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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Ⅰ/독서노트

[송화준의 독서노트]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피에르 바야르)

저자인 피에르 바야르는 프랑스 8대학 프랑스 문학교수이자 심리분석가이다. 그런 연유인지 책의 주장은 상당히 문학적이면서도 논리적이다. 이런 특징은 독자로 하여금 사유할 수 있는 힘과 상상할 수 있는 지경을 넓혀주는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책의 제목에도 그런 장점이 묻어 난다. 어떻게 생각하면 어떤 비법이나 트릭을 알려주는 것 같기도 하지만, 이 책은 그 이상이다. 이 책은 우리가 책을 만나는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어떻게 책과의 관계를 만들어 가야 하는지에 대해 그동안의 통념을 뒤집는 시야를 제공해준다. 

이 책을 잘 읽었는지 확신할 수 없다. 일부는 작가의 문학적 문체가 가진 가능성을 많이 쳐내면서 생긴 실수이고, 또하나는 내가 바로 이 책을 작가가 말하는 비독서의 일종인 ‘훑어보기’로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저자의 경고를 받아들여 이 책에 지나치게 빠져 나를 잃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이 정도의 독서로 만족하기로 했다. 나한테는 내가 읽은 것이 정답이지만, 이 책을 읽는 다른 독자에게는 다른 정답이 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당당하게 변명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또한 이 책의 힘이니 꼭 읽어보시길. 어쩌면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될지니.

이하 요약이다. 아래 링크의 도서정보(특히 목차)를 확인 후 읽으시길 추천한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국내도서
저자 : 피에르 바야르(Pierre Bayard) / 김병욱역
출판 : 여름언덕 2008.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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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비독서가의 경험을 전하는 일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이 문제를 정면으로 대하지 못하게 하는 일련의 내면화된 두려움에 부닥치게 되며, 이 두려움들 가운데 세 가지가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첫 번째 두려움은 독서의 의무이다. 우리는 독서가 신성시되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특히 일정 수의 모범적 텍스트들이 그런 신성시의 대상이 되고, 그 책들을 읽지 않았다는 것은 금기이며 이를 어기면 눈총을 받게 된다. 두 번째 두려움은 정독해야 할 의무이다. 이는 첫 번째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읽지 않는 것도 눈총을 받지만, 후딱 읽어치우거나 대충 읽어버리는 것, 특히 그렇게 읽었다고 말하는 것 역시 그에 못지않게 눈총의 대상이 된다. 세 번째 두려움은 책들에 관한 담론과 관계된다. 우리의 문화는 우리가 어떤 책을 읽는 것은 그 책에 대해 어느 정도 정확하게 이야기하기 위해서임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 얼마든지 누군가와 열정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경우에 따라 심지어 어떤 책에 대해 정확히 말하기 위해서는 그 책을 통독하지 않았거나 아예 펼쳐보지 않는 편이 바람직할 수도 있다. 

‘비독서’라는 개념은 읽는 것과 읽지 않는 것, 이 양자를 분명히 구분할 수 있어야 성립되지만 사실 우리가 텍스트를 만나는 다양한 형태들은 대부분 둘 중 어느 쪽도 아닌, 둘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그 사이에는 여러 수준의 독서가 있다. 이 책에서는 책을 펼쳐보지 않은 것뿐만 아니라, 책을 대충 뒤적거렸거나, 다른 사람이 어떤 책에 대해 하는 얘기를 들었거나, 읽었지만 잊어버린 경우 역시 비독서의 범주로 본다. 

제 1부 비독서의 방식들

제 1장 책을 전혀 읽지 않는 경우
어떤 책을 읽는 것보다 책들 전체에 대한 '총체적 시각'을 갖는 것이 더 중요하다. 사실 이는 우리가 책과 맺는 주된 관계 양식이다. 아무리 책을 많이 읽는 독자라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책의 극히 일부를 읽을 수 있을 뿐이다. 독서 역시 비독서이다. 어떤 책을 잡고 펼치는 몸짓은 선택된 그 행복한 책 대신 선택될 수도 있었을 다른 모든 책들을 잡지 않고 덮는 몸짓을 가린다. 

"훌륭한 사서가 되는 비결은 자신이 맡은 모든 책들에서 제목과 목차 외에는 절대 읽지 않는 거요. 책의 내용 속으로 코를 들이미는 자는 도서관에서 일하긴 글러먹은 사람이오. 그는 절대로 총체적 시각을 가질 수 없단 말이요.” - 로베르트 무질의 소설 <특서 없는 남자>에 등장하는 사서의 말

이 사서는 책 속으로 들어가는 걸 삼가지만, 책에 무관심하거나 적대시 하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그가 신중한 태도로 책 주변에만 머무르는 것은 오히려 모든 책을 사랑해서요. 그 책들 중 어느 한 책에 너무 관심을 기울이면 다른 책들을 소홀히 하게 되는 결과가 되는 게 두려워서인 것이다. 

이 입장의 지혜로움은 진정한 교양은 완전성을 지향해야 하며 국소적인 지식의 축적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전제 하에, 전체라는 관념에 중요성을 부여한다는 데 있다. 이러한 전체성의 추구는 개개의 책을 다른 눈으로 보게 한다. 책의 개별성을 넘어 그 책이 다른 책들과 맺는 관계들에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이다. 진정한 독자라면 바로 그 관계들을 파악하고자 해야 한다는 것을 사서는 잘 이해했다.

소통과 연결선들, 교양이 알아야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지 특정의 어떤 책이 아니다. 교양이란 무엇보다 ‘오리엔테이션’의 문제이다. 교양을 쌓았다는 것은 이런 책을 읽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전체 속에서 길을 잃지 않을 줄 안다는 것, 즉 그것들이 하나의 앙상블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각각의 요소를 다른 요소들과의 관계 속에 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내부는 외부보다 덜 중요하다. 혹은, 책의 내부는 바로 책의 외부요, 각가의 책에서 중요한 것은 나란히 있는 책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질의 사서가 택한 비독서의 특성은 그의 태도가 수동적인 게 아니라 적극적이라는 점에 있다. 이는 비독서가 독서의 부재가 아님을 의미 한다. 이는 무수히 많은 책들 속에서 침몰당하지 않기 위해 그 책들과 체계적으로 관계를 맺고자 하는 하나의 진정한 활동이다. 이는 옹호받아야할 뿐 아니라, 교육의 대상이 될 만한 가치가 있다. 

제 2장 책을 대충 훑어보는 경우
어떤 책은 대출 훑어보기만 해도 충분히 그 책에 대한 논평을 쓸 수 있으며, 어떤 책은 오히려 그러는 편이 좋다. ‘총체적 시각’이라는 관념은 '집단 도서관' 안에서 책이 놓인 상황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책 전체 내용에서 각각의 단락이 처한 상황과도 관계된다. 교양 있는 독자가 도서관을 전체적으로 활용하는 측면에서 펼칠 수 있는 오리엔테이션 능력은 또한 한 권의 책 내부에서도 유효하다.

교양이 있다는 것은 어떤 책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신속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며, 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책을 다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다. 그런 능력이 뛰어날수록 문제의 책을 읽을 필요성이 덜해진다고 말할 수 있다. 책을 제대로 읽지 않고 대충 훑어보는 것은 오히려 책의 깊은 본성과 교양을 살찌우는 책의 힘을 존중하면서, 그리고 세부 사실에 빠져 길을 잃게 될 위험을 피하면서 책을 제 것으로 소화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수 있다. 

19세기 비평계는 저자를 잘 알아야 작품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저자에 대한 최대한 많은 정보를 수집하려 했다. 폴 발레리는 이런 전통과 단절하여 흔히 하는 생각과 달리 저자는 작품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문제점을 제기한다. 작품의 저자의 내부에서 자라나지만 저자를 초월하는 어떤 창작 과정의 소산이므로 그것을 저자에게 환원시키려 하는 것은 잘못이다. 작품에게 저자란 그저 지나쳐가는 하나의 장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어떤 책에 대해 정확하게 말하기 위해 꼭 그것(저자를 포함)을 잘 알아야만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지나친 독서는 독창성을 앗아가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발레리가 보기에는 작가가 독서 때문에 다른 저자들에게 종속되면서 처하게 되는 주된 위험이다. 교양을 쌓는 일은 다른 사람들의 책들 속에 파묻히게 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자신이 창작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런 위험에서 벗어나야 한다. 비평가는 작품 앞에서 눈을 감아버리고 그것이 어떤 작품일 수 있을지를 생각해야만, 그것이 다른 작품들과 공유하는 것을 자각할 기회를 가질 수 있고 이를 통해 바로 그 작품을 넘어설 수 있다. 지나치게 기울이는 독서, 아니, 어쩌면 모든 독서는 대상에 대한 심오한 이해에 장애가 될 뿐이다.

이런 거리두기의 시학으로 발레리는 사람들이 책과 맺는 관계 양식 중에서 가장 흔한 양식, 즉 대충 읽기의 논거를 정립한다. 훑어보기는 두 가지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첫 번째는 선형의 훑어보기이다. 이 경우는 독자는 텍스트의 첫머리에서 시작하여 끝을 향해 나아가는데 물론 끝에 이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두 번째 경우는 순환형의 훑어보기로 독자는 페이지 순에 따라 독서를 하는 게 아니라 작품 속을 산책하듯 책을 읽는데, 때로는 맨끝에서 시작하기도 한다. 어느 것이 낫고 못하다고 평가할 수 없다. 

이런 식으로 책을 파악하는 일은 독서와 비독서의 차이 혹은 독서에 대한 관념 자체를 상당히 뒤흔들어버린다. 그들이 자신이 접한 책에 대해 말할 때, 과연 우리는 그들이 책을 읽지도 않고 말을 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책을 깊이 탐독하되 그 책의 위치를 정하지 못하는 사람과, 어떤 책 속으르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모든 책 속을 돌아다니는 사람 중 과연 어느 쪽이 더 나은 독자인지 자문해볼 수 있을 것이다. 

제 3장 다른 사람들이 하는 책 얘기를 귀동냥한 경우
교양은 책들을 집단 도서관 속에 위치시킬 수 있는 능력이자 각각의 책 속에 자신을 위치시킬 수 있는 능력이라는, 이 이중의 오리엔테이션 이론은 사람들이 말하는 책을 반드시 자신이 직접 접해야만 그 책에 대한 관념을 형성하거나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따라서 독서라는 것은 결국 물질적인 책의 관념으로부터 분리되어, 얼마든지 어떤 비물질적인 오브제와의 만남을 가리키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어떤 책에 담긴 내용에 대해, 그 책을 읽지 않고도 아주 명확한 관겸을 형성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방식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들이 그 책에 대해 쓴 것을 읽거나 아니면 그 책에 대해 하는 말을 듣는 것이다. 이 방법-발레리는 프루스트의 작품들을 바로 이런 방법으로 읽었다는 것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 은 많은 시간을 절약할 수 있게 해준다. 

우리가 화제로 삼는 책은 실재의 책과는 별 상관이 없다. 저마다 비교 불가능한 어떤 내면의 길을 좇아 어떤 가공의 오브제(화면책, 프로이트의 화면 추억에서 따옴)를 구축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납득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린 시절 좋아했던 어떤 책에 대한 추억을 그 ‘실재’ 책과 대조해보는 실험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게 해보면 우리의 일부분이 될 정도로 소중했던 책들에 대한 우리의 기억이, 당면 상황과 무의식적 목적에 따라 부단히 재구성되어왔음을 알 수 있다. 책은 우리가 불분명한 방식으로 담론을 나누는, 우리의 욕망과 환상들이 끊임없이 뒤얽히는 모호한 오브제로 나타난다. 

제 4장 책의 내용을 잊어버린 경우
이제 우리는 읽은 책과 대충 훑어본 책 사이에는 범주를 그렇게 따로 구분해야 할 정도의 큰 차이는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진중하고 완전한 독서도 곧바로 개략적인 검토가 되어버리거나 대충 훑어보는 것으로 탈바꿈해버린다. 이는 독서라는 행위에 시간이라는 차원을 덧붙여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독서는 단순히 어떤 텍스트를 인식하는 것, 혹은 어떤 지식을 습득하는 것만은 아니다. 읽기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어쩔 수 없는 망각의 흐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또한 독서다. 많건 적건 우리는 언제가 책의 일부분을 읽었을 뿐이다. 그 역시 일정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과 책에 대해 대화를 한다기보다는 당면 상황에 따라 다시 손질된 불명확한 기억들에 대해 대화를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제 2부 담론의 상황들

제 1장 사교 생활에서
우리는 책 얘기를 할 때 결코 어떤 한 권의 책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법이 없다. 언제나 어떤 구체적인 책을 통해 대화 속으로 끼어드는 일련의 책들에 대해 얘기를 하게 되는데, 이때 구체적으로 언급되는 책은 어떤 하나의 문화 개념 전체를 참조케 하면서 잠시 그 문화의 상징 노릇을 할뿐이다. 

제 2장 선생 앞에서
우리가 작품을 읽을 때 그 작품에 대한 관념이 분명하게 표명되지만, 그 이야기들을 듣는 순간에 형성되거나 듣고 나서 형성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 작품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그 관념들은 체계적으로 구성된 하나의 세계관 전체를 구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작품 이야기를 듣기 훨씬 전에 구성되어 있었고, 오히려 책이 나중에 그 속에 들어가 자리를 잡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나는 독자와 모든 새로운 글 사이에 개입하여 알게 모르게 독서를 가공하는 신화적이고 집단적인 비개인적 표상들 전체를 ‘내면의 책’으로 부르고자 한다. 이 가상의 책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필터처럼 기능하면서, 어떤 요소들을 간직하고 그것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결정함으로써 새로운 텍스트들의 수용을 결정짓는다. 학생들은 선생이 전해주는 약간의 내용만으로도 두 내면의 책 사이에 벌어지는 토론에 관심을 갖기에 충분하며, 이 토론에서 작품은 양쪽 모두에게 단지 구실로 쓰이고 있을 뿐이다. 

이 내면의 책은 탈독서와 더불어 책에 관한 담론 공간을 불연속적이고 이질적으로 만든다. 우리가 읽었다고 생각하는 책은 사실은 다른 사람들의 책들과 무관한-물론 물질적으로는 우리가 손에 잡았던 바로 그 책과 같은 책이겠지만-, 우리의 상상에 의해 다시 손질된 텍스트 조각들의 잡다한 축적인 것이다. 누군가 자신들이 읽지 않은 책에 대해 편파적인 독법을 제의한다고 해서 그 독서가 왜곡되었다거나 흥미로울 게 없다고생각해서는 안된다. 그 책을 읽지 않았다는 점은 오히려 그들을 그 책에 대해 제대로 논평할 수 있는 특권적인 상황에 위치시킨다. 또한 그들의 그런 발언들이 만약 그들이 책 읽기를 시도했더라면 얻지 못했을 게 분명한 어떤 독창성을 그 책과의 만남에 가져준다고 해도 전혀 놀라지 않을 것이다.
 
제 3장 작가 앞에서
선생이라고 해서 자신이 말하는 책에 대해 반드시 잘 알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한데 그런 선생을 상대하는 것보다 더 곤란한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책에 대한 당신의 견해에 가장 깊은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자 당신이 진실을 말하는지 아닌지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사람, 즉 문제의 책을 당연히 읽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책의 저자를 상대하는 것이다. 

책에 대해 말하거나 그 책을 정학하게 기억함에 있어서 과연 작가가 우리보다 더 나은 위치에 있는가 하는 점이 생각과 달리 그리 확실치 않다. 작가라 해도 일단 글을 쓴 뒤 자신의 글로부터 분리된 뒤에는 다른 사람들 못지않게 그것들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그러나 그런 것보다도 우리가 특히 유념해야 할 점은, 어차피 두 사람의 내면의 책이 서로 부합될 수 없는 거라면 어떤 작가 앞에서도 긴 설명을 하려는 시도는 무용하며, 그가 쓴 내용을 환기시킬수록 오히려 그에게 다른 어떤 책 얘기를 하거나 아니면 다른 어떤 저자 얘기를 하는 듯한 느낌을 주어 그를 점점 더 고통스럽게 할 위험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어떤 저자에게 그가 쓴 어떤 책에 대해 읽지 않은 상태에서 얘기를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면 바로 세부 내용으로 들어가지 말고 좋게 말해주라. 결코 저자는 자신의 책에 대한 요약이나 논리 정연한 코멘트를 기대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런 것을 해주지 않기를 바란다. 단지 그는 사람들이 되도록 더할 수 없이 모호한 표현으로 자신이 쓴 것이 좋았다고 얘기해주길 기대할 뿐이다. 

제 4장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우리의 연애는 어린 시절부터 읽은 책들에서 많은 영향을 받는다. 그것은 소설의 주인공들이 연애 상대의 선택에 미치는 영향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도달 할 수 없는 이상형을 그려놓고 다른 사람들을 그 이상형에 맞추려고 한다. 더욱 미묘한 것은 우리가 좋아하는 책들이 남이 모르는 우리만의 세계를 디자인하고 있으며, 그 세계에 다른 사람이 등장인물의 자격으로 동참할 수 있기를 우리가 바라고 있다는 점이다.

상대와 동일한 독서를 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공통된 독서-동일한 비독서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를 하는 것, 이는 사랑의 감정이 움틀 수 있는 조건들 가운데 하나다. 바로 그래서 연애 초기 우리는 서로의 내면의 도서관이 가깝다는 점을 상대에게 느끼게 해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상대가 선호한 독서들을 파악하고 그의 내밀한 세계 속으로 가능한 한 깊이 들어가고자 노력함으로써 두사람의 내면의 책이 동일하다는 환상을 주기 위해 애쓰는 것은 누군가를 유혹할 필요가 있는 삶의 다양한 상황들에서, 타자에게 그와 우리가 동일한 문화 세계를 공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이상적으로 공유되는 사랑이란 어쩌면 타자를 구성하는 토대, 즉 타자의 가장 은밀한 책들에 이르는 길을 여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책들에 대해 우리가 타인들과 나누는 대화는 불행하게도 우리의 개인적 환상들에 의해 다시 손질된 조각들에 대한 대화일 것이다. 타자에게 끊임없이 그가 듣고 싶어하는 말들만 한다는 것,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타자로서의 그를 부인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타자 앞에 연약하고 불확실한 하나의 주체로 서기를 중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의 삶에 대해 질문을 던질 때 진정한 상대의 마음을 얻기에 이른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일 때 그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인물이 된다. 

제 3부 대처 요령

제 1장 부끄러워하지 말 것
앞서 살펴보았듯이 어떤 책에 대해 얘기한다는 것은 독서와는 별로 상관이 없다. 책을 꼭 읽지 않아도 우리는 그 책에 대한 분명한 관념을 가질 수 있고, 대강이 아니라 심지어는 꽤 내밀하게 그 책에 대한 얘기를 할 수 있다. 홀로 고립된 책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권의 책은 ‘집단 도서관’이라 불렀던 그 방대한 전체 속의 한 요소이며, 반드시 그 전체를 완전히 알아야만 그런 요소를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요는 이 집단 도서관에서 그 책이 차지하는 위치를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 규정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이 집단도서관의 특정 요소 하나를 읽지 않았다고 솔직히 털어놓고 인정하지 못할 어떤 이유도 없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부끄러움 없이 말할 수 있으려면 가장과 학교에 의해 강압적으로 전파되는 흠결 없는 문화라는 강박적인 이미지, 일생 동안 노력해도 일치시킬 수 없는 그 이미지로 부터 벗어나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진실보다는 자기 진실이 훨씬 더 중요하다. 우리의 내면을 억압적으로 지배해 우리 자신이 되는 것을 가로막는 것, 즉 교양 있는 사람으로 보여야 한다는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자만이 '자기 진실'에 이를 수 있다.

제 2장 자신의 생각을 말할 것
그러므로 용기만 있다면 자신이 어떤 책을 읽지 않았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말하지 못할 이유가 없고, 또 그 책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자제해야 할 이유도 전혀 없다. 어떤 책을 읽지 않았다는 것은 가장 흔히 있는 경우이며, 부끄러움 없이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진짜 중요한 것, 즉 책이 아니라 어떤 복합적인 담론 상황에 관심을 갖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어느 경우에도 책 자체는 변하지 않지만, 집단 도서관의 요소로서는 변화를 겪게 된다. 맥락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 그것은 책이란 영원히 고정된 것이 아니라 어떤 유동적인 오브제이며 그 유동성은 책을 중심으로 짜이는 권력 관계 전체와 관련이 있음을 상기하는 것이다. 저자도 변하고 책 역시 동일한 것으로 머무르지 않는다. 독자 역시 그렇다. 문제는 책 자체가 아니라, 그 책에 대해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담론 게임이다. 파괴적인 것은 다른 사람들과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지 못한 자신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텍스트의 유동성과 자기 자신의 유동성을 다 함께 인정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작품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제시하려 할 때 엄청난 자유를 부여해주는 중요한 패라고 할 수 있다. 

제 3장 책을 꾸며낼 것
책의 변화는 가치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내용’에도 관계된다. 내용 역시 안정된 것이 아니며 책에 대한 의견 교환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에 따라 상당한 변화를 겪는다. 이러한 유동성은 누구든 그것을 잘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읽지 않은 책의 창작자가 될 절호의 기회이다. 어떤 책에 대해 신중치 못한 언사를 하여 누가 그 말에 반박을 하더라도 착각을 했다고 말하면 그뿐이다. 아무리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책이라 해도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하나의 ‘화면 책’이요, 그 책 뒤에는 우리의 내면의 책이 숨어 있다. 

타자가 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여기서 타자란 곧 자기 자신이기도 하다-이야말로 우리가 읽었건 읽지 않았건 책들에 대해 좋은 여건에서 얘기를 할 수 있는 일차적 조건들 가운데 하나이다. 책들에 대한 담론에서 앎이란 북활실한 앎이며, 타자란 우리의 대화 상대들에게 투영된 우리 자신의 불안한 형상이다. 타자가 알 거라는 생각이 주는 두려움은 책들에 대한 진정한 모든 창작을 가로막는 족쇄와 같다. 사실은 비독자나 독자 모두가 그들이 원해서건 그렇지 않건 이미 책들을 꾸며나가는 끊임없는 과정 속에 들어가 있으며, 그러므로 진짜 문제는 거기에서 어떻게 빠져나오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런 과정의 폭과 역동성을 증가시키느냐 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보듯 우리가 얘기하는 책들은 가상의 어떤 완전한 독서를 통해 그 객관적 실제 내용을 되찾을 수 있는 실재하는 책들인 것만은 아니며, 각각의 책과 우리 무의식의 여러 잠재적 가능성의 교차에서 솟아오르는 ‘유령 책들’이기도 하다. 이 ‘유령 책들’은 물론 실재하는 책들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실재하는 책들보다 훨씬 더 우리의 대화와 몽상을 풍요롭게 해준다. 이 창조는 어떤 책에 대한 환기가 그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에게 떠올리는 메아리들을 바탕으로 이러우질 수 있다. 그것은 개인적인 것일 수도 있고 집단적인 것일 수도 있다. 그 책은 물론 원본(이는 정확히 어떤 책일까?)과 거의 상관이 없는 어떤 책이겠지만, 여러 내면 책들의 가정적 접점에 가능한 한 가장 근첩한 책이기도 하다. 

충분한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읽지 않은 어떤 책에 대해 말할 때 합리적이고 의식적인 사유를 한쪽에 제쳐둘 필요가 있다. 책과 우리의 사적인 관계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은 우리가 그것에 대해 지나치게 생각하지 않고, 우리의 무의식이 스스로를 표현하면서 언어의 열림이라는 그 특권적인 순간에 우리를 책과 결합시키는-또 이를 통해 우리 자신과 결합시키는- 그 은밀한 관계들을 환기하도록 내버려둘 때 더욱 더 큰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제 4장 자기 얘기를 할 것
작가나 화가에게 자연이 부차적인 위치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평가에게 문학이나 예술은 부차적인 위치에 있다. 그것들의 기능은 비평가에게 대상으로 쓰이는 것이 아니라 글쓰기의 자극제로 쓰이는 데 있다. 비평의 진정한 유일의 대상은 작품이 아니라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결국 비평은 작품과 아무런 관계가 없을 때 자신의 이상적 형식에 도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자기 얘기를 하는 것, 바로 이것이 비평 활동에 부여하는 궁극적인 목표이다. 

작품과 거리를 두라는 것, 바로 이것이 오스카 와일드가 책읽기와 문학 비평에 대한 성찰에서 부단히 되풀이 하는 주장이다. 그래서 그는 ‘나는 내가 논해야 하는 책은 절대 읽지 않는다. 너무 많은 영향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라는 도발적인 발언을 하기에 이른다. 책은 읽는 사람의 생각을 움직일 수 있고, 동시에 그가 가진 독창적인 부분으로부터 그를 멀어지게 할 수도 있다. 비평을 하기 위해 책 속으로 들어갈 때 따르는 위험은 자기를 희생하는 대가로 책의 어떤 가정적인 유익함을 얻기 위해 가장 진정한 자기 자신의 일부를 상실한다는 데 있다. 

우리가 분석한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들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책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얘기를 하는 것, 혹은 책들을 통해 자기 얘기를 하는 것-이것이 아마 책들에 대해 잘 말하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그런 상황들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달라진다. 접근 가능한 몇 가지 자료들에 입각하여 무엇보다 우선 중시해야 할 것은 바로 작품과 자기 자신, 그 둘 사이의 다양한 접점들이기 때문이다. 작품의 제목, 집단 도서관에서 그 작품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 그 작품을 회상하는 사람의 개성, 구두로나 글로 의견 교환이 이루어질 때의 분위기 등은 바로 작품에 지나치게 연연하지 않고 자기 얘기를 할 수 있게 해주는 구실들이다. 작품을 자기 탐구의 매체로 사용하고, 우리는 ‘실재’하는 책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두려워해야 할 것은 텍스트에 대한 거짓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거짓이다.

이상의 관찰은 읽지 않은 책에 관한 담론이 기회를 잘 이용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방어 목적으로 끌어들이는 개인적 차원의 말을 넘어, 자서전 같은 자기 발견을 위한 특별한 공간을 제공해준다는 사실을 잘 말해준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한 담론은 자기 발견의 가능성을 떠나서도, 우리를 창조적 과정 한가운데에 위치시킨다. 

에필로그
이 책에 우리가 마주한 변화는 그런 상황에서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법을 배우는 것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책과 맺는 관계의 뿌리 깊은 변화를 개시한다. 이 변화는 무의식적으로 작용하는 일련의 모든 금기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킬 수 있어야 가능하다. 이 금기들을 떨쳐버리지 않는 한 문학 텍스트라는 무한히 유동적인 대상에 귀를 기울이기란 불가능하다. 텍스트와 자기 자신에 대한 경청은 창조의 모든 가능성에 이르는 길을 열어주는 데 있다. 

자기 자신이 창조자가 되는 것이 이 책에서 우리가 일련의 예들을 바탕으로 행한 모든 사실 확인의 귀착점이며, 이는 내적 진전을 통해 잘못을 저지른다는 느낌으로부터 해방된 이들만이 참여할 수 있는 계획이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진 다른 창작 활동들에 비해 소박하긴 하지만 결코 그것들에 뒤지지 않는 진정한 창조 활동이라 할 수 있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창작의 요구에 부응하는 최초이 한 형태라고 한다면 교육을 담당하는 모든 이들에게 그런 학습에 가치를 부여해야 할 특별한 책임이 있다. 

한데, 학교에서 우리의 학생들은 책을 읽는 법, 즉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은 배우지만 묘하게 읽지 않은 책에 대해 의사 표현하는 법은 배우지 않는데, 이는 어떤 책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책을 읽어야 한다는 가정이 한 번도 의문시 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텍스트에 대한 존중과 수정 불가의 금기에 마비당하는데다 텍스트를 암송하거나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을 알아야 한다는 속박으로 인해, 너무나 많은 학생들이 자신의 내적 일탈 능력을 상실하고 상상력이 유익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상상력에 호소하는 것을 스스로 금해버린다. 

책이란 다시 읽을 때마다 다시 꾸며지는 것이란 점을 그들에게 알려주는 것은 여러가지 곤란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순간을 그들에게 제공해주는 것이다.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통찰력 있게 말할 줄 안다는 것은 책들의 세계를 훨씬 웃도는 가치가 있다. 많은 작가의 예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교양 전체는 담론과 그 대상 간의 연관을 끊고 자기 얘기를 하는 능력을 보이는 이들에게 열리는 것이다. 무엇보다 본질적인 것은은 창조의 세계를 그들에게 열어주는 것이다. 학생에게 가지 창작력을 느끼게 해주는 것보다 더 좋은 선물이 어디 있겠는가? 교육은 피교육자들이 작품들에 대해 충분한 자유를 누리면서 그들 자신이 작가나 예술가가 되도록 도와주는 방향을 지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