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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Ⅰ/독서노트

관계의 심리학-이철우

관계의 심리학
저자 : 이철우
출판 : 경향미디어 2008.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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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와 친해질 때 좋은관계가 시작된다

관계가 어려운 것은 상대를 바꾸려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를 먹이는 관계에서 주도권을 잡는 것은 내가 아닐 때가 많다. 관계가 제대로 돌아가느냐의 여부는 상대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달려 있을 때가 더 많다는 이야기이다. 상대가 내 뜻대로 바꿔만 준다면 관계로 고민하는 사람은 없으리라. 하지만 불행하게도 상대는 스스로를 바꿀 의사가 전혀 없다. 따라서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은 나를 바꾸는 것뿐이다.

좋은 관계를 원한다면 우선 나를 바꾸어야 한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 상대를 바꾸려고 하고, 또 바뀌기를 기다린다면 간계는 더 꼬여갈 수밖에 없다. 관계의 출발점은 바로 나이다. 인간관계로 고민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사이가 나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자기와의 사이가 나쁘기 때문에 고민한다. 스스로와 친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과 친해진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나와 친해진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나와 친해진다는 것은 간단하다. 일단,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이 결점이든 장점이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버릴 것은 버리고 키울 것은 키워가면 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좋은 관계를 만들어 가기 위한 기본 가운데 기본이다. 이러한 기본 위에서 소통을 위한 노력을 꾸준히 하다 보면 관계는 저절로 풀리기 마련이다.


관계는 첫인상부터 시작된다

첫인상은 왜 바뀌기 어려운 것일까? 극히 제한된 정보에 바탕을 두고 형성된 첫인상을 사라들은 왜 바꾸려 들지 않을까?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첫인상이 바뀌지 않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들 마음속에 있는 가설 검증 바이어스란 편견 때문이다. 

사람이란 누군가의 첫인상을 형성하고 난 다음에는 자신이 내린 판단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정보만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인다. 자신이 내린 판단에 들어맞지 않는 정보는 무시하거나 받아들이더라도 쉽게 잊어 버린다. 

뚱뚱한 사람은 절제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을 생각해보자. 이 사람은 뚱뚱한 사람들의 행동 가운데에서 자기의 생각에 부합하는 것만 기억하고 나머지는 아예 무시해 버린다. 이러한 과정을 거듭해 가면서 자기의 생각이 옳다고 제멋대로 확신해 버린다. 이러한 현상을 사회심리학에서는 가설 검증 바이어스라고 부른다.


익숙하지 않은 일을 할때는 못 본척하고, 익숙한 일을 할 때는 곁으로 다가가 칭찬해줘라

남이 쳐다보면 평소보다 더 일을 잘하는 사람이 있다. 역으로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면 안절부절못해 평소의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같은 사람의 경우에도 상황에 따라 반응이 다르기도 하다. 어떤 상황에서는 시선을 느끼면 펄펄 난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시선에 주눅이 들어 안절부절못한다.

가령 스포츠선수는 응원단이 많으면 신이 난다고 한다. 경기장이 떠나갈 듯한 함성을 들으면 투지도 살아나고 평소의 실력을 넘는 파인플레이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같은 선수라도 매스미디어와 인터뷰를 할 때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줄 때가 많다.경기장에서의 자신만만함은 완전히 사라진 채 굳어져서 말을 더듬기도 한다. TV카메라를 너무 의식한 결과임은 물론이다. 응원하는 사람들의 시선이나 TV카메라나 동일한 시선임에는 틀림없는데 왜 이런 반응이 나타나는 것일까?

이런 결과들이 벌어지는 주된 이유는 사회심리학에서 사회적 촉진이라고 부르는 현상 때문이다. 타인의 존재가 작업 성적에 영향을 주는 것은 분명했지만 영향이 플러스인가(사회적 촉진), 아니면 마이너스인가(사회적 억제)를 확실하게 알 수 없었다. 그러다 1965년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자이언스는 다음과 같이 사회적 촉진 개념을 정리하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사람들이 쳐다보고 있을 때 능률이 오르는 경우는 작업이 우세한 반응일 경우이고 능률이 떨어지는 경우는 부차적인 반응일 경우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세한 반응이란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연습을 많이 해 숙련도가 쌓인 반응을 말한다. 반면 부차적인 반응이란 그렇게 숙달되어 있지 않은 반응을 말한다.

사회적 촉진이 우리 관계에서 시사해주는 것은 많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가정에서든 직장에서든 상대가 좀 익숙하지 않을 일을 하고 있는 듯하면 못 본 척해주고, 익숙한 일을 하는 듯하면 곁으로 다가가서 칭찬도 해주고 성원도 해주라는 것이다.


역할이 사람을 바꾼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평소 별볼 일 없던 사람도 출세하면 확 달라진다는 의미이다. 사람은 대개 어떤 자리에 앉게 되면 그 자리에 맞는 가치관이나 태도를 받아들여 종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역할의 내면화가 이루어져 그 자리에 맞게 사람이 변했기 때문이다. 물론 과거와는 다르게 보이는 것은 보는 쪽이 그렇게 보기 때문에 그런 면도 있기는 하다. 사람은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보고 싶은 대로 본다. 이 말은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가 사전에 갖고 있는 생각이나 감정에 따라 보는 것이 얼마든지 재구성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우리는 출세한 자리가 주는 후광 때문에 사람 자체를 높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출세하면 달라 보이는 것은 보는 쪽보다는 아무래도 자리에 앉은 당사자가 변했다는 데에 더 큰 이유가 있들 것이다. 역할은 사람을 바꾼다. 이것은 짐바도의 모의감옥 실험에 잘 나타나 있다.

이처럼 역할은 사람을 바꾼다. 어찌 보면 역할에 따라 사람은 바뀔 수밖에 없다. 사실 우리도 누구나 다양한 역할을 맡고 있다. 가정에서는 아빠나 엄마의 역할, 본가에 가면 아들이나 딸의 역할, 친구 사이에는 친한 동년배로서의 역할, 회사에서는 성실한 직장인의 역할, 학교에 가면 열성 있는 학부모의 역할...

우리는 이처럼 다양한 역할을 아무런 문제 없이 수행해내고 있다. 역할에 맞는 페르소나가 미리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페르소나란 연극에서 썼던 가면을 말한다. 우리는 역할에 따라 변하는 것을 능숙하게 하면서도 다른 사람이 역할에 따라 변하는 것을 그대로 보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동료나 주위 사람이 출세한 모습을 보면, "출세하더니 사람 달라졌는데,"하며 빈정대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사람이 달라졌다고 비아냥거릴 일이 전혀 아니다. 당신도 출세하면 마찬가지 모습을 보여줄 터이니까 말이다. 

역할이 사람을 바꾼다는 것만 알아두어도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의 상당량을 줄일 수 있다. 역할 때문에 사람이 바뀌었다는 것을 인정해 준다면 종전과는 다른 관계로 업그레이드하기도 쉬울 것이다.


내가 모든 것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자

컨트롤의 착각(illusion of control)이란 자기와 전혀 관련이 없는 것도 자기가 컨트를하고 있다고 믿는 현상이다. 컨트롤의 착각에 빠지면 운이나 우연에 의하여 좌우되는 것도 스스로 컨트롤할 수 있다고 믿는다.(중략) 컨트롤의 착각은 카지노에서 흔히 목격된다고 한다. 한 연구에 따르면 주사위의 낮은 숫자가 나와야 하는 경ㅇ 사람들은 주사위를 부드럽게 굴렸다. 역으로 높은 숫자가 필요한 경우, 사람들은 주사위를 강하게 던지곤 했다. 주사위의 숫자가 나오는 것은 확률에 의한 것이지 얼마나 강하고 약하게 던지느냐에 달려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평상시라면 이것 모르는 사람 하나도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중요한 이익이 걸려 있는 순간과 마주하면 평소의 냉정함을 버리고 어리석게 행동한다. 다 컨트롤의 착각의 노예가 되고 만다.

컨트롤의 착각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컨토를의 착각에 잘 빠지는 사람은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어 사회적 적응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상생활에서 다소간의 컨트롤의 착각은 별 문제가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식투자나 제테크에서와 같이 확률적인 사고가 필요한 상황이나 회사에서 계획의 수립과 같은 합리적인 사고가 요구되는 상황에서 컨트롤의 착각은 커다란 문제를 야기시킨다. 

사람들은 자기가 관심을 가졌다든지, 직접 선택한 것은 남다르게 생각한다. 한마디로 말해 자기가 고른 것은 예뻐보이고 특별해 보이는 것이다. 예뻐 보이는 것까지야 뭐라 할 수 없지만 거기에 집착하게 될 때 문제가 심각해진다. 무슨 일을 할 때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더라도 손을 털거나 중도에 포기하기가 어려워져 결국은 파국에까지 이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한 컨트롤의 착각때문에 사람들은 자기가 선택한 관계는 특별한 것이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연애관계에서 두드러지는데, 자기가 하는 연애나 실연은 남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실연에서다. 컨트롤의 착각 때문에 사람들은 실연한 다른 사람과는 달리 자기가 특수한 경험을 하는 것으로 착각을 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 때문에 실연의 늪에서 헤어나지를 못한다. 물론 이것은 착각이다. 다른 사람들도 다 비슷한 식으로 실연을 하고 또 비슷한 식으로 실연을 극복하고 있는 것이다.


자존심은 관계를 이끌어 나가는 힘이다

누군가 관계를 이끌어가는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자존심이라 대답할 것이다. 자존심이야말로 우리의 관계를 이끌어 가는 원동력이기도 하고 또 관계를 해치는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자존심은 우리의 관계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자존심이 낮으면 제대로 된 관계가 이루어지기 어렵다. 우리가 항상 대등한 관계 속에서만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관계에는 상하관계도 있고 우열관계도 있다. 자존심이 없다면 이러한 관계에서 열위가 있을 때 자신감을 잃고 자기를 매몰시킬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스스로를 존중하는 자존감이 있다면 형식적인 열위 속에서도 얼마든지 스스로의 존엄함을 지킬 수 있다.

이처럼 중요한 자존심이기 때문에 우리는 사회행활을 하면서 자존심을 지키려 필사적이다. 우리는 타인이 나를 존경해주는 것까지 바라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것만은 견딜 수 없어 한다. 자존심이 상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을 다 한다. 설사 그것이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다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서슴지 않는다. 거짓말, 핑계, 변명 같은 것들도 마다하지 않는다. 장기적으로 손해로 돌아올지 몰라도 당장 눈앞에서는 자존심을 상하지 않고 싶어서임은 물론이다.

사람들이 남의 눈에 비친 자존심을 스스로의 자존심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흔히 저지르는 잘못이 있다. 자존심을 다른 사람에게는 강하게, 그리고 스스로에게는 대단히 약하게 부리는 것이다. 이것은 대단히 큰 착각일 뿐 아니라 관계를 망친다. 자존심이란 남에게는 되도록 약하게 자기에게는 강하게 부려야 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자존심을 부릴 때 진정한 자아존중감이 생겨나는 법이다.


상대방이 화를 낼 때는 같이 화 내지 말고 그 상황을 분석해보라

상대방의 화에 덩달아 화를 내는 것은 자기나 상대방 양쪽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 화를 내기 전에 우선 상대방이 왜 화를 내는지 그 이유를 반드시 따져 보아야 한다. 상대방이 화를 내는 이유가 의외로 나를 위해서일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이란 감정의 동물이라 이것이 말만큼 쉽지는 않다. 하지만 상대가 화를 낼 때 "내가 화를 내면 내가 지는 것이다."라고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습관을 들이다 보면 그렇게 익히기 어려운 기술도 아니다. "너는 화를 내라.", "나는 네가 화를 내는 이유를 따져 보겠다."라는 자세를 견지하다 보면 화를 받아들이는 기술이 저절로 체득될 수 있다는 말이다. 화를 내는 상대방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화를 낼 때는 제대로 된 소통이 이루어지기 어렵다. 따라서 화를 내는 상대방의 말을 듣고 있느니 속으로는 상대가 화를 내도록 만든 상황을 분석해보는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된다.


작은 행복이 사람을 긍정적 행동으로 유도할 수 있다

사람의 기분이란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서 바뀐다. 그 가운데에서 불로소득인 횡재만큼 우리의 기분을 들뜨게 만드는 것도 드물다. 로또 같은 거액이 횡재는 말할 필요도 없다. 단돈 백 원이 횡재에도 기분이 확 달라지는 것이 우리들이다. 

이런식의 사소한 횡재는 기분만이 아니라 사람을 돕는 원조행동에도 대단히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아이센과 레빈은 일련의 실험을 통하여 이러한 사실을 실증적으로 입증했다. 

샌프란시스코와 필라델피아의 쇼핑센터에 설치된 공중전화를 이용한 실험에서 피험자들은 지정된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야 했다. 전화를 걸고 아무리 기다려도 상대가 나오는 기미가 안보였다. 결국 전화를 끊고 전화 부스를 나서게 되는데, 여기에서 피험자들은 두 그룹으로 나누어졌다.

하나는 횡재조건으로, 전화를 끊고 동전을 꺼내려 동전 반환구에 손을 집어 넣으면 누군가가 잊고 간 10센트짜리 동전을 발견하게 되는 조건이었다. 또 하나는 비횡재 조건으로 횡재조건과 모든 조건이 동일했으나 동전 반환구에는 누군가가 잊고 간 동전이 없다는 점만이 달랐다.

전화 부스를 떠나려는 피험자의 앞에 서류뭉치를 잔뜩 든 여성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 여성은 갑자기 넘어진다. 서류뭉치가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는 것은 물론이다. 실험의 목적은 두 그룹의 피험자들이 여성을 얼마나 도와주는가를 살펴 보는 것이다. 

두 그룹의 피험자 사이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었을까? 우선 횡재가 없었던 비횡재 조건에서 도와주는 사람들의 비율은 4%에 지나지 않았다. 25명의 피험자 가운데 단 한 명만이 여성을 도와 함께 서류를 주웠다. 

10센트 동전을 발견했던 횡재조건의 사람들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도대체 몇 명이나 여성을 도와주었을까? 16명 가운데 무려 14명이 여성을 도와 그 비율은 87.5%에 달했다. 단돈 10센트가 이처럼 천양지차의 결과를 빚어낸 것이다.


공정한 세계에 살고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라

시사고발 프로그램을 사람들이 즐겨 보는 데에는 '정당한 세계의 믿음belief in a just world'이라는 심리가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정당한 세계의 믿음이란 좋은 일을 한 사람은 상을 받고 죄를 지은 놈은 처벌을 받는 정당한 세계에 우리가 살고 있다고 믿는 현상이다.

공정한 세계에의 믿음이란 착각이다. 하지만 우리가 너무나 오랫동안 동화나 만화영화, 그리고 드라마를 통하여 키워온 만큼 그것은 굳세다. 현실이 아무리 믿음과 정반대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믿음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특히 공정세계에 대한 믿음과 어긋나는 현상과 마주치게 되면 우리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그것을 회복하려고 노력한다. 

가령 집에 도둑이 들어 천만 원의 피해를 입은 동생이 있다고 치자. 당신이라면 동생에게 무슨 말을 할까? 태반의 사람들이 "돈을 은행에 두지 왜 집에 두었냐?", "문단속 좀 잘하지."라고 말한다. 세상에 나쁜 놈은 도둑질해 간 놈인데, 오히려 사람들은 피해자의 부주의를 탓하는 말들을 입에 올리곤 한다. 

이 경우 사람들은 불공정한 것을 원상회복시키려는 대신에 "지금 눈앞에 펼쳐진 현상은 불공정한 것이 아니다. 피해를 입은 쪽도 피해를 받을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벌을 받은 것이다."라고 생각해 버림으로써 자신의 정당세계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자신에게서도 일어난다. 특히 피해를 당한 사람들에게 나타나기 쉬워, 피해자는 이러한 믿음 때문에 이중 삼중의 고통을 겪기도 한다. 가령 성폭행을 당한 여성이 "아, 내가 그때 소리를 조금만 일찍 질렀더라면..." 이라든지, 어린아이를 교통사고로 잃은 부모들이 "내가 그때 아이의 손을 좀 더 꽉 잡고 있었더라면..."이라고 자신을 책망하는 것들이 대표적이다.

나쁜 놈은 성폭행범이고 사고를 낸 운전자이다. 결코 자신이 나빴던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이 그러한 죗값를 받을 만한 죄인이라고 스스로를 치부해 버림으로써 인과응보, 자업자득이라는 공정한 세계의 믿음을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나 자신을 생각하는 대신 남을 생각하면 행복해진다

엘리노어는 병적인 소심함을 자기 훈련으로 극복해 갔다. 그녀는, 소심한 사람은 자신에 대한 공포에 스스로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싿. 따라서 자신의 기분을 해방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또 노력했다고 한다. 

우선,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인상을 준다든가,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나 자신을 생각하는 대신에 남을 생각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소심한 사람은 늘 자기에 관해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것도 자기의 본모습이 아니라 남의 눈에 비친 자기 모습을 생각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다 보니 남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 쓸데없이 노력한다. 또 그러한 노력이 실패했을 때에는 대단히 괴로워한다. 이것은 모두 부질없는 짓이다. 다른 사람은 내가 나를 생각하는 만큼 나를 생각하지 않는 법이다.


바람직한 가치관에는 남을 향한 배려가 깔려 있다

행복하려면 나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나의 삶을 살기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제대로 된 가치관이다. 가치관이 제대로 정립된 사람이라면 남의 시선과 반응을 의식하면서도 얼마든지 나를 위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가치관이란 행동의 기준이다. 가치관이 제대로 성립된 사람은 행동의 기준이 자기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 옳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가치관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사람은 행동의 기준이 자기가 아니라 바깥쪽에 있다.

가치란 개읜 욕구나 소망이 '중요한 타자'라는 필터를 통하여 승화된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타자라는 존재를 빼놓고는 가치를 논할 수 없다. 중요한 타자란 배우자가 될수도 있고 부모가 될 수도 있다. 범위를 넓혀 사회나 국가, 인류가 될 수도 있다. 사람마다 누가 중요한 타자인지는 다 다르다. 

다시 말하자면 이러한 중요한 타자가 내가 그렇게 했으면 하고 바라고 원하는 것을 자기 스스로의 행동의 지침으로 삼는 것이 바로 가치이다. 자기가 아무리 하고 싶고, 또 자기에게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중요한 타자가 그렇게 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그 일은 가치 있는 일이 아니게 된다. 반대로 자기가 아무리 하기 싫거나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일이라도 중요한 타자가 그렇게 하기를 윈해 준다며 그것이 바로 가치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가치관에는 타자에 대한 배려라는 요소가 기본적으로 깔려있다.


남의 평가에 휩쓸리면 진정한 자신을 마주할 수 없다

페르소나란 자신의 진짜 얼굴이 표면화되는 것을 피하고 인간관계를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세상을 향하여 착용하는 것이다. 페르소나란 편의상 착용하고 있는 가면으로, 참된 자기 자신과는 다르다. 페르소나에 내려지는 평가에만 신경을 쓰다보면, 그리고 그러한 평가를 과신하다 보면 페르소나를 뒤집어 쓴 자기가 진짜 자기인 줄 착각하게 된다. 그 결과 어디까지가 자신이고 어디까지가 페르소나인지 헛갈리게 된다. 그러다 보면 내적인 자신의 성장은 멈추고 자신을 남의 시선에다 위치시키는 것만 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상태에서 제대로 된 관계가 이루어질 리가 없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잘 돌아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관계는 나의 행복을 위한 관계가 아니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한 관계일 뿐이다.


스몰토크에 익숙해져라

흔히들 말을 잘하려면 책도 많이 읽고 관심의 폭도 널혀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급한 것이 따로 있다. 바로 스몰토크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스몰토크란 "요즘 날씨가 이상하죠?", "요즘 경기가 엉망이라는 데, 걱정입니다."라는 식으로 대화를 시작한다든지 대화가 끊겨서 어색해진 분위기를 바꾸려고 할 때 사용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