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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Ⅱ/기타

[미나비리스] '열하에서 보고들은 신비한 이야기들.' [열하일기 中: 박지원]


열하일기(중)(겨레고전문학선집02)
카테고리 인문 > 한국문학론
지은이 박지원 (보리,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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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온 세상이 비를 바랄 때에 이렇게 한 뜨락만 비로 축인다면 이 역시 일은 다 된 일인 성싶다.- p. 455

 윗 글은 좀 설명이 필요한데, 박지원이 열하를 들러서 축제를 구경하던 중거북을 탄 선인이 비를 부르는 장면을 구경하면서 쓴 문장 중 하나이다. 거북이 물을 뿜는데, 그 물의 양이 상당히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바닥에만 떨어지고 구경하는 사람들에겐 떨어지지 않는 장면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는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혜택을 바라고 있는데, 정작 모든 혜택은 천자에게만 돌아가고 있는 세태를 비판한 것이다. 뭐랄까... 근본적인 이념의 배경이 유교라는 게 치명적인 단점이긴 하지만 조금 더 진보적이면 사회주의자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보편적 복지를 추구한달까.

 중권은 박지원이 사신들과 함께 열하에 들러 사람들을 만나고 중국의 여러가지 요술과 풍속들을 좀 더 세세히 구경하다가 돌아가는 내용이다. 이 중에 중국의 한 서생과 한 이야기를 써놓은 글이 제일 길다. 당시 청나라와 우리나라의 말만 다르고 한자는 같았기 때문에 중국인과 마치 현재의 채팅처럼 서로 종이를 놓고 글을 쓰면서 대화를 했다나. 상권에서 박지원이 열심히 땅바닥에다 무엇을 그렸다길래 대체 무슨 내용인지 궁금했는데 의사소통하려는 노력의 일종이었음을 이제서야 알았다. 글을 읽는데 마치 두서없이 쓰여진 중국의 역사를 좔좔 읽는 느낌이라, 주석이 없었더라면 아미 중간도 못 가고 책을 덮어버렸을 것이다. 밤을 새면서 몇 날 며칠을 하루종일 방에 틀어박혀 글을 쓰면서 대화를 했다고 하니, 하도 재밌게 떠드느라 밥상이 온 줄도 몰랐다고 한다. 지식으로 보나 집중력으로 보나 여러모로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19세기라면 서양에서도 낭만주의가 시작되는 때이며, 박지원이 40대가 되었을 때 영국에서도 워즈워스가 태어났다. 국가를 막론하고 그 시대 문인들이 얼마나 훌륭했을지, 그들의 친교가 얼마나 깊었을지 짐작이 간다.

 에피소드가 있다. 은행을 갈 일이 있어서 이 책의 끝부분을 읽으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내 차례가 되어 데스크로 갔다. 한창 은행직원과 이야기하고 있는데 어떤 할아버지가 태연히 내 책을 집어가더니 밖으로 나가는게 아닌가. 급히 붙잡으려고 뛰어갔으나 어디로 증발했는지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는 그분ㅠㅠ 그 책을 읽으려고 가져갔다면 모르지만, 내 생각엔 아무래도 이 책이 두껍다보니 중고책방에서 돈과 맞바꾸려고 무작정 들고 나가신게 아닐까... 책을 챙겨가지 않은 내가 잘못했지만, 어떻게 돈도 아닌 책을 소매치기 할 수 있단 말인가. 그저 헛웃음이 나올 뿐이다. 책이 한낱 돈으로 보이는 더러운 세상.

교과서에서 자주 보는 연암 박지원 할아버지의 초상화. 언뜻 보면 엄하게도 생겼는데, 이렇게 소소하게 재밌는 글을 쓰셨다는게 언뜻 믿겨지지 않는다.


리뷰어 미나비리스(김정원) 블로그 '마호가니 서재에서 헤드폰을 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