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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Ⅱ/기타

소외된 90%의 삶, 기술로 바꾼다

세상을 바꾸는 직업 ③적정기술공학자




아프리카 시골마을에 사는 소년은 물을 긷느라 학교에 가지 못했다. 10ℓ짜리 물통을 머리에 이고 몇 킬로미터씩 하루 종일 오가야 온 가족이 사용할 물 50ℓ를 채울 수 있었다. 그 소년을 위해 공학자는 큐 드럼(Q Drum)을 개발했다. 큐 드럼은 도넛처럼 가운데 구멍이 있는 원통형의 용기로, 그 구멍에 끈을 매달아 앞에서 물통을 굴리도록 디자인했다. 소년은 큰 어려움 없이도 50ℓ를 한번에 채울 수 있게 됐다. 그리고 남은 시간엔 학교를 다녔다.

적정기술연구소 소장인 홍성욱(46) 한밭대 화학공학과 교수는 큐 드럼처럼 ‘소외된 90%를 위한 기술’을 연구하는 공학자다. 적정기술이란 저개발국·저소득층의 삶의 질을 향상하기 위해 개발한 현실적인 기술로, 이용자가 현지에서 쉽게 익혀 사용할 수 있는 게 특징이다. 예컨대 전기나 부품이 없는 아프리카 마을에 지하수를 퍼올릴 전기펌프를 달아주기보다는, 10년을 써도 튼튼한 큐 드럼을 개발해 보급하는 것이다.

국내 공학자들이 적정기술을 접한 건 지난 2007년, 미국 뉴욕의 쿠퍼 휴잇 디자인박물관에서 ‘소외된 90%를 위한 디자인’ 전시회가 열렸을 때다. 이들은 포항공대 장수영 교수가 건넨 전시회 소개 책자를 보고 무릎을 쳤다고 했다. 부유한 10%를 위해 공학설계자의 95%가 일하는 현실에 도전하는 적정기술에 매료됐다. 홍 교수는 “의사나 변호사와 달리 과학자는 배운 것을 이웃과 직접 나누지 못한다는 콤플렉스가 있었는데 이제 의미있는 일을 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화학·전자·고분자·기계 등 전공이 다른 공학자들이 뜻을 모아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2008년 ‘소외된 90%를 위한 공학설계 아카데미’와 2009년 ‘소외된 90%를 위한 창의적 공학설계 경진대회’를 잇따라 열고, 2009년 6월에 대전 한밭대에 적정기술연구소를 세웠다. 9월에는 사단법인 ‘나눔과 기술’, 12월에 ‘국경 없는 과학기술연구회’가 문을 열었다. 이들은 적정기술을 알리고 토론하다 보면 한국형 적정기술이 탄생할 것이라는 꿈을 꾼다.

적정기술에 관심을 둔 국제 비영리기구 활동가들도 꿈을 더했다. 김정태 유엔거버넌스센터 팀장 등은 지난해 12월 <90%를 위한 디자인>(허성용·허영란 옮김, 에딧더월드 펴냄)을 적정기술 총서 1권으로 내놓았고, 지난달에는 서울 용산역에서 적정기술 포럼을 열었다. 기조연설을 맡았던 홍 교수는 “중학생부터 어르신까지 100여명이 포럼에 참석해 적정기술에 대한 높은 관심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그래서 곧이어 비영리 콘퍼런스 테드엑스와 일반인을 위한 아카데미를 마련하기로 했다. 젊은 공학도를 위해서 다음 학기부터는 한밭대 대학원 과정에 적정기술 과목을 신설한다.

홍 교수는 특히, 저개발국·저소득층에 단순히 영리의 목적으로만 접근하는 시선을 경계했다. “적정기술은 이용자가 현지에서 쉽게 배우고 전파해 삶에 변화가 일어나도록 돕는 기술이다. 소외된 이웃에 대한 휴머니즘이 없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정은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