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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Ⅱ/기타

[미나비리스] '유리가 깨지는 듯한 섬뜩함' [양철북 1: 권터 그라스]

1999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양철북1(세계문학전집32)
카테고리 소설 > 독일소설
지은이 귄터 그라스 (민음사,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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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두 노동자의 모자를 쓴 사나이는ㅡ모자는 이제 그의 목덜미에 걸려 있었다ㅡ어느새 말 대가리 위로 가랑이를 넓게 벌리고 서 있었다. 말 대가리에서는 옅은 녹색의 조그마한 뱀장어들이 난폭하게 몸을 비틀면서 나왔다. (...) 그는 부두 노동자의 흉내를 내느라고 껄껄 웃으면서 사내다움을 과시했다. 부두 노동자는 작업을 거의 끝내면서 마지막으로 말의 귀에서 커다란 뱀장어 한 마리를 끄집어냈다. 뱀장어와 함께 말의 뇌수에서 하얀 오트밀같은 것이 방울져 떨어지자, 마체라트의 얼굴도 치즈 빛깔이 되었지만, 그래도 그는 뽐내는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p. 229~231

 이 책을 추천해주신 분의 말씀 그대로, 처음에는 정말 지루했지만 나중엔 점차 재밌어지는 이야기였다. 뭐 보기만 해도 입맛을 뚝 떨어뜨리는 말대가리와 뱀장어 사건 이야기도 그렇지만, 이 작가는 정말 미적감각을 추구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일단 주인공은 3살짜리 외모를 지닌 교활한 천재, 시대적 배경은 2차 세계대전이니 이 두 가지 설명으로 볼장은 다 본 셈이다. 1권에서는 일단 18살까지의 그의 생을 담았지만, 그가 글 속에서 은근히 자신의 여성편력을 자랑하는 폼을 보건대 저자는 일반 여자들이 품는 난쟁이에 대한 성적 환상을 충분히 재현해낸 듯하다. 이 글이 쓰여진 시대를 고려하면 참으로 파격적인 설정이 아닐 수 없다. 아무래도 '피지의 난쟁이'가 '양철북'을 현대에 맞게 패러디한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노래소리로 유리를 깬다는 초능력도 놀랍기는 마찬가지이다. 나중에 그 목소리를 서커스에 사용한다는 설정은 살짝 부자연스럽고 비효율적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설정 자체가 SF소설의 초기 같지 않은가! 아직 결말이 어떻게 나는지 보지는 못했지만, '아키라'같은 설정이 나왔으면 하고 살짝 기대되는 바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단치히의 세살짜리 몸뚱이를 지닌 시골소년 오스카는 아직 세상에 진저리남과 무기력함을 느끼고 있을 뿐이다. 첫사랑 마리아에 의해 어느정도 회복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는 너무 많은 자들의 죽음을 목격하지 않았는가. (그가 죽였던 죽이지 않았던간에.) 물론 그 입담이 매우 걸쭉해서 읽는 재미가 있긴 하지만, 시대가 시대이고 배경이 배경이니만큼 사람이 죽는 장면은 잔혹했고 처참했다. 오스카는 마치 영혼을 천국으로 올려보내는 아기천사 혹은 지옥으로 떨어뜨리는 꼬마악귀처럼 그 자리에서 북을 두들기고 있을 뿐이다. 마음대로 실컷 두들겨 부수어버릴 수 없는 사회의 대용품마냥.

 P.S '남자다움'을 과시하는 마체라트를 보고 정말 기가 찼다. 뭐든지 도전한다고 다 용기있는 사람은 아니다. 아무튼 주인공의 어머니가 죽은 것도 저 일이 계기가 된 것이었고, 본인은 저 일이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찌보면 마체라트의 행동은 히틀러가 하란다고 해서 그대로 따라하면서 은근히 자신들의 남자다움(!)을 과시했던 2차세계대전 당시의 독일인들을 상징하는 것일수도. 그런데 어머니의 죽음도 참 불쌍하긴 한데, 동시에 볼썽사납다는 느낌도 들었다. 말의 머리고기를 먹는 뱀장어는 역겹고, 남편과 사촌오빠한테 몇십년동안 번갈아 안기는 자신의 행태는 역겹지 않단 말인가.

1979년에 영화가 나온 적이 있었다고 한다. 보고 싶은데 청소년 관람불가가 찍힌 데다 우리나라에서 순순히 수입해올만한 내용이 아니라서 어디에서 구할 수 있을지 그저 막막하기만 하다(...) 오스카가 생각보다 잘생겼다 ㅎ


리뷰어 미나비리스(김정원) 블로그 '마호가니 서재에서 헤드폰을 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