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야기 Ⅱ/기타

[양손잡이] 아아, 들리나요? -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 8점
신경숙 지음/문학동네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찾는 전화벨이 다시 울렸다. (26쪽)


  선생 몰래 교실을 빠져나오려는데 선생이 이명서! 하고 불러세웠다. 어디 가냐고 물었다. (중략) 우물쭈물 하다가 나도 모르게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중략) 체념하고 불호령을 강고하고 있었는데 선생의 반응이 뜻박이었다. 마음이 아프다구? 선생이 안경 너머로 물끄러미 나를 건너다보았다. 어서 다녀오너라. 다음 시간에 늦지 말구. (51쪽)


  누군가에게 마음을 털어놓는 일은 가까워지는 게 아니라 가난해지는 일일 뿐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때 했던 것도 같다 .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일은 오히려 침묵 속의 공감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112쪽)


  널빤지에서 널빤지로 난 걸었네.
  천천히 조심스럽게
  바로 머리맡에는 별
  발밑에 바다가 있는 것 같아 난 몰랐네- 다음 걸음이
  내 마지막 걸음이 될는지
  어떤 이는 경험이라고 말하지만
  도무지 불안한 내 걸음걸이. (141쪽)


  왜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은 기쁨이지만은 않을까. 왜 슬픔이고 절망이기도 할까. (157쪽)


  엄마를 잃는 것과 동시에 나는 언젠가는, 이라는 말도 버렸다. 언젠가는……은 내게 더이상 아무 영향력도 끼치지 못하는 부질없는 말이 되어버렸다. 무엇도 변화시켜놓을 수 없는 허깨비와 같은 말이. 언젠가는……이란 말을 쓰지 않게 된 후 쓴웃음을 삼키고 입술을 깨물고 이마를 찡그리고 혼자 걸으며 나를 달래던 순간들이 고스런히 되살아났다. (213쪽)


  육체적 피로나 고참의 횡포 정도는 참아줄 수 있다. 그러나 그동안 내가 나라고 믿었던 것, 내가 가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다 먼지요 실체 없는 바람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인식은 내장을 갉아먹히는 듯한 쓰디쓴 괴로움을 안겨준다. 인간이 실은 출구 없는 미로를 영원히 달리고만 있는 생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나는 이곳 군대에서 다시금 학습하고 있다. (248쪽)


  -저 잘 지내요. 어젯밤에 너무 깊이 잠들어서 전화벨 소리를 못 들었어요. 아버진요?
  -나도 잘 지낸다.
  나.도.잘.지.낸.다, 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종소리처럼 내 마음 안에서 울려퍼졌다. 나도 잘 지낸다는 평범한 말이이렇게 큰 울림을 가지고 다가올 줄이야. 소식이 끊긴 미루가 나.잘.지.내, 라고 전화해주었으면, 나날이 수척해지는 그가 나.잘.지.내.고.있.어, 라고 해주었으면. 나.잘.지.내.고.있.어, 라는 이 평범한 말을 단이에게서 들을 수 있다면. (274쪽)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으로 내가 여러분에게 종종 들려주었던 물을 건너는 인물 크리스토프에 대해 다시 한번 되새겨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지금 깊고 어두운 강을 건너는 중입니다. 엄청난 무게가 나를 짓누르고 강물이 목 위로 차올라 가라앉아버리고 싶을 때마다 생각하길 바랍니다. 우리가 짊어진 무게만큼 그만한 무게의 세계를 우리가 발로 딛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불행히도 지상의 인간은 가볍게 이 세상의 중력으로부터 해방되어 비상하듯 살 수는 없습니다 .인생은 매순간 우리에게 힘든 결단과 희생을 요구합니다. 산다는 것은 무無의 허공을 지나는 것이 아니라 무게와 부피와 질감을 실존하는 것들의 관계망을 지니는 것을 의미합니다. 살이 있는 것들이 끝없이 변하는 한 울의 희망도 사그라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살아 있으라. 마지막 한 모금의 숨이 남아 있는 그 순간까지 이 세계 속에서 사랑하고 투쟁하고 불노하고 슬퍼하며 살아 있으라. (291쪽)


  자동차에 오르다가 뒷자리 너머에 에밀리가 엎드려 있는 것을 보았다. 자리에 앉아 에밀리를 바라보았다. 에밀리는 나를 잊은 듯 움직임이 없었다. (317쪽)


-------------------------------------------------------------------------------


「엄마를 부탁해」 이후
2년만의 신경숙 작가님의 책을 펴보았다.
사실  「엄마를 부탁해」가 내 취향이 아니어서 다 보고서도 이게 뭔가, 했던 기억이 든다.
인터넷 좀 뒤져보니 아무래도 여성이 공감하기 쉬운 내용이라서 그런가보다, 했는데 뒤돌아보니 그냥 책을 읽을 당시 내가 '군인'이었기 때문에 그러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중고서적으로 한 권 구해뒀으니 차분한 마음으로 찬찬히 읽어봐야겠다.
잡설은 그만하고, 
「엄마를 부탁해」보다는 훨씬 느낌이 좋았다.
전작이 엄마에 대한 기억과 그에 대한 설움, 한, 그리고 정을 풀어써 넣었다면 이 책은 내 또래의 주인공들의 사랑과 젊음을 써내려간다.
솔직히 엄마보다 친구의 이야기를 듣는 게 훨씬 편하잖은가.
기분 좋은 3일이었다.

성장소설이자 연애소설, 청춘소설.
엄마를 잃고 사촌 언니와 살다가 아버지에게로, 다시 도시로 나온 윤.
어릴 때부터 윤과 피붙이처럼 지내던 단.
대학 1학년 때의 정윤을 기억하는 그, 명서.
불의의 사고로 언니를 떠나보내고 명서의 옆에 딱 달라붙어 있는 미루.
각자 아픔을 가지고 철저히 자신만의 세계에서 살고 있던 그들이지만 서로를 만나면서 왠지 모르게 끌리는 그들.
서로의 사연을 듣고, 이해하고, 물론 어느 때는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렇게 지낸다.
그리고는 뜬금 없는 죽음이 있지만 누가 알쏘냐, 인생은 이어진 널빤지 위를 걷는 것처럼 위태위태한 것인데 말이다.

전화벨이 울린다.
그 전화의 주인이 나일지 내 가족일지 모르겠지만, 계속해서 전화벨은 울린다.
누구에게서, 또 어떤 내용을 담은 울림일지는 모른다.
사랑하는 이에게서의 전화든, 가족에게서의 안부전화든, 화창한 날에 같이 놀자는 친구에게서의 전화든, 어두운 목소리로 슬픈 소식을 전해줄 전화든, 수화기를 들어야한다.
따르릉 따르르릉-
시끄럽게 울리는 전화벨소리.

(2011년 8월 22일 ~ 8월 25일, 380쪽)
 
리뷰어 양손잡이(이정헌) junghun07@hanmail.net 블로그 '이야기는 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