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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속초- p. 99
속초는
눈 속에 숨어 있더라.
눈 속에 숨어서
배시시 눈을 뜨더라.
설악은
눈의산이라서
눈을 덮고 자더라.
설악은
햇빛 받아 눈부시더라
멀리서 바라보니
어머니 같더라.
우리 어머니같이 펑퍼짐하더라.
속초는
영랑호를 끼고 자더라.
설악의 발가락이
영랑호에 젖더라.
어릴 때 어머니가 사준 동시집이다. 이 책을 어떻게 집으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무지 감동적으로 읽었던 기억이 있다. 문득 이 동시집이 기억나서 중고로 하나 구입해두었다가 설악산으로 가는 길에 집어들었다. 15년 후에 두번째로 접하게 되는 동시집이라서 기대가 컸다. 물론 이 시집은 나의 기대에 놀랄 정도로 잘 부응해주었다. 원래부터 내용이 좋아서 성인일 때 읽어도 그렇게 똑같이 감성이 느껴지는가 보다. 부끄럽지만 사실대로 말하자면, 어린 시절 <유관순누나 생각>에서 무턱대고 유관순언니가 불쌍해서 펑펑 울어댔었더랜다. 지금은 그 시를 읽으면서 울지는 않았지만,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시인은 삼일절날 유관순이 그려진 우표를 들여다보고 이 시를 쓴 것일까. 그 당시 '태극마크가 작아보이는' 현실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있었을까. 동시집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아서 여기서 생각을 중단하려 했으나, 어떤 방식으로 보던간에 인상적인 시였던 것만은 틀림이 없다.
<겨울 속초>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알고 계시는 분 같아서 반갑기도 했다. 이 시를 읽던 시절엔 서울에서 살고 있었는데, 눈을 감고 '속초가 대체 어떤 나라일까' 상상했더랜다. 그 이후 아버지의 사업상 사정으로 속초에 내려가 7년 동안은 직접 질리도록 설악산과 영랑호를 마주치게 되었으니, 어찌 보면 어릴 적의 소원 하나가 이루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이 시를 읽게 되었을 땐 '그래, 어렸을 땐 이런 시도 읽었었지.'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마음이 매우 훈훈해졌었다. 눈이 바스락바스락 내리는 날 사방이 조용한 가운데 이 시를 가만가만 읊으며 그대로 시의 언어 속에서 감싸여있고 싶다. 현재는 시낭독모임에 한번이라도 나가보는 것이 소원인데, 시간이 없어서 계속 미루고 있지만 만일 기회가 있다면 이 시를 처음으로 시작하고 싶다.
이 시집의 제일 큰 장점은 시들이 연쇄적으로 모여서 하나의 줄거리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생명이 자아내는 이야기는 자연스럽고 생동감이 있다. 오순택 시인은 그 흐름을 너무나도 잘 파악하고 있는 듯하다. 간결한 언어에 모든 뜻을 품고 있는, 자연을 닮은 자연에 대해 쓴 시들. 내 취향에 너무나도 잘 부합했다. 어쩌면 나는 이 사람의 시를 읽으며 내 시적 취향을 키워왔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영랑호와 설악산은 의외로 가까워서 이렇게 한눈에 둘을 다 내려다볼 수 있다. 사실 설악산도 좋지만 영랑호도 절경이다.
리뷰어 미나비리스(김정원) 블로그 '마호가니 서재에서 헤드폰을 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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