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발췌하는 독서노트, 다시 꾸준히 써보자고 결심한다. 은유 작가의 <쓰기의 말들>은 그녀가 수집한 글쓰기에 대한 문장들과 그를 둘러싼 작가의 생각, 에피소드 등을 담고 있다. 중반까지는 후루룩 읽었는데 이후는 집중력이 흐려졌는지 조금 인내하면서 읽어야 했다. 필명(은유) 탓인지 젊은 문체라고 생각했는데, 책 속 에피소드를 봐서는 꽤 나이도 있으신 듯하다. 계속해서 이런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이 존경스럽다. 글쓰기를 통해 사회 문제(세월호, 밀양 송전탑 등)를 조명하는 노력도 많이 하시는 듯하다. 여러모로 본받을 점이 많은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이하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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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기의 문장들은 서로 충돌하는 내용을 담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글쓰기가 막히는 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저마다의 진실값을 갖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프롤로그) -18
나 좋을 대로 사는 건 내 선택과 책임인데 아이에게는 늘 뭔가 미안했다. 남들처럼 학원을 보내지도 않고 숙제를 봐 주지 못해 불안했다. 그런데 여러 사람이 글로 쓴 구체적 일상, 내밀한 고백, 치열한 물음을 읽고 말하고 곱씹으며 나도 모르게 불안증이 가셨다. 성적과 행복이 비례하지 않아서 안도한다는 게 아니라, 삶은 성적이나 취직 같은 한두 가지 변수로 좋아지거나 나빠질 만큼 단순하거나 만만하지 않다는 것, 부단한 사건의 이행과정이지 고정된 문서의 취득 수집이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37
배산임수한 전원주택에서 사는 사람이 쓸 수 있는 글이 있고, 한 평 고시원에서 사는 사람에게 나오는 글이 있다. 같은 여자라도 아이 둘 키우며 일하는 주부인 내가 감각하는 세상과 연구실에서 종일 보내는 교수가 접속하는 세상이 다를 것이다. 그렇다면 쓸 수 있는 글도 다르다. 남을 부러워하지 말고 자기가 발 디딘 삶에 근거해서 한 줄씩 쓰면 된다. -49
내 안에 파고들지 않는 정보는 앎이 아니며 낡은 나를 넘어뜨리고 다른 나, 타자로서의 나로 변화시키지 않는 만남은 체험이 아니다.(황현산) -50
읽고 쓰며 묻는다. 몸으로 실감한 진실한 표현인지, 설익은 개념으로 세상만사 재단하고 있지는 않는지. 남의 삶을 도구처럼 동원하고 있지는 않는지. 앎으로 삶에 덤비지 않도록, 글이 삶을 초과하지 않도록 조심한다. -51
글을 쓰다보면 꼭 사랑에 매달리는 사람처럼 구질구질하고 구차해질 때가 많다. 내가 아는 걸 다 설명하고 싶고 감정을 다 드러내고 싶고 내 생각을 더 헤아려 달라고 조르고 싶다. 읽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픈 욕심이 넘치지, 글이 안 끝난다.
그런데 읽는 사람의 입장이 되면, 끝나지 않는 글이 고역이다. 중언부언 반복되고 추상적이고 장황하고 어수선한 글은 매력이 없다. 뻔한 얘기로 채워진 글은 지루하다. 정보만 많은 글은 눈이 뻑뻑해진다. 이젠 점검한다.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주례사 같은 글을 쓰고 있지는 않는지. 적절한 자리에 마침표가 딱 찍힌 글인지. -53
있어도 괜찮을 말을 두는 너그러움보다, 없어도 될 말을 기어이 찾아내어 없애는 신경질이 글쓰기에선 미덕이 된다.(이태준) -66
남의 글에서는 잘 보이고 내 글에서는 안 보이는 게 슬프지만, 암튼 불순물고 첨가물은 몸에도 나쁘고 글에도 해롭다. 화려한 요소가 얼마나 많은가가 아니라 불필요한 요소가 얼마나 적은가가 글의 성패를 가른다. -67
사랑에 빠진 남자는 자신이 읽는 모든 책에서 사랑하는 여인의 모습을 찾아보게 된다.(발터 벤야민) -78
삶에서, 의미란 순간적인 것이 아니다. 의미는 관계를 짓는 과정에서 발견된다.(존 버거) -92
나쁜 글이란 무엇을 썼는지 알 수 없는 글, 알 수는 있어도 재미가 없는 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것을 그대로만 쓴 글, 자기 생각은 없고 남의 생각이나 행동을 흉내 낸 글, 마음에도 없는 것을 쓴 글, 꼭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도록 쓴 글, 읽어서 얻을 만한 내용이 없는 글, 곧 가치가 없는 글, 재주 있게 멋지게 썼구나 싶은데 마음에 느껴지는 것이 없는 글이다.(이오덕0 -127
자서전은 수치스러운 무언가를 드러낼 때에만 신뢰할 수 있다.(조지 오웰) -141
글 쓰는 것은 타인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아니 될 수도 있는데, 밥 짓는 것은 ‘반드시’ 도움이 된다. 그게 왜 사는지 모르겠는 불확실한 삶에서 잠시나마 명징한 위안을 준다. 문득 김밥 같은 글을 쓰고 싶어진다. 결과물을 남기지 않고 먹어 치우는 글. 좋은 음악과 기분으로 몸 상태를 조율하고 내 맛있는 김밥을 남에게도 먹여 주고픈 마음으로 쓴다면, 한 편의 글이 김밥 한 줄의 구원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155
정말로 진지한 소설에서는 진정한 갈등이 여러 인물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독자와 작가 사이에서 벌어진다.(블라디미르 나보코프) -189
나는 언제 좋은 사람이 되고 언제 나쁜 사람이 되는지 나이를 먹으면서 알게 됐다. 나쁜 사람이 될 때는 배고프고 피로할 때다. 사소한 일에도 짜증이 올라온다. 오장육부가 언어 중추를 쥐락펴락한다. 좋은 사람이 될 때는 글을 쓸 때다. 사소한 것이라도 찬찬히 살피고 다르게 보려고 애쓴다. 한 줄 한 줄 밀고 나가도 찬찬히 살피고 다르게 보려고 애쓴다. -191
개인적 경험을 끌어올 때는 그 자기 노출에 보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사례가 꼭 필요한가 점검하는 나름의 기준이 있다. ‘과시인가 소통인가.’ 내 경험이 남들에게 도움을 주는가. 뻔뻔한 자기자랑이나 험담에 머물지는 않는가. 타인의 삶으로 연결되거나 확장시키는 메시지가 있는가. 자기 만족이나 과시를 넘어 타인의 생각에 좋은 영향을 준다면 자기 노출은 더 이상 사적이지 않다. -199
글쓰기는 냇물에 징검돌을 놓는 것과 같다. 돌이 너무 촘촘히 놓이면 건너는 재미가 없고, 너무 멀게 놓이면 건널 수가 없다.(이성복) -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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