하는 제도적 활동의 일부를 여자들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아니라, 지리적 차원에서든 상상력의 차원에서든 자유롭게 쏘다닐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계량 가능한 것의 폭압’이라는 표현이 있다. 측정 될 수 있는 것이 측정 될 수 없는 것에 거의 우선한다는 뜻이다. 사익이 공익에, 속도와 효율이 즐거움과 품질에, 공리주의가 미스터리와 의미에 우선한다. 호명할 수 없거나 묘사할 수 없는 것을 아끼기란 어려운 일이다. 지구의 파괴는 결국 우리에게 상상력이 부족한 탓이거나 정말로 중요한 것을 헤아릴 줄 모르는 계산체계가 우리의 상상력을 가친 탓이다. 이런 파괴에 맞서는 반란은 상상력의 반란이다. 미묘한 것, 돈으로 살 수 없는 것, 일탈하는 것, 불확실한 것을 선호하는 반란이다. 

7. 악질들 사이의 카산드라

트로이 왕의 딸 ‘카산드라'는 정확하게 예언할 줄 알지만 아무도 그 말을 믿어주지 않는 저주에 걸렸다. 그동안 젠더전쟁의 험난한 물결을 헤쳐오면서, 나는 줄곧 카산드라를 떠올렸다. 그런 전쟁에서 신뢰성이란 그야말로 기본이 되는 힘이고, 그 측면에서 여성들은 집단적으로 다소 부족하다는 비난을 자주 받기 때문이다. 여자가 무언가 남자를 힐책하는 말을 하면, 특히 그것이 기득권의 핵심에 놓인 남자에 대한 말이라면, 사람들은 그 발언의 진실성을 의심할 뿐 아니라 그녀에게 그렇게 말할 능력이 있는가, 심지어 권리가 있는가 의심하는 반응을 보인다.

왜 사람들은 여성의 말을 일축하려는 충동을 느끼는가, 그리고 그런 비난이 왜 그렇게 자주 여성은 대단히 부조리하거나 히스테릭하다는 비난으로 빠지는가 하는 점이다. 부조리와 히스테리는 여성이 일상적으로 받는 비난이다.(히스테리라는 단어는 ‘자궁’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왔다. 감정적으로 격한 상태를 뜻하는 그 현상이 몸소글 돌아다니는 자궁 때문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성폭행은 피해자의 신체보전권, 자기결정권, 자기표현권을 공격하는 행위다. 피해자를 소멸시키고 침묵시키는 행위다. 피해자의 목소리와 권리를 지워내는 행위다. 침묵은 여러개의 동심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첫번째는 말하기를 어렵게 만들거나 심지어 불가능하게 만드는 내면의 억제, 자기의심, 억압, 혼란, 수치심, 말하면 행여 처벌이나 추방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그 원을 둘러싼 다음 원은 기어이 말하고 나선 사람을 침묵시키려는 세력들이다. 창피를 주든, 괴롭히든, 죽음을 낳는 폭력까지 포함하여 노골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든 해서 말이다. 마지막으로 제일 바깥을 둘러싼 원에는 이야기와 화자의 신빙성을 깎아내리는 세력이 있다. 여성이 성범죄에 대해서 입을 연 순간이야말로 그녀의 말할 권리와 말할 능력이 가장 심하게 공격당하는 시점이다. 

비밀과 침묵은 범인의 첫번째 방어선이다. 비밀을 지키는 데 실패하면, 범인은 피해자의 신뢰성을 공격한다. 그녀를 철저히 침묵시키는 데 실패하면, 아무도 그녀의 말을 듣지 않게끔 만들려고 애쓴다. 모든 잔혹행위에는 우리가 뻔히 예상할 수 있는 똑같은 사과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느니, 피해자가 거짓말하는 것이라느니, 피해자가 과장하는 것이라느니, 피해자가 자초한 일이라느니, 심지어 이제 그만 과거를 잊고 미래로 나아가는 말도 나온다. 범인이 유력한 인물일수록 현실을 호명하고 정의하는 능력이 크기 마련이라, 그의 주장이 더 철저히 득세한다. 

여자들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거짓말은 남자도 여자도 아이도 한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여자가 유독 거짓말을 많이 하는 습성인 것은 아니고, 남자라고 해서 유독 진실한 것은 아니다. 카산드라 신화의 여러 버전 중 가장 유명한 버전에서, 사라들이 그녀의 예언을 믿지 않게 된 것은 그녀가 아폴론과의 섹스를 거부함으로써 아폴론으로부터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까마득한 옛날부터도 자기 몸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과 신뢰성을 잃는 것이 연관된 일이라는 개념이 존재했던 것이다.

8. #여자들은다겪는다 : 페미니스트들, 이야기를 다시 쓰다

2014년 5월 24일 금요일 밤, 캘리포니아 주 아일라비스타에서 한 학생이 다른 학생들을 학살한 사건이 있었다.(22세의 엘리엇 로저가 자신의 아파트에서 캘리포니아 대학 쌘타바버라 분교에 다니는 남자 대학생 세명을 칼로 찔러 죽인 뒤 같은 학교 여학생 클럽으로 가서 총으로 여학생을 비롯한 세명을 더 쏘아 죽이고 행인들에게도 무차별 총격을 가하며 달아나다가 결국 차 안에서 총으로 자살한 사건). 사건이 벌어진 후 범인의 행동을 정의하려는 시도가 가열차게 벌어졌다. 주류는 그가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처럼.

정신질환은 범주의 문제라기보다는 정도의 문제일 때가 더 많다.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들 중에서도 아주 많은 수는 온화하고 다정한 사람이다.  T.M. 루어먼은 기고문에서, 인도에서 정신분열증 환자들이 환청을 들을 때는 머릿속의 목소리가 집 청소를 하라고 말하곤 하는 데 비해 미국 환자들은 폭력적인 행동을 하라는 말을 듣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문화는 중요하다. 사람이 현실과 접촉을 잃기 시작하면 병든 뇌는 무엇이 되었든 그것을 둘러싼 환경에 집착적으로, 망상적으로 매달리기 마련이다. 주변 문화의 질병에. 사람들은 저 아일라비스타의 살인자에게도 ‘일탈’한 인간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나머지 사람들과는 다른 인간이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처럼. 그러나 그런 폭력은 우리 주변 어디에나 여러 형태로 존재한다. 가장 뚜렷하게는 여성에 대한 만연한 증오와 폭력이라는 형태로. 

이 싸움은 페미니즘 역사에서 분수령에 해당하는 순간이 될 지도 모른다. 페미니즘은 예나 지금이나 호명하고 정의하려는 싸움, 발언하고 경청되려는 싸움이다. 이를 ‘이야기의 싸움’이라고 부른다. 사용하는 언어와 내러티브를 통해서 싸움의 승패가 결정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 사건있고 다음날 어느 시점부터 케이(kaye)라는 온라인 아이디를 쓰는 젊은 여성이 #여자들은다겪는다(YesALLWomen)라는 해시태그를 붙여서 트위터에 글을 올리기 시작했고, 일요일 밤에는 벌써 #여자들은다겪는다 해시태그를 붙인 트윗이 전세계에서 50만 건이 나 작성되었다. 여자들이 억압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남자들이 상투적으로 보이는 반응은, 즉 ‘모든 남자가 다 그렇진 않아’라는 반응이다. 물론 모든 남자가 다 여성 혐오자나 강간범은 아니다. 그러나 요즘은 그게 아니다. 요점은 모든 여자는 다 그런 남자를 두려워하면서 살아간다는 점이다. 

언어는 힘이다. 우리는 단어의 힘을 이용해 의미를 묻어버릴 수 있지만, 의미를 드러낼 수도 있다. 만일 우리에게 어떤 현상이나 감정이나 상황을 가리키는 단어가 없다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말하지 못한다. 그것은 그 문제 다룰 수 없다는 뜻이다. 하물며 변화시키기란 더더욱 불가능하다. 우리 시대의 새로운 용어들 중에서 설득력이 있는 것을 꼽자면 ‘강간 문화’가 있다. 이 용어는 2012년 마레 인도 뉴델리와 오하이오 주 스튜번빌의 성폭행 사건이 주요 뉴스로 부각된 것을 계기로 널리 유통되었다. '강간 문화'라는 용어는 우리로 하여금 문제의 근원을 문화 전체에서 찾도록 도와준다.

‘성희롱’이라는 용어는 1970년대에 처음 고안되었고, 80년대에 사법체계에서 쓰이기 시작했다. 여성이 존재할 권리를 판정하는 데 쓰이는 쓰이는 많은 단어들은 최근에서야 만들어졌다. 가령 ‘가정폭력’이라는 단어가 ‘아내 구타’를 대체한 것은 법이 그 주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뒤부터였다. 요즘도 미국에서는 9초마다 한명씩 매 맞는 여성이 발생하지만, 페미니즘의 운동 덕분에 이제는 피해자가 법적 개선책을 활용할 수 있다. 가정폭력은 15세에서 44세 사이의 여성들에게 가장 흔한 부상원이다. 교통사고, 강도, 암으로 인한 사망을 합한 것보다 많다.
 
‘성적 권리의식’이라는 용어는 아일리비스타 살해사건을 통해 일상 언어로 진입했다. 많은 경우 강간의 동기는 남자가 여자의 욕망과는 무관하게 자신이 그녀와 섹스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 마음이었다. 남자들이 자신의 감정적,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상황에서 분노로 반응하는 것은 너무나 흔한 현상이다. ‘성적 권리의식’이라는 용어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현상의 표출을 인식하고 지탄하게끔 도울 것이다. 상황을 바꾸는 것을 도울 것이다. 가정폭력, 맨스플레인, 강간문화, 성적 권리의식 등은 많은 여성들이 매일 접하는 세상을 재정의하고 그런 세상을 바꿔나갈 방법을 열어주는 언어도구들이다.

6년 전 내가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라는 제목의 글을 쓰려고 했을 때, 나 스스로 놀란 점이 있었다. 웬 남자가 나를 가르치려 든 우스꽝스러운 사례로 글을 시작했건만 결국에는 강간과 살인에 관한 이야기로 글을 맺게 된 점이다. 나는 그것이 자칫 ‘미끄러지기 쉬운 비탈’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한 것이었다. 폭력, 권력남용, 성희롱, 협박, 위협, 구타, 강간, 살인 등 우리는 여성 혐오에 다양한 양태를 구획하여 각각 별도로 다루기보다 그 비탈 전체를 이야기해야 한다. 

어떤 남자가 여자에게는 발언할 권리가 없고 상황을 정의할 권리도 없다는 믿음에 의거해 행동한다고 하자. 그것은 저녁식사 자리에서나 학회에서 당신의 말을 자르는 행동일 수 있다. 아니면 당신에게 입을 다물라고 말하거나, 당신이 입을 열었을 때 위협하거나, 말을 꺼냈다고 해서 때리거나, 당신을 영영 침묵시키고자 아예 죽이는 것일 수도 있다. 그는 당신의 남편일 수도 있고, 당신의 아버지, 상사나 편집, 모임이나 열차에서 만난 낯선 남자일 수도 있다. 당신에게는 아무런 권리가 없다고 말하는 그런 남자들은 어디에나 있다.

9. 판도라의 상자와 자원경찰들

판도라의 상자는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표현하는 말이다. 한 번 벌어진 일은 돌이킬 수 없다. 1973년에 로 대 웨이드 재판으로 연방대법원이 낙태를 합법화했을 때 여성들이 얻은 생식권을 누군가 도로 뺏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성에게 결코 빼앗을 수 없는 어떤 권리가 있다는 생각만큼은 그리 쉽게 없앨 수 없을 것이다. 상자로 돌아오지 않는 것은 생각들이다. 그리고 ‘혁명'은 무엇보다도 생각들로 이루어진다. 보수주의자들이 미국의 여러 주에서 그러는 것처럼 여성의 생식권을 훼손할 수는 있을지언정, 다수의 여성들에게 당신에게는 자기 몸을 통제할 권리가 없다는 생각을 믿게끔 만들 수는 없다. 실제적인 변화는 마음과 정신의 변화에 뒤따르는 법이다. 

혁명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사는 시대에는 설령 혁명군이 도시를 휩쓸거나 대중봉기로 독재자가 타도되더라도, 그런 사건이 예전과 같은 의미를 띨 가능성은낮다. 심오한 사회변화는 전혀 다른 형태를 띨 가능성이 높다. 이 시대의 혁명은 특정 체제에서 권력을 확보하는 일이 주가 되는 사건이 아니고, 그보다는 파열을 통해서 새로운 사상과 제도가 탄생하고 그 충격이 퍼지는 사건이다. 1917년 러시아혁명은 소련의 공산주의분 아니라 궁극적으로 뉴딜정책과 유럽 복지국가들을 낳았다는 점에서 세계적 혁명이었다. 그 대열믜 마지막은 1968년 세계혁명이었다.이 혁명은 중국과 멕시코까지 거의 모든 곳에서 터졌고, 그 어디에서도 권력을 잡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그것은 국가관료주의에 대항하는 혁명이었고, 개인적 해방과 정치적 해방을 분리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혁명이었으며, 그 혁명이 남긴 가장 영속적인 유산은 현대 페미니즘의 탄생일 것이다.

판도라의 상자는 열렸고 되돌릴 수 없다. 그래도 여전히 우리를 되돌리려고 애쓰거나 최소한 이 자리에서 멈추게 하려고 애쓰는 세력(자원경찰들)들이 많다. 그들이 보여주는 전망은 다 같다. 전통적인 젠터관계는 대체로 영속할 것이며 진정으로 진보적인 사회변화는 가망이 없다는 것이다. 온라인 세상에는 눈에잘 띄는 여성들에게 주로 익명으로 강간과 살해 협박을 보내는 이들이 넘쳐난다. 이런 자원 경찰들은 여성들을 제자리에 묶어두거나 도로 그곳으로 집어넣으려고 애쓴다. 이것은 일각에서 위협과 분노를 느낄 만큼 페미니즘과 여성들이 꾸준히 전진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남자들은 무엇을 원하는가? 남성은 범죄의 대부분을, 특히 폭력적 범죄의 대부분을 저지르는 성이고, 자살도 더 많이 한다. 대학 입학 비율에서 여성에 뒤처지고 있고, 현재의 경제침체에서 여성보다 더 많이 고전하고 있다. 미래에는 더이상 페미니즘이라고 불리지 않을지도 모르는 이 논의는 남성에 대한 더 깊은 탐구를 포함해야 한다. 예나 지금이나 페미니즘은 인간 세상 전체를 바꾸려는 노력이다. 페미니즘은 남성의 권리를 빼앗으려는 계략이 아니라 모두를 해방시키려는 운동이다. 

우리가 해방되어야 할 구속은 또 있다. 경쟁과 냉혹함과 단기적 사고와 가혹한 개인주의를 높이 사는 체제, 환경파괴와 무제한 소비를 너무나 잘 뒷받침하는 체제, 한마디로 자본주의라고 불러도 무방한 체제이다. 이런 체제는 최악의 마초성을 현실로 구현하고, 지구에 존재하는 최선이 것들을 파괴한다.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이런 체제에 좀 더 잘 적응하긴 하지만, 이 체제는 사실 둘 중 어느 쪽에도 진정으로 유익하지 않다. 이를 포괄하는 페미니즘만은 아닌 페미니즘 운동이 미래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