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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조 오타로는 신비주의 소설을 쓰는 작가이다. 그래서 일본의 작가상이란 작가상은 모조리 휩쓸었는데도 수상식에 얼굴 하나 비친 적도 없다. 아예 존재 자체가 공개된 적이 없다. 작품의 무게를 지키기 위해서라나? 그래서 이쪽 계열에서는 유명한 작가가 가명으로 소설을 쓰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 아무튼, 여러모로 대단한 상상력을 가진 작가이다. 일단 무식하게 많이 쓴다. 그래서 이 사람의 작품은 복불복이라고 한다. 상당히 문학적인 소설도 나오긴 하지만 무턱대고 집었다간 라노베 타입의 소설을 집을 수도 있고, 보자마자 눈을 버릴 수 있는 소설도 나온다.
지금은 아무래도 수입이 중단되었거나 자체중단된 듯하다.
무튼 <더 홀 인 마이 브레인>이 실려있는 파우스트 잡지.
대체로 이런 타입의 소설가가 일본에선 인기인가보다. 훗... 그래서 나도 누가 뭣도 모르고 추천해준 사토 유야 책을 집어들었다가 엿먹은 기억이 있지. 주인공이 개.새.끼 역할을 너무 리얼하게 해준 덕분에 열받아서 책을 북북 찢어버릴 뻔했다. (실제로 그렇게 하진 못하지만.) 지금까지도 사토 유야 소설이라면 질색이다. 여태까지 집어들은 적도 없다. 니시오 이신? 이런 C에 발라먹을 놈 바케모노가타리 그만 쓰고 신본격 마법소녀 리스카나 완결하란 말이다. 무튼 뭐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본인은 이제 이런 신비주의 소설타입이면 빠이빠이다. 환상소설과 범죄소설을 매우 좋아하는 본인에게는 유별난 일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어쩌겠는가. 싫은 건 싫은 거다. 그래서 유일하게 관심이 있는 일본 신비주의 작가는 마이조 오타로 뿐이다.
일단 앞에 <좋아 좋아~>가 등장하고 뒤에 <더 홀~>이 딸려있는 식이다. 하지만 난 후자가 더 마음에 든달까. 왠지 모르게 <좋아 좋아~>는 고전 문학 속으로 들어가려는 티가 너무 나고, <더 홀~>이 정말 작가의 방식대로 진지하게(?) 쓴 티가 난다. 일단 순서가 있으니 <좋아 좋아~>부터 소개하겠다. 이 소설은 여성을 여태 뮤즈로 희생해온 남자들의 고백 타임이다. 주인공은 그 놈의 체면 때문에 끝까지 '죽지 말아줘'라는 말도 못하고 여자친구를 하늘로 보내버리고 만다. 본인도 그 것을 알고 있으며 내부에서 계속 자책하고, 고민하고 있다. 그 고민들이 의도치 않게 그의 소설에 들어가버리게 되는데, 그는 그것을 '기도'라고 칭한다. 음... 적당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여자친구가 직접적으로 소설에 들어간 것도 아니고, 주인공은 자취만을 담았으니까. 그가 쓴 소설로 보여지는 단상들이 언뜻언뜻 본소설에 끼어드는데, 작가인 주인공의 생각이 폭발적으로 무르익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야말로 소설 속의 소설의 성장과정. 뭐라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간단히 설명하려 노력해도 가이드북 한 권이 완성되리라 생각한다. 말 그대로 여성을 뮤즈로 만들어버리는 남자들의 전통적인 과정이다. 책을 봐야 알 수 있으니 여러 말은 생략하겠다.
<더 홀~>은 그 뒤에 등장한다. 가토 히데아키라는 인물은 머리에 드릴이 박혀버리는 사고를 당한 이후, 머릿 속의 체널이 바뀌어버린다. 체널 속 '자신'은 앞에서 나왔던 '마코토'라는 이름의 중학생 남자아이. 하지만 앞에서 나온 인물하고는 전혀 다른 성격이다. 앞에서 나온 마코토는 꿈 속에서 여자아이를 찾는 남자아이였지만, <더 홀~>에서는 세계를 지키는 소년 '마코토'이다. 엄청나게 짜증나는 자기우월자에, 여자친구를 실컷 이용해먹는 파렴치한, 게다가 쾌락에 너무나 쉽게 무너지는 한심한 인간이다. 자신의 머리 구멍에다가 무언가를 계속 박아주기를 바라면서, 그것으로서 자신이 여성성을 가진 양 착각하고 있다.
남자들이란 정말 여자가 박는 데에만 만족하는 줄 안단 말이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히데아키조차 또 다른 자신의 사고방식에 염증이 난 상태이다. 언젠가는 쵸후 타워를 통째로 마코토의 머리에 박아버려서 마코토에게 안식을 주리라 다짐하면서 결말이 나는데, 난 정말 전적으로 히데아키가 그래줬으면 하는 바이다. 뭐 그래봤자 결국엔 자기자학으로밖에 끝나지 않을 테지만.
친구에겐 다정하게 대해야 한다, 죽어가는 여자친구에겐 무조건 사과하고 양보해야 한다, 장례식에선 무례하게 시체를 끌어안음으로서 진행을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 ... 우애란, 사랑이란,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왜 자신에게 충실하게 행동하지 못할까? 그럴 상황이 아닌데, 마음껏 감정을 분출해도 상관없을텐데, 끊임없이 끊임없이 주인공들은 남을 의식하는 행동들을 한다. 그래도 첫번째 주인공은 소설을 씀으로서 그럭저럭 자신의 죄의식을 소화하고 있지만, 두번째 주인공은 결국 자기합리화에 빠져 또 다른 자신과 여자친구를 희생해가면서 세상을 구하고 만다. 자기 자신도 구원하지 못하면서 세상을 구원한다니, 바보같은 녀석이다.
이래서 사회를 올바르게 하기 전에 자기 집정리부터 잘하라는 말이 있나보다. 그런데 자기 집정리를 잘한다고 해서 정말로 사회를 올바로 할 수 있을까? 여러모로 생각할 게 많아지게 만드는 책이다. 골치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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