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서툰 사람들
국내도서>시/에세이
저자 : 박광수
출판 : 갤리온 2009.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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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친구가 자신의 옛사랑에 대해서 입을 열었다. 귀를 쫑긋거리며 들었는데 그의 이야기는 의외였다. "그녀를 사랑하긴 했는데, 그녀는 나의 사랑을 받기에는 미흡한 사람이었어." 난 그의 말에 의아해하며 물었다. "미흡하다고? 사랑받기에?" 내 물음에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으며 다시금 내게 말했다. "아, 미흡하다기보다는, 그녀는 미친년이었어. 나 아닌 누군가에게 사랑받기에도 미친년이었을걸?" 친구의 말을 듣는데 나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이빨 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나는 친구에게 정색을 하며 말했다. "사랑했는데 미친년이라기보다는, 미친년을 사랑했노라고 말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 말이 뭐가 다르냐는 듯한 눈으로 친구는 나를 쳐다봤고, 의아해하는 친구에게 나는 계속 이야기했다. "네가 사랑한 그녀가 세속적으로 미친년이라는 소리를 들을지 몰라도, 적어도 네가 그녀를 사랑했다면, 사랑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녀를 비난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친구는 적잖이 당황했지만 내가 왜 이리 흥분하지는 모르겠다는 눈빛을 보냈다. 나는 더이상  부연 설명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런 친구의 모습이 안타까운 저녁이었다.


사람들은 지나간 것들에 대해 쉽게 말한다. "그건 아니었어"라고. 죽고 못 살던 예전의 기억들은 온데간데없고, 태연하게 증오와 조소의 말을 내뱉는 것이다. 분명 둘은 한때일지라도 서로 사랑했을 텐데, 아무리 사랑이 끝났다고 해도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에게 사랑한 이에 대한 비난을 퍼붓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 사랑은 매우 '핫'한 감정이다.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난 사랑을 '쿨'하게 해야 한다는 사람들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이 말하는 쿨함이 '사랑'이 아니라 '섹스'를 말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사랑의 감정은 늘 '핫'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과 쿨하게 헤어지는 것이 쉽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그 사람과 함께한 좋은 기억들을 마지막이라는 미명 아래 지저분한 감정으로 더럽히고 싶지는 않다. 마지막이면 함부로 해도 괜찮은가? 더 이상 안 볼 사이니까 아무렇게나 이야기 해도 상관없단 말인가? 그건 상대방은 물론 비록 한때일지라도 그 사람을 사랑했던 나 자신마저도 무시하는 것이다. 헤어질 때의 마음가짐, 헤어진 후의 마음가짐이 사랑할 때의 마음가짐보다 더 중요하다.

나는 그동안 만난 이들과 어떤 식으로 헤어졌든, 세월이라는 뜰채가 미움과 분노와 아쉬움과 섭섭함을 걸러 내어 아주아주 정제된 '그리움'만 내 가슴속에 남아 있기를 희망한다. 내가 만난 사람이 모두 좋은 사람은 아니었고, 설령 그중 몇몇은 내게 큰 죄를 지었다고 해도, 내가 그 사람들을 사랑했었기에 그들을 사랑이라는 이름아래 내 가슴에 소중히 묻어 두고 싶다. 
아주아주 소중히.-49

상대를 비난함으로써 자신의 감정을 정리하는 것도 어쩌면 나약한 인간의 자기 보호 본능일지도 몰라요. 그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 너무 힘겨우니까. 그렇게라도 마음을 버려야 하니까. 그래도 조금 더 성숙한 사랑이라면, 서로에게 가졌던 소중한 감정을 존중할 수 있을꺼에요. 그리고 상대의 마지막 선택도 존중할 수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