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희승]고마워요, 나의 오늘. 내 곁의 사람들. [열네 살(다니구치 지로, 2004)]

*400자 원고지 5장

"지금 가지고 있는 지식, 기억 등을 모두 가지고 열네 살 시절로 돌아간다면?" 이것이 이 작품 [열네 살]의 모티브입니다. 일종의 시간여행인데요, SF 소설에서 주로 다뤘던 이 소재를 작가 다니구치 지로는 좀 다른 방식으로 사용합니다. 마흔여덟 살의 중년 남자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당시에는 모르고 지나쳤던 가족의 소중함과 행복을 깨닫는 계기로 삼는 것이죠. 영화 [백 투 더 퓨처] 같은 흥미진진함은 조금 부족하지만 어차피 지향점이 다른 작품이라는 생각이니까요. 대신 [열네 살]은 고요히 흐르는 강물처럼 맑고 잔잔하고 반짝입니다.

주인공 나카하라 히로시는 외국 바이어를 만날 기회가 많았던 덕에 중학교 영어는 너무 쉽고 다른 과목들도 큰 어려움 없이 따라갈 수 있어서 성적이 오릅니다. 늘 피곤하고 무거웠던 40대의 몸과는 비교할 수 없게 유연하고 가벼운 중학생의 몸을 갖게 되니 운동에도 소질을 보이죠. 게다가 술, 담배도 할 줄 알고 오토바이도 잘 타는 정말 멋진 아이가 됩니다. 여기에서 돋보이는 건 히로시가 이 모든 일상들에 감탄하며 감사하는 모습이예요. "지금 이렇게 다시 14세로 돌아와 보니, 그냥 지나친 것들이 잘 보이는 것 같아."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것 중 하나가 이게 아니었을까 싶어요. 지루하게 또는 불만족스럽게 보내고 있는 당신의 하루하루가 사실은 정말 아름답고 소중한 순간들이라는 거죠.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마음으로는 받아들이지 못 하는 이 평범한 사실을 자연스럽게 수긍하게 하는 것, 그것이 이 작품의 힘인 듯합니다.

그저 평범했던 열네 살 시절이 이렇게 달라지면서 이미 지나왔던 것과는 다르게 시간이 흘러갈 수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기대를 품게 됩니다. 히로시에게는 바꾸고 싶었던 과거가 있었던 거죠. 바로 아버지의 가출입니다. 열네 살 여름방학이 끝나던 날 아버지는 사라집니다. 아무 말도 없이 가족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죠. 그런 일이 벌어질 거라는 걸 알고 있는 주인공은 할머니에게 넌지시 아버지에 대해 여쭙고 그때까지 알지 못했던 부모님의 과거를 듣습니다. 불행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뭔가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이어지는 바람에 인생의 중요한 순간을 뜻대로 결정하지 못 했던 일이 있었죠. 또 한편으로는 아버지의 말과 행동에 주시하고 뒤를 밟기도 하면서 가족을 떠나야만 했던 이유를 캡니다. 어찌 보면 단순한 이 부분이 이야기 전체에 긴장감과 활력을 불어 넣어주더군요. 작가가 이야기를 짜는 솜씨가 보통이 아님을 엿볼 수 있었죠. 앙굴렘 국제만화 페스티벌에서 최우수 시나리오상을 수상한 것이 그 사실을 뒷받침해줍니다.

그래서 히로시는 아버지의 가출을 막을 수 있었을까요? 그건 스포일러가 될 테니 이 글에서는 밝히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가 아버지의 가출을 막기 위해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을 더 유심히 지켜봤고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는 점입니다. 이것 역시 우리가(적어도 저는) 잘 하지 못 하는 거죠. 대화, 애정, 관심, 이해하려는 노력 같은 것들 말입니다. 아버지가, 어머니가, 동생이 이런 사연을 가지고 있었고 이런 삶 속에 놓여 있었고 이런 결정을 했다는 것을 가감없이 받아들이기만 해도 큰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음을 작가는 넌지시 이야기해줍니다. 그러한 마음가짐이 결국은 나 자신을 바꾸고 구원한다는, 역시 사소하지만 쉽게 잊고 마는 진실이 작품 곳곳에 배여 있습니다.

시간 여행은 불가능합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죠. 먼 미래에는 가능할런지도 모르겠어요. 그렇다면 어쩌면 지금의 나는 (이 작품 속 주인공과는 다르게) 미래에 대한 기억을 잊은 채로 2011년으로 시간여행을 온 자신일 수도 있겠습니다. 48세 혹은 78세의  남자가 그렇게 돌아가고 싶어했던 그 날들을 살아가고 있는 거죠. 그렇다면 (혹은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 해도) "바로 지금, 그리고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또렷해집니다. 실천만 남았네요.

전체적으로 담백하고 바꾸어 말해 조금 심심합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오래 씹을 수록 달콤하고 구수한 맛이 나는 현미밥 같달까요. 저도 이 작품을 두 번 잇따라 봤는데 처음 볼 때와 두 번째 볼 때의 느낌이 사뭇 달랐어요. 아마 몇 년 뒤에 다시 펼쳐보면 또 다른 감흥이 일지 않을까 싶네요. 소장할 만한 가치가 있는 좋은 작품입니다.

리뷰어 노희승 책읽는 사람들의 놀이터 볼록(bollok) 운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