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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Ⅱ/기타

서담쌤, 요약의 전설 2탄 [총, 균, 쇠:제레드 다이아몬드]



- 무기ㆍ병균ㆍ금속은 인류의 운명을 어떻게 바꿨는가

- 《총, 균, 쇠》는 ‘지리적 조건’이 지난 13000년간 전 세계인의 역사에 미친 영향을 밝히는 책



프롤로그 : 현대 세계와 불평등에 대한 의문을 푼다

민족마다 역사가 다르게 진행된 것은 각 민족의 생물학적 차이 때문이 아니라, 환경적 차이 때문이다. 지리 환경은 분명히 역사에 영향을 미친다. 문제는 그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그리고 과연 역사의 광범위한 경향도 지리적 환경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를 밝혀내는 일이다.


- “왜 우리 흑인들은 백인들처럼 그런 ‘화물’을 만들지 못한 겁니까?”
지구상의 각 지역마다 역사의 진행이 판이하게 달랐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최종 빙하기가 끝나고 13000년이라는 기간 동안 세계의 한편에서는 문자와 철기를 가진 상업 사회가 발달했고, 다른 곳에서는 문맹 상태의 농경 사회가 발달했으며, 또 다른 지역에서는 석기를 가진 수렵 채집민 사회가 발전했다.

그러한 역사의 불균형은 현대 세계에까지 길고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문자와 철기를 가진 사회들은 그런 편리하고 강한 힘을 발휘하는 이기(利器)를 갖지 못한 다른 사회들을 정복하거나 멸망시켰기 때문이다. 그러한 격차는 세계 역사를 이해하는 데 가장 기본적인 사실인데도 그 원인은 여전히 불투명하며 논쟁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지역 격차의 기원에 대한 불투명한 의문은 이미 25년 전에 한 인간의 소박한 모습으로 처음 내 앞에 나타났다. 1972년 7월에 내가 열대의 섬 뉴기니의 해변을 거닐고 있었을 때의 일이다. 생태학자인 나는 지금도 그곳에서 조류의 진화에 대해 연구를 하고 있다. 마침 남다른 정치가로 알려진 얄리가 그 부근을 지나가는 중이었다. 우연히도 그날 얄리와 나는 같은 방향으로 걷게 되었고, 그가 곧 나를 따라잡았다. 우리는 한 시간 동안 함께 걸으면서 줄곧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나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뉴기니를 벗어나 본 적도 없었고 교육도 고등학교까지밖에 못 받았지만 그의 호기심은 끝이 없었다. 그는 뉴기니의 새들에 관한 나의 연구에 대하여 알고 싶어했다.

나는 수백만 년에 걸쳐 다양한 조류가 뉴기니에 이주해 온 과정을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그는 자기 민족의 조상들이 과거 수만 년 동안 어떤 경로를 통하여 뉴기니에 도착했으며, 또 유럽의 백인들은 어떻게 지난 200년 사이에 뉴기니를 식민지로 만들 수 있었느냐고 질문했다.

2세기 전까지 모든 뉴기니인들은 아직도 ‘석기 시대에 살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유럽에서는 이미 수천 년 전 금속기(金屬器)에 자리를 내어준 석기를 그들은 여전히 사용하고 있었으며, 마을에는 중앙 집권적 정치 체제조차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그러다가 백인들이 들어왔고, 그들은 중앙 집권적 정치 체제를 강요했으며 쇠 도끼, 성냥, 의약품에서 의복, 청량 음료, 우산에 이르기까지 뉴기니인들도 금방 그 가치를 알 수 있는 물건들을 잔뜩 들여왔다. 뉴기니에서는 그러한 물건들을 통틀어 ‘화물’이라고 부른다.

“당신네 백인들은 그렇게 많은 화물들을 발전시켜 뉴기니까지 가져왔는데 어째서 우리 흑인들은 그런 화물들을 만들지 못한 겁니까?”

간단한 질문이지만 그것은 얄리가 경험한 삶의 핵심을 꿰뚫고 있었다. 그렇다. 평균적인 뉴기니인들의 생활 양식과 평균적인 유럽인이나 미국인의 생활 양식 사이에는 아직도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와 같은 생활 양식의 격차는 세계의 다른 여러 민족들 사이에도 존재한다. 간단해 보여도 얄리의 질문에 대답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역사학자들도 그 문제의 해답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으며 이제는 아예 그런 질문을 던지지도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얄리와 그런 대화를 나눈 이후로 나는 인류의 진화, 역사, 언어 등의 다른 여러 측면들에 대해 연구하고 집필해 왔다. 그리고 25년이 지난 지금 이 책을 통해 비로소 얄리의 질문에 대답해 보려고 한다.


- 인류 발전은 어째서 각 대륙에서 다른 속도로 진행되었을까?
얄리의 질문은 뉴기니인과 유럽 백인의 대조적인 생활양식에 국한되어 있었지만 이 문제를 확대시키면 현대 세계에 존재하는 더 큰 규모의 현저한 불균형도 내포하게 된다. 유라시아에서 발원한 여러 민족, 특히 아직도 유럽과 동아시아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북아메리카로 이주한 사람들이 현대 세계의 부와 힘을 독점하고 있다. 반면에 대부분의 아프리카인을 포함한 다른 민족들은 비록 유럽의 식민 통치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부와 힘에 있어서는 여전히 훨씬 뒤처져 있는 상태다. 또 다른 민족들, 가령 오스트레일리아, 남북아메리카, 아프리카 남단 등의 원주민들은 자기들의 땅을 모조리 빼앗기고 백인 이주민들의 손에 살해되거나 예속되고 심한 경우에는 아예 몰살당하기까지 했다.

그러므로 현대 세계의 불평등에 대한 질문들은 다음과 같이 재구성 될 수 있을 것이다. 부와 힘은 왜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분포하게 되었을까? 예를 들자면 어째서 아메리카,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들은 유럽 및 아시아 민족들을 죽이고 복속시키고 몰살하지 못했을까?


- 역사 진행의 차이는 환경적 차이 때문이다
기자들은 저자에게 한 권의 긴 책을 한 문장으로 요약해 달라고 요청하는 경우가 많다. 이 책에서 그와 같은 문장을 만들자면 다음과 같다. “민족마다 역사가 다르게 진행된 것은 각 민족의 생물학적 차이 때문이 아니라 환경적 차이 때문이다.”

물론 지리적 환경과 생태 환경이 사회 발달에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은 이미 오래전부터 해왔다. 그러나 오늘날의 역사학자들은 그러한 관점을 별로 존중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 관점이 틀렸다거나 너무 단순하다고 생각하고, 또는 환경 결정론으로 못 박아서 무시하거나 전 세계적인 불균형을 이해하려는 노력 자체가 너무 어렵다는 이유로 보류해 버린다. 그러나 지리 환경은 분명히 역사에 영향을 미친다. 문제는 그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그리고 과연 역사의 광범위한 경향도 지리적 환경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를 밝혀내는 일이다.

역사에는 광범위한 경향들이 실제로 존재하며, 그것을 설명하려는 탐구 과정은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생산적이기도 하다.



 

제1부 인간 사회의 다양한 운명의 갈림길

제1장 문명이 싹트기 직전의 세계 상황


- 인류 역사가 전개된 보정 연대는 B.C.11000년
각 대륙의 역사 전개를 비교하기에 적합한 출발선은 B.C.11000년경이다. 이 연대는 세계의 몇몇 지역에서 촌락 생활이 시작된 시기, 확실히 남북아메리카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으로 지금까지 밝혀진 가장 이른 시기, 홍적세 및 최종 빙하기의 말기, 그리고 지질학자들이 현세라고 부르는 시대의 초기 등과 대략 일치한다. 그로부터 몇 천 년 이내에 동식물의 가축화ㆍ작물화가 적어도 세계의 한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그 당시 과연 일부 대륙 사람들이 기타 대륙 사람들보다 먼저 출발했거나 분명한 이점을 갖고 있었을까?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바로 그렇게 먼저 출발한 데서 생긴 간격이 지난 13000년 동안 더욱 증폭되었고 바로 그것이 얄리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될지도 모른다.






제2장 환경 차이가 다양화를 빚어 낸 모델 폴리네시아

폴리네시아는 환경과 관련하여 인간 사회가 다양화되는 모습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좋은 예다.


- 모리오리족과 마오리족의 잔혹한 충돌
뉴질랜드에서 동쪽으로 800km정도 떨어진 채텀 제도에서 수세기에 걸쳐 살아오던 모리오리족은 1835년 12월에 갑자기 자유를 잃었다. 그해 11월 19일, 총과 곤봉과 도끼로 무장한 500명의 마오리족이 탄 배가 도착했고 12월 5일에는 다시 마오리족 400명이 더 왔다.

모리오리족과 마오리족 사이에서 벌어진 이 충돌의 잔혹한 결과는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일이었다. 모리오리족은 고립되어 있던 소수의 수렵 채집민으로, 지극히 간단한 기술과 무기밖에 없었다. 그들은 전쟁경험이 전무했고 강력한 지도층이나 조직력이 부족했다. 반면에 뉴질랜드의 북(北)섬에서 온 마오리족 침략자들은 격렬한 전쟁이 만성적으로 되풀이되는 조밀한 농경민 사회에 속해 있었다. 그들은 모리오리족보다 더 발전된 기술과 무기를 갖추었고 강력한 지도층의 지휘에 따라 움직였다. 그러므로 마침내 그 두 집단이 마주치게 되었을 때 마오리족이 모리오리족을 마구 도살할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모리오리족은 비극은 현대 세계와 고대 세계를 막론하고 벌어졌던 수많은 비극과 마찬가지로 좋은 장비를 갖춘 다수와 나쁜 장비를 갖춘 소수가 부딪친 사건이었다. 마오리족과 모리오리족의 충돌을 더욱 소름끼치게 만드는 것은 두 집단이 모두 1000년경에 뉴질랜드로 이주했던 폴리네시아 농경민의 후손이라는 점이다. 그로부터 머지않아 마오리족의 한 무리가 다시 채텀 제도로 이주하여 모리오리족이 되었던 것이다. 두 집단은 헤어진 후 몇 세기에 걸쳐 서로 반대 방향으로 발전했다. 북섬의 마오리족은 점점 더 복잡한 기술과 정치적 조직을 발달시켰고 모리오리족은 오히려 점점 더 단순한 기술과 정치적 조직으로 후퇴했다. 모리오리족이 수렵 채집민으로 되돌아가는 동안 북섬의 마오리족은 더욱 집약적으로 농업에 매달렸다.

그와 같은 정반대의 전개 과정이 결국 충돌 결과를 결정했다. 만약 이 두 섬의 사회가 각기 차등적으로 발전한 원인들을 이해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더 폭넓은 문제, 즉 각 대륙의 발전 양상이 서로 달랐던 이유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모델을 얻게 될 것이다.


- 인간의 환경 적응력 연구를 가능하게 한 자연 발생적 실험
모리오리족과 마오리족의 역사는 환경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단기간에 걸친 소규모의 자연 발생적 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길지 않은 기간 동안 엄청나게 다양한 환경을 가진 여러 섬에 이주민이 정착하게 되었으며, 그들은 모두 동일한 인간 사회에서 파생된 집단이었다. 모든 현대 폴리네시아인의 궁극적인 조상은 근본적 동일한 문화와 언어, 기술, 가축화ㆍ작물화된 동식물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폴리네시아의 역사는 우리가 인간의 적응력을 연구할 수 있게 해주는 자연 발생적 실험인 셈이다. 더구나 거기에는 우리가 그 밖의 다른 곳에서 인간의 적응력을 이해하려고 할 때마다 흔히 방해가 되는 요소, 즉, 여러 부류의 이주민들이 차례차례 밀려 들어와서 상황을 복잡하게 만드는 일도 전혀 없었다.

채텀 제도와 뉴질랜드의 환경 차이가 각각 모리오리족과 마오리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추적하는 일은 쉬운 편이다. 채텀 제도에 처음으로 이주한 선조 마오리족은 원래 농경민이었겠지만 마오리족의 열대 농작물은 채텀 제도의 한랭한 기후에서 자랄 수 없었다. 따라서 이주민들은 다시 수렵 채집민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채텀 제도는 비교적 작은 외딴섬들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전부 합쳐서 고작해야 2000명가량의 수렵 채집민밖에 살 수 없었다. 모리오리족은 채텀 제도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으며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야 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전쟁을 포기했고 남자 신생아의 일부를 거세함으로써 인구 과잉으로 인한 갈등의 소지를 줄였다. 그 결과 전쟁을 모르는 작은 집단이 유지되었고 그들의 기술과 무기는 단순했으며 강력한 지도층이나 조직력도 없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폴리네시아에서 가장 큰 섬들인 뉴질랜드의 따뜻한 북부는 폴리네시아인이 농업을 하기에 적합한 환경이었다. 뉴질랜드에 남아 있던 마오리족은 점점 그 수가 증가하여 10만을 넘어섰다. 그들은 국지적으로 인구 밀도가 높아져서 이웃 집단과 격렬한 전쟁을 만성적으로 벌였다. 잉여 농산물을 생산하여 저장할 수 있었으므로 기능 전문가, 추장, 겸업식 병사 등을 먹여 살릴 수도 있었고, 농작물을 기르고 싸우고 예술을 창작하기 위해 필요한 다양한 도구가 발달했다.

그리하여 모리오리족과 마오리족 사회는 똑같은 조상 사회로부터 갈라졌지만 서로 판이하게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다. 두 사회는 서로의 존재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살다가 여러 세기, 아마 500년 정도 지나간 후에야 비로소 다시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어느 날 바다표범을 사냥하던 오스트레일리아의 배 한 척이 뉴질랜드로 가는 길에 채텀 제도에 들렀다가 그곳의 소식을 뉴질랜드에 전했다.

“그곳은 바다고기와 조개가 풍부하고 호수에는 뱀장어가 가득하고 땅에서는 카라카 열매가 많이 난다. 사람은 많지만 싸울 줄도 모르고 무기도 없다.”
바로 그 소식 때문에 900명의 마오리족이 채텀 제도로 몰려갔던 것이다. 그 후의 결과는 짧은 기간 동안에도 환경이 경제, 기술, 정치 조직, 전쟁 기술 등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제3장 유럽이 세계를 정복한 힘의 원천

피사로가 아타우알파를 생포한 사건은 유럽인들이 신세계를 식민지로 만든 직접적 요인(군사 기술, 유라시아 고유의 전염병, 해상 기술, 중앙 집권적 정치 조직, 문자 등)의 예를 보여준다. 왜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유럽을 식민지로 만들지 못하고 그 반대 현상이 발생했을까를 밝힌다.


- 근대사의 가장 큰 충돌 아타우알파 생포 사건
근대에 이르러 가장 규모가 컸던 인구 이동은 유럽인의 신세계 이주와 그로 인하여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정복되거나 수적으로 감소하거나 대부분의 집단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일이었다. 가장 극적인 순간은 1532년 11월 16일 잉카의 황제 아타우알파와 스페인의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페루의 고지대 도시인 카하마르카에서 최초로 마주친 사건이었다. 스페인 정복자는 168명. 아타우알파는 수백만의 백성과 8만 대군.

그런데도 두 지도자가 얼굴을 맞대고 미처 몇 분이 지나기도 전에 피사로가 대뜸 아타우알파를 사로잡아 버렸던 것이다. 피사로는 그로부터 8개월 동안이나 이 인질을 붙잡아 놓고 나중에 풀어준다는 약속하에 역사상 가장 많은 몸값을 뜯어냈다. 피사로는 가로 6.7m, 세로 5.2m에 높이 2.4m가 넘는 방을 가득 채울 만큼의 황금을 몸값으로 받은 후에 약속을 저버리고 아타우알파를 처형하고 말았다.


- 어째서 스페인은 원주민들을 참패시킬 수 있었을까?
어째서 아타우알파의 압도적인 대군이 피사로를 사로잡아 죽이지 못하고 반대로 오히려 피사로가 아타우알파를 사로잡고 수많은 신하들을 죽일 수 있었을까? 어째서 아타우알파가 스페인에 가서 카를로스1세를 생포하지 못하고 반대로 피사로가 카하마르카로 와서 아타우알파를 생포하게 되었을까?

피사로의 군사적 이점은 스페인의 쇠칼을 비롯한 무기들, 갑옷, 총, 말 따위였다. 그러한 무기에 대항하여 싸움터에 타고 갈 동물도 갖지 못한 아타우알파의 군대는 겨우 돌, 청동기, 나무 곤봉, 갈고리 막대, 손도끼, 그리고 물매와 헝겊 갑옷 등으로 맞설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장비의 불균형은 유럽인과 아메리카 원주민 및 기타 민족들 사이의 수많은 대결에서도 역시 결정적이었다.


- 강력한 정복 요인 말, 쇠, 무기, 총, 갑옷
피사로는 어쩌다가 카하마르카로 오게 되었을까? 어째서 반대로 아타우알파가 스페인을 정복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피사로는 유럽의 해양 기술 덕분에 카하마르카에 올 수 있었다. 그 기술로 만들어진 배가 있었기 때문에 스페인에서 대서양을 건너 파나마로 왔으며 파나마에서 다시 태평양을 따라 페루로 넘어왔던 것이다. 아타우알파에게는 그러한 기술이 없었으므로 남아메리카를 벗어나 해외로 팽창할 수가 없었다.

피사로가 카하마르카에 오기까지는 배와 더불어 중앙 집권적 정치 조직도 필요했다. 그래야만 스페인이 자금을 마련하고 그 배들을 건조하고 선원들을 고용하고 장비를 구입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스페인인들이 페루에 올 수 있었던 또 한 가지 요인은 문자의 존재였다. 정보는 입으로 전하는 것보다 문자를 사용할 때 훨씬 더 멀리, 더 정확하게, 더 자세히 전파할 수 있다. 콜럼버스의 항해와 코르테스의 멕시코 정복에 대한 정보가 곧 스페인으로 전해지면서 스페인인들이 신세계로 밀려들었다.

그리고 직접적인 정복 요인
말 : 고대 전쟁에서 말의 군사적 역할은 지프나 셔먼 탱크에 필적하는 것
쇠, 총, 갑옷






 

제2부 식량 생산의 기원과 문명의 교차로



제4장 식량 생산의 기원

식량 생산은 간접적으로 총기, 병원균, 쇠가 발전하는 데 필요한 선행 조건이었다. 그러므로 각 대륙의 민족들이 언제 어떻게 농경민이나 목축민이 되었는가 하는 시기와 지리적 차이는 그 이후 각 민족의 대조적인 운명을 결정한 주요 원인이었다.


- 식량 생산의 시작 시기와 지리적 변동 관계
현생 인류의 조상들은 대부분의 기간 동안 지구상의 모든 인간들을 블랙 풋 인디언들이 19세기까지 그랬던 것처럼 순전히 야생 동물을 사냥하거나 야생 식물을 채집하는 것만으로 먹거리를 장만했다. 그러다가 몇몇 민족이 비로소 식량 생산이라는 것(즉 야생 동식물을 가축화ㆍ작물화하여 그 가축과 농작물을 먹는 일)을 시작한 지는 아직 11000년도 채 안 된다. 식량 생산이 시작된 시기는 민족마다 달랐다. 식량 생산은 간접적으로 총기, 병원균, 쇠가 발전하는 데 필요한 선행 조건이었다. 그러므로 각 대륙의 민족들이 농경민이나 목축민이 되었느냐 말았느냐, 또 되었다면 그 시기는 언제였는가 하는 지리적 변동은 그 이후 각 민족의 대조적인 운명을 설명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 정복과 식량 생산 사이의 주요 연관성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동물종과 식물종들만 선택하여 키움으로써 그것들이 일정한 넓이의 땅에서 전체 생물 자원의 0.1%가 아니라 90%를 차지하게 한다면 단위 면적당 얻을 수 있는 식품 열량은 훨씬 더 많아진다. 따라서 같은 면적의 땅에 의존하여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의 수도 수렵 채집민보다 목축민이나 농경민이 훨씬 더 많아진다(10~100배). 이 같은 숫자의 힘은 바로 식량을 생산하는 부족이 수렵 채집민 부족에 비해 유리했던 여러 가지 군사적 이점 중에서 첫 번째로 꼽을 만했다. 

한편 그보다 간접적인 효과는 식량 생산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택해야 하는 정주형 생활의 영향들이다. 수렵 채집민은 야생 먹거리를 찾아서 이동하는 경우가 많지만 농경민은 밭과 과수원 주변을 떠날 수 없다. 그리하여 일단 거처가 고정되면 그때부터는 산아(産兒) 간격을 단축시킬 수 있기 때문에 인구 밀도가 높아진다.

수렵 채집민의 어머니가 야영지를 옮길 때는 몇 가지 소지품과 함께 단 한 명의 아이만을 옮길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먼저 태어난 아이가 뒤처지지 않고 부족을 따라갈 수 있을 만큼 걸음이 빨라질 때까지는 다음 아이를 낳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4년 터울을 유지한다.


- 정착 생활에 따른 가축화와 작물화의 이점과 그 영향
정주형 생활→식량 저장→전업식 전문가→조세→복잡한 정치 단위
가축화된 대형 포유류는 19세기에 철도가 개발될 때까지 육상 운송의 주요 수단으로 이용됨으로써 인간 사회를 더욱 혁신시켰다. 동식물의 가축화ㆍ작물화가 정복 전쟁에 가장 직접적으로 기여한 것은 유라시아의 말이었다. 고대 전쟁에서 말의 군사적 역할은 지프나 셔먼 탱크에 필적하는 것이었다. 정복전쟁에서 말에 못지않게 중요했던 것은 가축화된 동물과 더불어 인간 사회에서 진화한 병원균이었다. 천연두, 홍역, 인플루엔자 등의 전염병들은 원래 동물들에게 퍼져 있던 매우 유사한 조상 병원균에서 나온 것인데, 각각 돌연변이를 거쳐 인간의 병원균으로 특수화되었다.

간단히 말해서 동식물의 가축화와 작물화는 곧 훨씬 더 많은 식량과 조밀한 인구를 의미했다. 그 결과 잉여 식량이 생겼고 또한 일부 지역에서는 동물을 이용하여 그와 같은 잉여 식량을 운반할 수 있는 수단이 생겨났다. 그 두 가지는 정치적으로 중앙 집권화되고 사회적으로 계층화되고 경제적으로 복잡하고 기술적으로 혁신적인 정주형 사회로 발전하는 데 필요한 선행 조건이었다. 그러므로 가축화ㆍ작물화된 동식물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는, 유라시아에서 제국, 문자, 쇠 무기 등이 제일 먼저 발달했고 다른 대륙에서는 그보다 늦어지거나 끝까지 발달하지 못했던 이유를 설명해 주는 궁극적 원인이 된다. 말과 낙타의 군사적 쓰임새와 동물에게서 얻은 병원균의 살상력을 마지막으로, 우리가 앞으로 자세히 살펴보게 될 식량 생산과 정복 사이의 여러 연관성들이 드러났다.






제5장 인류 역사가 갈라놓은 유산자와 무산자


- 지리적, 시기적 차별성에 따른 수렵 채집민의 식량 생산
식량 생산이 독립적으로 발전한 곳은 세계의 몇 지역에 불과했으며 그나마도 각각 시기가 크게 달랐다. 일부 이웃 지역의 수렵 채집민들은 그 같은 핵심 지역으로부터 식량 생산을 배웠고 기타 이웃 지역의 사람들은 그 핵심 지역의 식량 생산자들로 교체되었으며, 역시 각각의 시기는 크게 달랐다. 마지막으로, 일부 지역의 사람들은 생태학적으로 식량 생산에 적합한 곳인데도 선사 시대에 농업을 시작하지도 습득하지도 못했다. 근대에 와서도 바깥 세상의 물결에 휩쓸릴 때까지 수렵 채집민의 생활을 고수했다. 그리하여 식량 생산을 일찍 시작한 지역의 민족들은 총기, 병원균, 쇠를 발전시키는 방향으로도 일찍 출발한 셈이었다. 그 결과는 역사의 유산자와 무산자 사이의 수많은 충돌이었다.

식량 생산이 시작된 시기와 양상이 이처럼 지리적으로 달랐던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선사 시대에 대한 가장 중요한 질문 가운데 하나인 이 질문이 바로 이제부터 살펴볼 다섯 장의 주제가 될 것이다.


6장, 7장, 8장은 생략해도 내용을 이해하는 데 큰 지장이 없네요~




제9장 선택된 가축화와 '안나 카레니나의 법칙'


- 행복해지기 위해 필요한 수많은 성공 요소들
가축화할 수 있는 동물은 모두 엇비슷하고 가축화할 수 없는 동물은 가축화할 수 없는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 어디선가 그런 말을 읽은 듯 하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건 당연한 일이다. 그 문장에서 몇 마디만 바꾸면 바로 톨스토이의 위대한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 나오는 유명한 첫 문장이 되기 때문이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

우리는 흔히 성공에 대해 한 가지 요소만으로 할 수 있는 간단한 설명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실제로 어떤 중요한 일에서 성공을 거두려면 수많은 실패 원인들을 피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안나 카레니나의 법칙’은 인류사에서 지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동물의 가축화에 대해 설명해 준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얼룩말이나 페카리(열대 아메리카산 멧돼지)처럼 가축화에 적합해 보이는 수많은 대형 야생 포유류가 가축화되지 못했다는 점, 그리고 가축화에 성공한 가축들은 거의 대부분이 유라시아산이었다는 점이다.


- 고대의 가축화된 대형 초식 동물
가축화된 포유류의 중요성은 대형 육서(陸棲) 초식 동물의 종 수가 놀라울 만큼 적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대형’이라는 말을 ‘체중 45kg 이상’이라고 정의한다면 20세기 이전에 가축화된 대형종은 모두 14종에 불과하다. 이 ‘고대 14종’ 중에서 9종은 지구상의 한정된 지역에서만 중요한 가축이 되었다(단봉낙타, 쌍봉낙타, 라마와 알파카, 당나귀, 순록, 물소, 야크, 반텡, 가우어). 전 세계에 두루 퍼져 중요한 가축이 된 것은 나머지 5종뿐이다. 이 ‘주요 5종’의 가축화된 포유류가 바로 소, 양, 염소, 돼지, 말이다.


- 고대의 대형 포유류 14종이 유라시아에 집중된 이유
고대 14종의 야생 조상들은 지구상에 고르게 분포되어 있지 않았다. 남아메리카에는 1종밖에 없다. 북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는 단 1종도 없다. 특히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 가축화된 토종 포유류가 없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오늘날 많은 관광객이 아프리카를 찾는 이유가 그곳에 야생 포유류가 풍부하고 다양하기 때문인데 말이다. 그와 대조적으로 고대 14종 중에서 13종의 야생 조상은 모두 유라시아에 국한되어 있었다.
이렇게 야생 조상종이 대륙마다 매우 고르지 않게 분포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다른 대륙이 아니라 유라시아 사람들이 총기, 병원균, 쇠를 갖게 된 중요한 한 가지 요인이기도 했다.


- 영원히 야생 상태로 남아 있을 운명?
148종에 달하는 전 세계의 대형 야생 초식성 육서 포유류 중에서 겨우 14종만이 시험을 통과했다. 나머지 134종은 왜 떨어졌을까? 그 동물들에 대해 프랜시스 갤턴이 ‘영원히 야생 상태로 남아 있을 운명’이라고 했던 것은 어떤 조건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을까? 그 대답은 ‘안나 카레니나의 법칙’에 부합된다. 야생 후보종이 가축화되기 위해서는 많은 특성을 갖추어야 한다. 이 필수적인 특성들 중에서 단 한 가지 만 결여되어도 행복한 결혼을 만드려는 노력이 실패하는 것처럼 가축화의 노력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가축화가 실패하는 원인을 적어도 6가지는 찾을 수 있다.

① 식성 : 동물이 생물자원으로 환원되는 효율은 10% 수준. 체중 450kg의 소를 키우기 위해서는 옥수수 4500kg이 필요. 체중 450kg의 육식 동물을 키우기 위해서는 옥수수 45000kg을 먹고 자란 초식 동물 4500kg이 필요. 코알라는 즐겨 먹는 식물을 너무 까다롭게 고집을 한다.
② 성장 속도 : 가축은 빨리 성장해야만 사육할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고릴라와 코끼리는 기특할 정도로 먹이를 가리지 않고 많은 고기를 얻을 수 있는데도 불합격이다. 고릴라나 코끼리가 다 성장하려면 15년.
③ 감금 상태에서 번식시키는 문제 : 안데스의 야생 낙타 비쿠냐. 털이 어떤 것보다 섬세하고 가벼워서 고급. 비쿠냐들은 교미를 하기 전에 길고 복잡한 구애 과정을 거치는데, 감금 상태에서는 이 의식을 행하기가 어렵고 수컷들끼리는 사납게 싸우는 습성이 있다. 치타.
④ 골치아픈 성격 : 일부 대형 동물 성질이 거칠고 위험. 회색곰. 아프리카 들소. 하마
⑤ 겁먹는 버릇 : 어떤 종들은 신경이 예민하고 발이 빠르며 위협을 느끼자마자 즉각 도망친다. 가젤
⑥ 사회적 구조 : 각자 세력권을 갖고 혼자 살아가는 동물들은 몰고 다니기가 불가능. 자기들끼리 싸우고 인간을 기억하지 않으며 본능적으로 복종하지도 않는다.


-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
인간과 동물의 결혼이 대부분 불행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동물의 식성, 성장 속도, 짝짓기 습성, 성격, 겁먹는 버릇, 그리고 사회 조직의 여러 가지 뚜렷한 특징 등 수많은 이유들 중에서 한 가지 이상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야생 포유류 중에서 낮은 비율만이 인간과 더불어 행복한 결혼을 할 수 있었다. 이들은 그 모든 항목에서 합격점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유라시아인들에게는 기타 대륙 사람들에 비해 가축화할 만한 대형 야생 초식성 포유류가 훨씬 더 많았다. 그 같은 결과가 나오게 된 것, 그리고 그로 인해 유럽 사회가 대단히 유리해진 것은 바로 포유류의 지리, 역사, 생태 등 세 가지 기본적인 현실 때문이었다.






제10장 대륙의 축으로 돈 역사의 수레바퀴

유라시아의 농업이 아메리카 원주민이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인의 농업에 비해 더 빠르게 전파되었던 것은 유라시아의 문자, 야금술, 기술, 제국 등이 더 신속하게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차이점들은 남북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축의 방향과 대조되는 유라시아 축의 방향을 반영하고 있다.



- 식량 생산 전파의 주요 경로
세계 지도에서 각 대륙의 모양과 방향을 비교해 보라. 아주 분명한 차이를 발견하고 놀라게 될 것이다. 남북아메리카는 남북의 길이(약 14500km)가 동서보다 훨씬 길다. 동서 폭은 가장 넓은 곳도 4800km 정도밖에 안 되고 파나마 지협에서는 64km까지 좁아진다. 다시 말해 남북아메리카의 주요 축은 남북 방향이다. 이보다는 덜 극단적이지만 아프리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와 대조적으로 유라시아의 주요 축은 동서 방향이다. 그렇다면 각 대륙 축의 방향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차이는 인류 역사에 과연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앞서 여러 장에서 우리는 식량 생산의 기원이 총기, 병원균, 쇠의 탄생에서 나타난 지리적 차이를 이해하는 데 있어 핵심적 요소가 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식량 생산의 전파 과정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왜냐하면 제5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식량 생산이 독립적으로 시작된 곳은 전 세계에 고작 아홉 개, 어쩌면 다섯 지역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 위도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 유전자 조건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농작물은 왜 그렇게 전파속도가 빨랐을까?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의 일부분은 바로 이  장의 도입부에서 이야기했던 유라시아의 동서 축이다. 같은 위도 상에 동서로 늘어서 있는 지역들은 낮의 길이도 똑같고 계절의 변화도 똑같다. 그리고 일치하는 정도는 좀 덜하지만 질병, 기온과 강우량의 추이, 생식지나 생물 군계(生物群系) 등도 서로 비슷한 경향이 있다.

예를 들자면 이탈리아 남부, 이란 북부, 일본 등은 위도상의 위치가 같지만 동서 방향으로 많게는 6400km까지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기후는 남쪽으로 겨우 1600km 떨어진 지역보다도 서로 더 비슷하다.

식물의 발아, 성장, 질병에 대한 저항력 등은 바로 기후의 그 같은 특성들에 적응하고 있다. 철따라 달라지는 낮의 길이, 기온, 강우량 등은 종자가 발아하고, 묘목이 성장하고, 다 자란 식물이 꽃, 종자, 과일 등을 발육시키도록 자극하는 신호가 된다. 각각의 식물들은 자기가 처한 환경 속에서 진화되었으므로 그 환경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계절적 추이의 신호에 반응하도록 자연선택을 통해 유전적 프로그램이 입력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같은 추이는 위도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밭에 심어진 위도와 일치하지 않은 유전적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는 식물에게는 화가 미치리라!


- 역사의 수레바퀴는 각 대륙의 축을 중심으로 회전했다
각 대륙에 따라 달랐던 축의 방향은 식량 생산의 확산뿐만 아니라 기타 기술이나 발명품의 확산에도 영향을 미쳤다. B.C.3000년경 서남아시아 또는 그 부근에서 발명된 바퀴는 동서로 신속하게 전파되어 불과 수세기 동안 유라시아의 많은 지역으로 퍼졌다. 반면 선사 시대에 멕시코에서 독립적으로 발명되었던 바퀴는 안데스까지 남하하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B.C.1500년 이전에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서부에서 개발된 알파벳의 원리도 약 1000년 동안 서쪽으로는 카르타고까지, 동쪽으로는 인도 아대륙까지 전파되었지만 선사 시대에 중앙아메리카에서 꽃을 피웠던 문자 체계들은 그로부터 적어도 2000년 동안은 안데스 일대에 도달하지 못했다.

이렇게 유라시아의 농업이 아메리카 원주민이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인들의 농업에 비해 더 빠르게 전파되었던 것은 유라시아의 문자, 야금술, 기술, 제국 등이 더 신속하게 확산되는 데에도 일조했다.

물론 이 같은 차이점들을 지적한다고 해서 반드시 분포 지역이 넓은 농작물일수록 더 우수하다고, 또는 그 차이점들을 보면 유라시아의 초기 농경민들이 훨씬 현명했음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 차이점들은 다만 남북아메리카나 아프리카 축의 방향과 대조되는 유라시아 축의 방향을 반영하고 있을 뿐이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이 축들을 중심으로 회전했던 것이다.

 



에필로그 : 과학으로서의 인류사의 미래

나는 인간 사회에 대한 역사적 연구도 공룡에 대한 연구 못지않게 과학적일 수 있음을, 그리고 그것은 어떤 일들이 현대 세계를 형성했고 또 어떤 일들이 우리의 미래를 형성하게 될 것인지를 가르쳐줌으로써 오늘날의 우리 사회에 보탬이 될 것임을 낙관하고 있다.


- 인간 사회의 궤적에 영향 미치는 환경적 요소들
얄리의 질문은 인류가 처한 현상황 및 홍적세 이후 인류사의 핵심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이제 지구상의 대륙들을 훑어보는 짧은 여행을 끝마친 지금, 얄리에게 어떤 대답을 해주어야 할까?

나 같으면 얄리에게 이렇게 말하겠다. 각 대륙의 사람들이 경험한 장기간의 역사가 서로 크게 달라진 까닭은 그 사람들의 타고난 차이 때문이 아니라 환경의 차이 때문이었다고. 인간 사회의 궤적에 영향을 미치는 무수히 많은 요소들 중에 다음 네 가지가 가장 중요한 차이점인 듯하다.

첫 번째는 가축화ㆍ작물화의 재료인 야생 동식물의 대륙간 차이다.

두 번째 차이는 확산과 이동의 속도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이고, 이것 역시 대륙마다 크게 달랐다. 확산과 이동속도는 유라시아에서 가장 빨랐는데, 그것은 유라시아의 주요 축이 동서 방향이며 생태적 지리적 장애물도 비교적 적기 때문이었다. 아프리카의 확산 속도는 유라시아에 비해 느렸고, 특히 남북아메리카에서는 더욱 느렸는데, 그것은 이들 대륙의 주요 축이 남북 방향이며 생태적 지리적 장애물도 많기 때문이었다.

세 번째 요인들은 바로 각 대륙 ‘사이’의 확산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인데, 이것들도 가축 작물과 기술을 축적하는 데 보탬이 될 수 있다. 어떤 대륙은 다른 대륙에 비해 더 많이 고립되어 있고, 따라서 대륙간 확산의 난이도 역시 각각의 경우에 따라 달라졌다.

네 번째 요인들은 각 대륙의 면적 및 전체 인구 규모의 차이다. 면적이 넓거나 인구가 많다는 것은 곧 잠재적인 발명가의 수도 많고, 서로 경쟁하는 사회의 수도 많고, 도입할 수 있는 혁신의 수도 많다는 뜻이다. 그리고 늘 혁신적인 물물을 도입하고 보존해야 한다는 압박감도 그만큼 커지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회는 대개 라이벌 사회에 의해 제거되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네 가지 요인들은 환경과 관련된 크나큰 차이점들로, 객관적인 측정이 가능하며 여기에는 논쟁의 여지도 없다. 


- 대륙 간의 차이 요인들을 수치 자료로 남기는 작업
얄리의 질문에 대한 이 같은 대답들은 얄리가 원했던 것보다 훨씬 길고 복잡했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은 오히려 너무 짧고 지나치게 단순화 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13000년에 걸친 모든 대륙의 역사를 600쪽 정도의 이 책 속에 압축하려면 되도록 간략하게 단순화시킬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같은 압축에도 장점이 있어서 그러한 단점을 상쇄시킨다. 즉, 장기적 안목에서 여러 지역을 한꺼번에 비교하다 보면 어느 한 사회의 단기간을 연구하는 것으로는 기대하지 못할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 문화적 차이는 환경적 차이의 산물이다
과학 분야 중에서 역사(歷史)가 그리 중요하지 않고 작용하는 변수들도 소수에 지나지 않은 분야의 문제들을 이해하는 것보다 인류사를 이해하는 것이 훨씬 어렵다는 점은 나도 시인한다. 그러나 몇몇 분야에서는 이미 역사적인 문제들을 분석하는 데 효과적인 방법론들을 속속 얻어냈다. 그리하여 공룡, 성운, 빙하 따위의 역사는 오늘날 일반적으로 인문학보다 과학에 더 가까운 분야라는 인정을 받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내성(內省)을 통하여 훨씬 더 많은 통찰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은 공룡의 행동이 아니라 다른 인간들의 행동에 대해서다. 따라서 나는 인간 사회에 대한 역사적 연구도 공룡에 대한 연구에 못지않게 과학적 일 수 있음을, 그리고 그것은 어떤 일들이 현대 세계를 형성했고 또 어떤 일들이 우리의 미래를 형성하게 될 것인지를 가르쳐줌으로써 오늘날의 우리 사회에도 보탬이 될 것임을 낙관하고 있다.



총 균 쇠 - 10점
제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김진준 옮김/문학사상사

리뷰어 : 서담쌤
소   개 : 네이버 카페 책을 말하다 카페지기
책취향 : 역사, 철학, 인문고전 ,사회과학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