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강. 옳은 일 하기
 
2004년 여름, 멕시코 만에서 세력을 일으킨 허리케인 찰리가 플로리다를 휩쓸고 대서양으로 빠져나갔다. 그 결과 스물두 명이 목숨을 잃고 110억 달러에 이르는 손실이 발생했다. 뒤이어 가격폭리 논쟁이 불붙었다.
얼음 2달러→10달러, 소형 발전기 250달러→2000달러, 모텔 하루 방값 40달러→160달러
지붕을 덮친 나무 두 그루 치우는 요금 2만 3000달러.
플로리다 주민들은 바가지요금에 분통을 터뜨렸다. 한 주민은 남의 고통과 불행을 이용해 이익을 챙기는 행위는 옳지 않다고 말했다.
 
플로리다에는 가격폭리처벌법이 있어서, 허리케인이 지나간 뒤 법무장관 사무실에 2000건이 넘는 피해 사례가 접수되었다. 그러나 크리스트가 가격폭리처벌법을 집행하려 하자 일부 경제학자들은 해당 법에, 그리고 주민들의 분노에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주장했다. 가격은 수요와 공급으로 결정되었을 뿐 ‘공정 가격’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가격폭리는 대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경제학적으로는 의미가 없는 표현이다. 얼음, 생수, 지붕 수리, 발전기, 모텔 방의 가격이 높아지면 수요자는 소비를 억제하고 공급자는 허리케인 피해를 입은 먼 곳까지도 재화와 용역을 공급하려는 욕구가 높아지는 장점이 있다.
 
허리케인 찰리가 지나간 뒤에 일어난 가격폭리 논쟁은 도덕과 법에 관한 어려운 질문을 던진다. 재화와 용역을 판매하는 사람이 자연재해를 이용해, 시장이 견디기만 한다면 어떤 가격을 불러도 상관없는가? 이때 법이 조금이라도 힘을 쓸 수 있다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가격폭리 금지가 구매자와 판매자의 자유로운 거래를 방해할지라도 주정부는 가격폭리를 금지해야 하는가?
 
 
- 행복, 자유, 미덕
이러한 질문은 단지 개인이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를 묻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법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며, 사회는 어떻게 조직되어야 하는지를 묻는다. 한마디로 정의를 묻는 질문이다. 여기에 답하려면 정의의 의미부터 따져봐야 한다. 사실 앞에서 이미 이 문제를 생각해보았다. 가격폭리 논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격폭리처벌법에 찬성 또는 반대하는 주장은 세 가지 항목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행복 극대화, 자유 존중, 미덕 추구이다. 이 셋은 서로 다른 각도에서 정의를 바라본다.
 
- 정의를 이해하는 세 가지 방식
사회가 정의로운지 묻는 것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 이를테면 소득과 부, 의무와 권리, 권력과 기회, 공직과 영광 등을 어떻게 분배하는지 묻는 것이다. 정의로운 사회는 이것들을 올바르게 분배한다. 다시 말해, 각 개인에게 합당한 몫을 나누어 준다.
우리는 이미 이 문제와 씨름하기 시작했다. 가격폭리의 옳고 그름을 따져보고, 상이군인훈장과 구제금융을 둘어싸고 대립하는 여러 주장을 곰곰이 생각하면서, 재화 분배를 이해하는 세 가지 방식을 찾아냈다. 행복, 자유, 미덕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 이상은 정의를 고민하는 서로 다른 방식을 암시한다.
 
이 책에서는 정의를 이해하는 세 가지 방식의 장단점을 살펴볼 것이다. 이중 행복 극대화부터 시작하자. 이 생각을 들여다보려면 공리주의에 눈을 돌려야 한다. 공리주의는 행복을 극대화해야 하는, 다시 말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와 방법을 가장 그럴듯하게 설명한다.
다음으로 정의를 자유와 연관 짓는 이론을 살펴본다. 개인의 권리존중을 강조하는 이론이다. 물론 이 이론들 사이에도 어떤 권리가 가장 중요한가를 두고 견해차가 있다. 하지만 정의는 자유와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오늘날의 정치에서 행복 극대화라는 공리주의 사고만큼이나 익숙하다.
 
마지막으로 정의는 미덕 그리고 좋은 삶과 밀접히 연관된다고 보는 이론을 살펴볼 것이다. 도덕을 법으로 규정한다는 발상은 자유주의 사회 시민들이 보기에, 자칫 배타적이고 강압적인 상황을 불러 올 수 있는 경악할 만한 발상이다. 그러나 정의로운 사회라면 미덕과 좋은 삶에 대한 견해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생각은 공히 모든 이념에 깃들어 있으며 다양한 정치 활동과 주장에 영감을 주었다.
민주사회에서의 삶은 옳고 그름, 정의와 부정에 관한 이견으로 가득하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정의와 부정, 평등과 불평등, 개인의 권리와 공동선에 관해 다양한 주장이 난무하는 영역을 어떻게 이성적으로 통과할 수 있을까? 이 책은 그 질문에 대답하고자 한다.

2강. 최대 행복 원칙 : 공리주의
 
1884년 여름, 영국 선원 네 명이 작은 구명보트에 올라탄 채 육지에서 1600킬로미터 떨어진 남대서양을 표류했다. 이들이 타고 있던 미뇨네트 호는 폭풍에 떠내려갔고, 구명보트에는 달랑 순무 통조림 캔 두 개뿐, 마실 물도 없었다. 토머스 더들리가 선장이었고, 에드윈 스티븐슨은 일등 항해사, 에드먼드 브룩스는 일반 선원이었다. 네 번째 승무원은 잡무를 보던 열일곱 살 남자아이 리처드 파커였다. 고아인 파커는 긴 항해를 떠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파커는 친구들의 충고도 무시한 채 젊은이의 야심을 품고 희망에 가득 차 항해에 참가했고, 이번 여행으로 남자다워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가 못했다.
 
폭풍→난파→3일 동안 순무→4일 바다거북 생포→8일 음식 없음→20일 파커의 희생→24일 구조
파커는 난파 초기에 다른 사람의 충고를 무시하고 바닷물을 마시다가 병이 났음.
 
생존자 세 명은 영국으로 돌아가자마자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당신이 판사라고 해보자. 어떤 판결을 내리겠는가? 상황을 단순화하기 위해, 법에 관한 문제는 제쳐두고, 당신은 그 남자아이를 죽인 짓이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 행위인가를 결정해야 한다고 가정하자.
피고 측은 그 끔찍한 상황에서는 한 사람을 죽여 세 사람을 살릴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누군가를 죽여서 먹지 않으면, 네 사람 모두 죽을 판이다. 나약하고 병에 걸린 파커가 적절한 후보였다. 어쨌거나 곧 죽을 테니까. 그리고 더들리나 스티븐슨과 달리, 파커는 부양가족이 없었다. 그가 죽는다고 해서 살길이 막막해질 사람도, 슬퍼할 아내나 아이도 없었다.
 
이 주장은 적어도 두 가지 반박에 맞닥뜨릴 수 있다.
① 전체적으로 볼 때, 파커를 죽여서 얻은 이익이 희생보다 정말로 더 컸는가를 물을 수 있다. 살아난 사람의 숫자나 생존자와 가족의 기쁨을 고려한다 해도, 그러한 죽음을 허용한다면 사회 전체로 보아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말하자면, 살인에 반대하는 기준이 약화되거나, 법을 멋대로 해석하려는 성향이 늘어나거나, 다른 선장들이 배에서 일할 사환을 구하기가 어려워질 수 있다.
② 그 이익이 희생이라는 비용보다 더 크다 해도, 무방비 상태의 남자아이를 죽여서 먹는 행위는 사회의 비용이나 이익을 계산하기에 앞서 용납될 수 없다는 정서가 있지 않은가? 상대의 나약함을 빌미로 본인의 동의도 없이 목숨을 빼앗는 식으로 인간을 이용하다니, 그런 행위는 아무리 다른 사람에게 이익이 돌아간다 해도 잘못이 아닌가?
 
구명보트 사건을 바라보는 두 사고방식은 정의를 이해하는 두 가지 상반된 시각을 보여준다. 하나는 어떤 행위의 도덕성은 전적으로 그것이 초래하는 결과에 달렸다는 시각이다. 모든 것을 고려해 최선의 상황을 도출하는 행위가 옳다. 또 하나는 도덕적으로 볼 때, 결과가 전부는 아니라는 시각이다. 의무와 권리에는 사회적 결과를 떠나 존중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구명보트 사건과 더불어 우리가 흔히 마주치는 여러 딜레마를 해결하려면, 도덕정치철학의 중요한 문제 몇 가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도덕은 목숨의 숫자를 세고, 비용과 이익을 저울질하는 문제인가? 아니면 특정한 도덕적 의무와 인권은 워낙 기본적인 덕목이라 그러한 계산을 떠나 별도로 존재하는가? 그리고 특정 권리가 그렇게 기본적이라면, 타고난 권리든, 신성한 권리든, 빼앗을 수 없는 권리든, 절대적 권리든 간에, 그것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는가? 더불어 그것은 왜 기본 권리인가?
 
 
- 제러미 벤담의 공리주의
제러미 벤담이 이 질문에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는 자명하다. 그는 타고난 권리라는 말에 조롱을 퍼부으며, 그런 권리를 “죽마에 올라탄 헛소리”라고 불렀다. 그가 주창한 철학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실제로 그의 철학은 오늘날에도 정책 입안자, 경제학자, 경영자, 일반 시민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영국의 도덕철학자이자 법 개혁가인 벤담은 공리주의를 주창했다. 공리주의의 핵심 사상은 간결하며, 언뜻 들어도 마음에 와 닿는다. 도덕의 최고 원칙은 행복을 극대화하는 것, 쾌락이 고통을 넘어서도록 하여 전반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벤담에 따르면, 옳은 행위는 ‘공리(功利,유용성)’를 극대화하는 모든 행위이다. 그가 말하는 ‘공리’란 쾌락이나 행복을 가져오고, 고통을 막는 것 일체를 가리킨다.
 
ㆍ거지를 한 곳에 몰아넣기
벤담은 우선, 거지와 마주치면 두 가지 측면에서 행복이 줄어든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정이 많은 사람이라면 동정심이라는 고통이, 정이 없는 사람이라면 혐오감이라는 고통이 생긴다는 것이다. 어떤 경우든 거지와 마주치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공리가 줄어든다. 따라서 벤담은 거지를 구빈원으로 몰아넣자고 제안했다.
벤담의 제안은 언뜻 가혹해 보이지만, 그의 목적은 벌을 주려는 게 아니다. 그는 단지 사회의 공리를 줄이는 문제를 해결해 다수의 행복에 기여하려 했을 뿐이다. 극빈자 관리 계획안은 한 번도 채택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계획의 밑바탕이 된 공리주의 정신은 지금도 건재하다. 오늘날 공리주의 사고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알아보기 전에, 벤담의 철학에 반박할 곳이 있는지, 있다면 그 근거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 반박 1: 개인의 권리
많은 사람이 지적하는 공리주의의 가장 두드러진 약점은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직 만족의 총합에만 관심을 두는 탓에 개인을 짓밟을 수 있다. 공리주의자들에게 개인은 단지 사람들의 선호도를 더할 때 계산되는 한 항목에 지나지 않는다.
 
ㆍ그리스도인을 사자 우리에 던지기
고대 로마에서는 콜로세움이라는 원형경기장에서 그리스도인을 사자 우리에 던져놓고 군중이 그것을 보고 즐기게 했다. 이때 공리주의자라면 어떤 계산을 할지 상상해보자. 물론 그리스도인은 사자에 물어뜯기는 극심한 고통을 겪는다. 그러나 콜로세움을 가득 메운 구경꾼들이 환호하며 느끼는 집단적 황홀경을 생각해보자. 만약 수많은 로마인이 그 살벌한 장면을 보며 쾌감을 느낀다면, 공리주의자들은 어떤 근거로 그 행위를 비난할까?
공리주의자들은 그 같은 게임이 천박한 습성을 키우고 로마 거리에서 폭력을 더욱 양산하리라고 우려하거나, 앞으로 희생자가 될 사람들 사이에서 언젠가는 자기들도 사자 우리에 던져질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공포가 확산되리라고 걱정할 것이다. 만약 그 공포가 심각해지면 게임이 제공하는 쾌감의 수준을 훨씬 넘어설 것이고, 그러면 공리주의자들은 게임을 금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재미삼아 그리스도인을 살벌한 죽음으로 내모는 행위를 고작 그런 계산에 근거해 금지한다면, 도덕적으로 중요한 것이 빠진 게 아닐까?
 
ㆍ고문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비슷한 의문은 오늘날의 논쟁에서도 생길 수 있다. 테러 용의자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고문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시한폭탄 이야기를 생각해보자. 당신은 미국중앙정보국 지역 국장이고, 어느 날 테러 용의자를 붙잡았다. 당신은 이 사람이 언젠가는 맨해튼을 폭파할 핵무기 정보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은 그가 이미 폭탄을 설치했다고 의심할 근거도 있다. 시계는 째깍거리는데, 용의자는 자신은 테러리스트가 아니라며 폭탄의 위치를 실토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가 폭탄이 설치된 장소를 말하고 그것을 제거할 방법을 자백할 때까지 고문을 해야 옳은가?
 
그래야 한다는 주장은 공리주의 계산에서 시작된다. 고문은 용의자에게 고통을 주고, 그의 행복 또는 공리 수준을 급격히 떨어뜨린다. 그러나 폭탄이 터지면 죄 없는 수천 명의 목숨이 날아갈 판이다. 따라서 당신은 공리주의 논리를 내세워, 엄청난 인명 피해와 고통을 막을 수만 있다면 한 사람에게 극심한 고통을 주는 행위가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들은 인간을 고문하는 행위가 근본적으로 잘못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다만 전체적으로 이익보다는 해가 많아서 부정적 결과를 낳으리라고 주장할 뿐이다.
그러나 공리주의 도덕의 근거를 시험하기에는 시한폭탄 이야기는 적절치 않다.
 
ㆍ행복한 도시
어슐러 르 귄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행복한 도시, 축복받은 시민의 도시인 오멜라스에는 왕도 노예도, 광고도 주식 거래도, 원자폭탄도 없는 곳이다. 독자들이 이곳을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곳으로 상상하지 않도록, 작가는 여기에 한 가지 사실을 덧붙인다. 오멜라스에서 아름답기로 소문난 공공건물 지하실에, 어쩌면 대궐 같은 개인 저택 천장에 방이 하나 있다. 방문은 잠겼고, 창문은 없다. 이 방에 아이가 하나 앉아 있다. 지능도 떨어지고 영양 상태도 안 좋은 아이는 방치된 채로 비참하게 하루하루를 연명해간다.
 
사람들은, 오멜라스의 모든 사람들은, 아이가 거기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들은 모두 아이가 거기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행복이, 도시의 아름다움이, 그들의 따뜻한 우정이, 자식들의 건강이, 심지어는 풍요로운 수확과 온화한 날씨까지도 전적으로 그 아이의 끔찍한 불행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그 비참한 곳에서 나와 햇빛을 본다면, 아이를 씻기고 먹이고 위로한다면 물론 좋은 일이겠지만, 그날 그 시간부터 오멜라스의 모든 풍요로움과 아름다움, 기쁨은 시들고 파괴될 것이다. 그것은 행복의 조건이다.
 
이 조건을 도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인간의 기본권 존중을 내세워 벤담의 공리주의에 반박하는 사람이라면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한다. 그 조건으로 시 전체가 행복해진다. 해도 그렇다. 다수의 행복이라는 명분 아래 죄 없는 아이의 인권을 침해하는 행위는 잘못이다.
 
 
- 반박 2: 가치를 나타내는 단일통화
공리주의는 행복을 계량하고 통합하고 계산하는 데 기초가 되는 도덕 과학을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또 사람들의 선호를 심판하지 않고 다만 그 무게를 잰다. 따라서 모든 사람의 기호는 동등하게 계산된다. 사적 판단을 배제하는 이런 태도 덕에 공리주의는 상당한 호소력을 지닌다. 그리고 도덕적 선택을 과학으로 만들어준다는 약속은 오늘날 경제 분야의 논리적 사고에 상당한 밑거름이 된다. 그러나 사람들의 기호를 더하려면 그것들을 하나의 저울에 올려놓고 계량해야 한다.
하지만 도덕적 행위를 모두 단일통화로 바꾸는 과정에서 뭔가 잃는 것은 없을까? 공리주의에 대한 두 번째 반박은 바로 이런 의구심에서 나온다. 이 반박에 따르면, 모든 가치는 공통된 하나의 통화로 파악될 수 없다.
 
이 반박을 살펴보기 위해, 공리주의를 비용ㆍ편익 분석에 이용하는 방식, 그러니까 정부와 기업에서 널리 이용하는 의사결정 방식부터 알아보자. 비용ㆍ편익 분석은 모든 비용과 이익을 돈으로 환산해 비교함으로써, 복잡한 사회문제에 맞닥뜨렸을 때 합리적이고 엄정한 선택을 하도록 한다.
 
ㆍ폐암의 이익
담배 회사인 필립 모리스는 체코에서 사업이 한창이다. 최근 체코 정부는 흡연에 따른 의료비용 증가를 우려해, 담배에 부과하는 세금을 높이는 방안을 검토했다. 필립 모리스는 세금인상을 막기 위해, 흡연이 체코의 국가 예산에 미치는 효과에 대한 비용ㆍ편익 분석 작업에 매달렸다. 그 결과, 정부는 흡연으로 손해가 아닌 이익을 본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유인즉, 흡연자들이 생존중에는 정부의 의료예산을 높이지만, 결국에는 일찍 죽기 때문에 노년층을 위한 의료ㆍ주거 부문에서 상당한 예산 절감 효과를 낳는다는 이야기다.
 
벤담은 공리라는 개념을 만들어, 인간 생명의 가치를 포함해 여러 종류의 관심사를 하나의 저울에 올려 정확히 측정하려 했다. 그렇다면 결국 모든 가치를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가는 물음으로 돌아가게 된다.
 
ㆍ폭발하는 가스탱크
포드 핀토는 1970년대에 미국에서 가장 잘 팔린 소형 자동차다. 그런데 불행히도 다른 차가 이 차를 뒤에서 들이받으면 연료탱크가 쉽게 폭발했다. 가스탱크의 폭발 위험성을 포드 기술자들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회사 경영자들이 비용ㆍ편익 분석을 해본 결과, 가스탱크를 안전하게 보호할 장치를 부착하려면 차 한 대당 11달러가 드는 반면 그에 따른 이익(목숨을 구하고 부상을 방지하는 등)은 그보다 크지 않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 연구를 보자마자 배심원들이 격분했다.
20만 달러를 받자고 자동차 사고로 인한 죽음을 택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구나 살고 싶어 한다. 교통사고 사망이 공리에 미치는 영향을 정확히 측정하려면, 장례비용뿐만 아니라 희생자가 미래에 얻을 소득이나 행복도 계산해야 한다. 그렇다면 사람목숨을 달러로 환산하면 정확히 얼마가 될까?
 
ㆍ노인 할인
2003년 환경보호국 대기 오염 기준을 내놓으면서 비용ㆍ편익 분석을 제시했다.
공기를 정화해 살릴 수 있는 목숨의 가치는 1인당 370만 달러, 70세 이상 노인은 230만 달러. 이 차이에는 공리주의 논리가 숨어있다. 노인의 목숨은 젊은 사람의 목숨을 구할 때보다 공리가 적다는 논리다. (젊은 사람은 더 오래 살 테니, 앞으로 누릴 행복도 더 크다.) ->보고서 내용 철회
 
공리주의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이 같은 사례를 증거로 내세워, 비용ㆍ편익 분석이 잘못 이용되고 있으며 사람 목숨을 돈으로 환산하는 것은 도의에 어긋나는 행위라고 지적한다. 비용ㆍ편익 분석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은 우리가 사회적 선택을 할 때, 재화나 편의를 얻기 위해 암묵적으로 사람 목숨과 거래를 하는 경우가 많다고 주장한다. 사람 목숨에도 가격이 있다는 얘기다.
공리주의자들은 사람 목숨을 돈으로 환산할 때 느끼는 거부감을 극복해야 할 충동적 감정이자, 명확한 사고와 합리적 선택을 방해하는 요소라고 본다. 그러나 공리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거부감이 도덕적으로 중요한 무언가를 가리키는 지표로 해석된다. 그들은 모든 가치와 행위를 하나의 저울로 계량하거나 비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 대가를 받고 치르는 고통
 
- 존 스튜어트 밀
우리는 이제까지 벤담의 ‘최대 행복’ 원칙에 대한 두 가지 반박을 살펴보았다. 하나는 인간의 존엄성과 개인의 권리에 많은 비중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중요한 도덕적 문제를 모조리 쾌락과 고통이라는 하나의 저울로 측정하는 오류를 범한다는 주장이다. 이 반박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
존 스튜어트 밀은 그 반박에 답을 할 수 있다고 믿은 사람이다. 벤담보다 한 세대 뒤에 태어난 밀은 계산적인 원칙보다는 좀더 인간적인 원칙으로 공리주의를 다듬어, 그것을 살리려 했다.
 
ㆍ자유 옹호
밀이 쓴 글을 잃으면 그가 개인의 권리와 공리주의 철학의 화해를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다. 밀은 공리주의를 아버지에게 물려받아 벤담에게서 충실히 받아들였다. 밀의 저서 《자유론》은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는, 영어권 세계의 고전이다. 이 책의 요지는, 사람들은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는 개인의 자유를 간섭하면서 개인을 보호하려 들거나 다수가 믿는 최선의 삶을 개인에게 강요하지 않아야 한다. 개인이 사회에 책임을 져야 하는 유일한 행동은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행동이라는 게 밀의 주장이다. 내가 어느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한, 내 “독립은 당연히 절대적이다. 개인은 자신에 대해, 자신의 몸과 마음에 대해 주권을 갖는다”.
 
밀은 우리가 공리를 극대화하되, 매 순간이 아니라 장기적인 관점에서 그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오랜 세월에 걸쳐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다 보면 인간의 행복이 극대화되리라고 주장한다. 다수가 반대 의견을 막거나 자유사상가를 검열할 수 있다면 오늘 당장 공리가 극대화될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사회의 불행이 늘고 행복은 줄 것이다.
 
ㆍ고급 쾌락
공리주의에 대한 두 번째 반박, 즉 공리주의는 모든 가치를 하나의 저울로 계량한다는 주장에 대한 밀의 반응 역시 공리와는 무관한 도덕적 이상에 기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유론》에 이어 집필한 긴 수필 《공리주의》에서 밀은 공리주의자들이 저급 쾌락과 고급 쾌락을 구분할 줄 안다는 것을 보여주려 애썼다.
 
벤담에게 쾌락은 쾌락이고 고통은 고통이다. 이 경험이 저 경험보다 더 나은가, 못한가를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은 그로 인한 쾌락이나 고통의 강도와 지속성이다. 벤담은 여러 쾌락의 질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쾌락의 양이 동일하다면 압정놀이나 시(詩)나 그게 그거다.”
 
벤담의 공리주의가 호소력을 갖는 이유는 사적 판단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취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뿐, 그것의 도덕적 가치를 심판하지 않는다. 모든 취향은 동등하게 계산된다. 벤담은 이 쾌락이 저 쾌락보다 본질적으로 더 낫다고 판단하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이는 모차르트를 좋아하고, 어떤 이는 마돈나를 좋아한다. 어떤 이는 발레를 좋아하고, 어떤 이는 볼링을 좋아한다. 어떤 이는 플라톤을 읽고, 어떤 이는 《펜트하우스》지를 본다. 벤담은 물을 것이다. 과연 누가 이 쾌락이 저 쾌락보다 더 고급이라거나, 더 가치 있다고나, 더 고상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고급 쾌락과 저급 쾌락을 구분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모든 가치를 하나의 저울에 올려 계량하고 비교할 수 있다는 벤담의 믿음과 관련있다. 모든 경험은 그로 인한 쾌락이나 고통의 질이 아닌 양에서만 차이가 날 뿐이라면, 그것들을 하나의 저울에 올려 무게를 재는 것도 말이 된다. 하지만 바로 이 점 때문에 공리주의를 반박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쾌락에도 분명 ‘고급’쾌락이 있다고 믿는다. 만약 어떤 쾌락은 가치 있는 반면 어떤 쾌락은 천박하다면, 사회는 모든 취향을 똑같이 계량해서는 안 되며, 그러한 취향의 합을 최대의 행복이라고 말할 수도 없으리라.
벤담은 사람들의 선호도를 가치를 따지지 않은 채 모두 더해서 어떤 법이 필요한가를 결정하려 했다. 그런데 렘브란트 그림을 감상하기보다는 투견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더 많다면, 사회는 미술관보다는 투견장에 보조금을 지급해야 할까? 저급하고 천박한 쾌락이 따로 있다면, 어떤 법을 도입할지 결졍하는 과정에서 그런 쾌락이 조금 이라도 영향력을 행사해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밀은 우선 공리주의 신조에 충실하겠다고 맹세한다. “행복을 양산 할수록 옳은 행동이며, 그 반대 상황을 초래할수록 나쁜 행동이다. 행복이란 쾌락이 있고 고통은 없는 것이며, 불행이란 고통이 있고 쾌락은 궁한 것이다.” 그는 또 “도덕 이론의 바탕이 되는 삶의 이론인 쾌락 추구와 고통에서의 해방이 유일하게 바람직한 목표”라고 확신하며, “모든 바람직한 것은 쾌락이 내재한다는 점에서, 또는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막는 수단이라는 점에서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밀은 쾌락과 고통이 전부라고 주장하면서도, “더 바람직하고 더 가치 있는 쾌락이 있다”고 덧붙인다. 그렇다면 어떤 쾌락이 질적으로 더 우수한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밀은 간단한 시험을 제안한다. “두 가지 쾌락이 있을 때, 그 둘을 모두 경험한 사람들 전부 또는 거의 전부가 어느 하나를 절대적으로 좋아한다면, 그것을 좋아해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감 따위와는 상관없이, 그것이 더 바람직한 쾌락이다.”
 
이 시험에서는 한 가지 분명한 이점이 있다. 도덕은 전적으로 우리의 실제 욕구에 달렸다는 단순한 공리주의 사고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밀은 “(어떤 행위가) 바람직한 무언가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유일한 증거는 실제로 사람들이 그것을 바란다는 사실뿐이다”라고 썼다. 그러나 쾌락을 질적으로 구분하는 그의 시험은 한가지 분명한 반박의 여지가 있다. 우리는 대개 고급 쾌락보다 저급 쾌락을 더 좋아하지 않던가? 우리는 더러 플라톤을 읽거나 오페라를 보러 가기보다는 소파에 누워 시트콤을 보고 싶어 하지 않던가? 이처럼 어떤 행위가 특별히 가치 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저 즐기기 쉽기 때문에 더 좋아하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ㆍ셰익스피어 대 《심슨 가족》
나는 고급 쾌락에 관한 밀의 설명을 학생들과 토론할 때면, 밀과 비슷한 시험을 해본다. 우선 학생들이 좋아하는 세 가지 오락거리를 제시한다. 세계레슬링대회의 난투극, 셰익스피어극 배우가 《햄릿》에서 독백하는 장면, 만화《심슨 가족》에 나오는 일부 장면이다. 그런 다음 두 가지를 묻는다. 이 가운데 가장 즐거운 것, 즉 쾌락을 가장 많이 느끼는 것이 무엇이며, 가장 고급이라거나 가치 있다고 느끼는 것은 무엇인가?
 
이 투표에서 가장 즐거운 오락거리로 《심슨 가족》이 항상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그 다음이 셰익스피어다. 하지만 어떤 것이 질적으로 가장 우수하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는 절대 다수가 셰익스피어에 표를 던진다.
이 결과는 밀의 시험에 한 가지 과제를 던진다. 학생 다수가 《심슨 가족》의 주인공 호머를 더 좋아하면서도 《햄릿》의 독백을 여전히 더 고급 쾌락으로 여긴다. 두 가지를 모두 경험한 사람 다수가 《심슨 가족》을 더 좋아한다면, 밀은 셰익스피어가 질적으로 더 우수하다고 결론 내리기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밀은 여러 생활방식 중에 더 고상한 것이 있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았다. 고상하게 사는 사람들의 만족도가 더 낮을지라도 그러했다. 밀은 이 점을 지적하며 유명한 말을 남긴다. “만족하는 돼지보다 만족하지 못하는 인간이, 만족하는 바보보다는 소크라테스가 낫다. 만약 바보가, 아니면 돼지가 다른 의견을 내놓는다면, 문제를 자기 쪽에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고급 능력을 신뢰하는 이 표현은 수긍이 간다. 그러나 밀은 이 말에 기대면서, 공리주의 전제에서 벗어나고 만다. 욕구는 더 이상 무엇이 고상하고 무엇이 저급인지를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이 못 된다. 이제 그 기준은 우리의 바람과 욕구와는 별개인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이상에서 나온다. 어떤 쾌락이 고급인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더 좋아해서가 아니라 고급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햄릿》을 위대한 예술이라고 판단하는 이유는 그보다 못한 오락거리보다 《햄릿》을 더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고급 능력을 끌어내고 더 인간답게 만들기 때문이다.
개인의 권리에서 그랬듯이 고급 쾌락에서도 밀은 공리주의가 모든 것을 단순히 쾌락과 고통으로 이분해 계산해버린다는 혐의를 벗기려 노력하지만, 되레 공리와는 무관한 인간의 존엄성과 개성이라는 도덕적 이상을 강조한 꼴이 되고 만다. 

3강.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소유하는가? : 자유지상주의

미국에서 부자라면 하위 순위일지언정 재산이 엄청나서, 몇 십억 달러로는 《포보스》400대 부자에 간신히 명함을 내밀 정도다. 사실 미국의 상위 1퍼센트 부자가 미국 전체 부의 3분의 1을 소유하는데, 이는 하위 ‘90퍼센트’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부를 모두 합친 것보다 많다.
 
경제 불평등은 다른 어느 민주국가보다 미국에서 훨씬 더 두드러진다. 어떤 사람은 이러한 불평등은 부당하며 부자에게 세금을 부과해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가 하면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도 있다. 이들은 강요나 사기가 없었다면, 그리고 시장경제에서 자유로운 선택을 부를 얻었다면 전혀 부당하지 않다고 말한다. 과연 누가 옳은가?
정의를 행복 극대화라고 생각하는 사람 : 빌게이츠의 100만 달러→가난한 100명에게 1만 달러 씩
 
이런 식의 로빈 후드 각본은 적어도 두 가지 반박에 직면할 수 있다.
① 높은 세율은 일과 투자에 대한 의욕을 꺾어 생산성 감소로 이어진다.
② 이런 계산은 본질을 벗어나는 것으로 봄. 부자에게 세금을 부과해 가난한 사람을 돕는 행위는 기본권을 침해하기 때문에 부당하다. 이 반박에 따르면, 게이츠와 윈프리가 동의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들의 돈을 가져가는 행위는 명분이 무엇이든 강압 행위다. 이는 내 돈을 내 마음대로 쓸 자유를 침해한다. 이러한 근거로 재분배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흔히 ‘자유지상주의자(libertarian)’라고 부른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규제 없는 시장을 옹호하면서 정부 규제에 반대하는데, 그 명분은 경제 효율성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다. 이들의 핵심 주장은 우리들 개인에게는 자유라는 기본권이 있다는 점이다. 다른 사람의 권리도 똑같이 존중한다면, 우리 소유물은 우리 마음대로 쓸 수 있다.
 
- 최소국가
자유지상주의자들의 권리 이론이 옳다면, 현대 국가의 행위 가운데 상당수가 위법이며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다. 오로지 최소국가만이 이들의 이론에 부합하는데, 최소국가란 계약을 집행하고, 개인의 재산을 보호하며, 평화를 유지하는 국가다. 국가가 그 이상의 기능을 수행한다면 부도덕하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현대 국가가 흔히 실시하는 정책과 법 가운데 다음 세 가지에 반대한다.
 
① 온정주의 : 자유지상주의들은 사람들을 다치지 않게 보호한다는 법에 반대한다. 안전벨트나 오토바이 헬멧 착용의 의무화하는 법. 헬멧을 쓰지 않고 오토바이를 타는 행위가 무모할지라도, 헬멧 착용 의무화 법이 목숨을 구하고 심각한 부상을 예방할지라도, 그러한 법은 어떤 위험을 감수할지를 결정할 개인의 권리를 침해한다고 주장. 제3자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한, 그리고 오토바이를 타는 사람이 치료비를 부담하는 한, 국가는 개인의 신체나 목숨과 관련해 이래라 저래라 할 권한이 없다.
 
② 도덕법 : 자유지상주의자들은 법이라는 강압적인 힘을 이용해 미덕을 권장하거나 다수의 도덕적 신념을 표현하는 행위에 반대한다. 매춘은 많은 사람에게 도덕적으로 못마땅한 행위겠지만, 그렇다고 성인들의 합의로 이루어지는 매춘을 법으로 금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 사회 구성원 다수가 동성애에 반대할지라도 게이나 레즈비언에게서 성 상대자를 고를 권리를 법으로 박탈하는 것은 옳지 않다.
 
③ 소득과 부의 재분배 : 자유지상주의자들의 권리 이론은 과세를 이용한 부의 재분배를 비롯해 누가 누구를 도와야 한다는 일체의 법 규정에 반대한다. 여유로운 사람이 의료, 주택, 교육을 보조하는 방법으로 여유롭지 못한 사람을 지원하는 행위는 바람직할지라도, 그런 일은 개인에게 맡길 일이지 정부가 강제할 게 아니다. 자유지상주의자들에 따르면, 재분배를 위한 과세는 강압 행위이며, 심지어 절도로도 볼 수 있다. 국가는 부유한 납세자에게 가난한 사람을 위한 사회 프로그램을 지원하라고 강요할 권리가 없으며, 그것은 자비로운 도둑이 부자의 돈을 훔쳐 집 없는 사람들에게 나눠 줄 권리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1980년대에 자유지상주의 사상은 친시장, 작은 정부를 지향하던 로널드 레이건과 마거릿 대처의 정책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났다. 그러나 지적 신념으로서의 자유지상주의는 그보다 앞서 복지 정책에 반대하며 나타났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경제학자이자 철학자인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자유헌정론》(1960)에서, 경제 평등을 성취하려는 시도는 하나같이 강압적이고, 자유 사회를 파괴하게 마련이라고 주장했다. 미국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은 《자본주의와 자유》(1962)에서, 국가가 할 일이라고 널리 인식된 행위 가운데 상당수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위법 행위라고 주장했다.
 
-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소유하는가?
자기소유라는 개념은 꽤 설득력이 있다. 개인의 권리에 탄탄한 기반을 제공하려는 사람들에게는 특히 그러하다. 나는 국가나 정치 공동체가 아닌 나 자신에게 속한다는 생각은,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내 권리를 희생하는 것이 왜 잘못인가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된다.
 
자유방임 경제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다른 영역에서는 자기소유 개념에 의지한다. 사람들은 흔히 정부가 피임이나 낙태를 금지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그 이유는 여성이 자기 몸에 대한 결정권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많은 사람이 간통, 매춘, 동성애를 법으로 처벌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성인들은 서로 합의하여 상대를 고를 자유가 있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내 몸의 소유자는 나라는 이유를 들어, 시장에서 장기이식을 위한 콩팥 거래에 찬성하고, 같은 이유로 다른 장기도 자유롭게 팔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원칙을 더욱 확대 적용해, 안락사 권리를 인정하는 사람도 있다. 내 삶은 내 것이니, 원하면 삶을 끝낼 자유가 있으며, 도와줄 마음이 있는 의사를 끌어들일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견해다. 내 마음대로 내 몸을 이용하거나 내 삶을 다루려 할 때 국가는 나를 막을 권리가 없다.
 
자신을 소유한다는 생각은 선택의 자유와 관련한 많은 논쟁에 등장한다. 내가 내 몸, 내 삶, 나라는 인간을 소유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그것을 내 마음대로 다룰 자유를 갖고 있어야 마땅하다. 이 생각은 제법 설득력이 있지만, 그 의미를 모두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다.
자유지상주의 원칙에 끌리고 그 원칙을 어디까지 적용할 수 있는지 궁금한 사람은 다음 경우를 생각해보라.
 
- 콩팥 판매
많은 국가가 장기 이식을 목적으로 한 장기 거래를 금지한다. 미국에는 콩팥을 기증하는 사람은 있을지언정 그것을 공개시장에 내다 파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관련법이 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해마다 수천 명이 콩팥 이식을 기다리다 죽어간다는 점, 그리고 자유시장에서 콩팥이 거래된다면 콩팥 공급이 늘어나리라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돈이 필요하고 자기가 원할 경우 콩팥을 팔수도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이렇다. 콩팥 시장 허용에 찬성하는 사라들은 대개 목숨을 구하는 행위의 도덕적 중요성, 그리고 콩팥 하나를 기증해도 나머지 콩팥으로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하지만 내 몸과 목숨이 내 재산이라고 믿는다면, 그 두 가지 이유 모두 중요하지 않다. 내가 나를 소유했다면, 내 몸을 마음대로 사용할 권리만으로도 내 몸의 일부를 팔 수 있지 않겠는가. 다른 사람의 목숨을 구한다거나 선행을 한다는 따위는 문제의 핵심을 벗어난다.
 
- 안락사
2007년, 일흔아홉 살의 잭 케보키언 박사가 삶을 마감하고 싶어 하는 말기 환자들에게 치사 약물을 투여한 죄로 미시간 교도에서 8년간 복역하고 출소했다. 오리건과 워싱턴 주를 제외하고, 미국의 모든 주에서 안락사는 불법이다. 다른 많은 나라도 마찬가지며, 몇 나라만이 이를 공식 허용한 상태다.
 
언뜻 보기에, 안락사 논쟁은 자유지상주의 철학을 교과서적으로 적용한 사례 같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이 보기에, 안락사를 금지한 법은 부당하다. 내 삶이 내 것이라면, 내게는 그것을 포기할 자유도 있어야 한다. 내 동의를 받아 누군가 내 죽음을 돕는다면, 국가는 여기에 간섭할 권리가 없다.
그러나 안락사 허용에 찬성한다고 해서, 반드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소유한다거나 우리 삶은 우리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안락사에 찬성하는 사람 다수가 소유권에 호소하기보다 존엄과 연민을 내세운다. 심각한 고통에 시달리는 말기 환자들은 극심한 고통 속에 연명하기보다 스스로 죽음을 앞당길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말기 환자의 경우, 안락사를 지지하는 자유지상주의 논리는 연민의 논리를 벗어나기 힘들다. 자기소유라는 개념의 도덕적 효력을 측정하기 위해, 말기 환자가 등장하지 않는 안락사를 생각해보자. 솔직히 조금 특이한 사례다. 하지만 특이하기 때문에, 존엄이나 연민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지상주의 논리 자체만을 평가할 수 있다.
 
- 합의하여 이루어진 식인 행위
2001년, 독일의 로텐부르크라는 마을에서 이상한 만남이 성사되었다. 소프트웨어 기술자인 마흔세 살의 베른트위르겐 브란데스는 죽어서 다른 사람에게 먹힐 의향이 있는 사람을 찾는 인터넷 광고에 응했다. 광고를 올린 사람은 컴퓨터 기술자인 마흔둘의 아민 마이베스였다. 약 200명이 광고에 반응해, 네 사람이 마이베스가 있는 농장을 찾아왔다가 결국 관심이 없다며 돌아갔다. 하지만 브란데스는 마이베스를 만나 커피를 마시며 그의 제안을 들어본 뒤에 승낙했다. 아이베스는 이 손님을 죽여, 시체를 토막 낸 뒤 비닐봉지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이 로텐수르크 식인종은 체포될 당시에 그 희생자를 20킬로그램이나 먹어치운 뒤였는데, 올리브기름과 마늘을 넣어 요리해 먹기도 했다.
 
마이베스가 재판에 회부되면서, 이 엽기적 사건은 사람들의 흥미를 자극했고 법정을 혼란에 빠뜨렸다. 독일에는 식인 행위를 처벌하는 법이 없다. 피고 측은 가해자에게 살인죄를 적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희생자가 자기 죽음에 기꺼이 동참했기 때문이다. 변호사는 마이베스의 경우 ‘요청에 의한 살인’ 죄만 인정된다고 주장했다. 일종의 안락사로, 최대 5년 형을 받을 수 있다. 법정은 마이베스에게 우발적 살인죄를 적용해 8년 반의 실형을 선고하여 이 수수께끼 같은 사건을 마무리하려 했다. 그러나 2년이 지나, 항소 법원은 형이 너무 가볍다는 이유로 판결을 뒤집어, 종신형을 선고했다.
 
성인들의 합의로 이루어진 식인 행위는 자기소유라는 자유지상주의 원칙과 여기서 나온 정의에 관한 생각을 시험하는 궁극적인 시험대다. 이 사건은 안락사의 극단적 예에 해당한다. 그러나 말기 환자의 고통을 완화하는 일과는 전혀 관계가 없기 때문에, 우리 신체와 목숨은 우리 소유이며 따라서 우리 마음대로 그것을 다룰 수 있다는 근거로만 정당화될 수 있다. 자유지상주의자의 주장이 옳다면, 합의로 이루어진 식인 행위를 금지하는 것은 부당하며, 자유권을 침해하는 조치다. 그렇다면 국가는 빌 게이cm와 마이클 조던에게 세금을 부과해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없듯이, 아민 마이베스 역시 처벌할 수 없을 것이다. 

 4강. 대리인 고용하기 : 시장과 도덕
  
정의를 둘러싼 치열한 공방에는 시장의 역할이 자주 거론된다. 자유시장은 공정한가? 돈으로 살 수 없는, 또는 사서는 안 되는 재화도 있을까?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재화이며, 그것을 사고파는 것이 왜 문제가 될까?
 
자유시장 옹호는 전형적으로 두 가지 주장에 근거한다. 하나는 자유에 관한 주장이고, 또 하나는 행복에 관한 주장이다. 첫 번째 주장은 시장을 옹호하는 자유지상주의자의 목소리다. 이들은 자발적 교환을 허용하는 것이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길이며, 자유시장에 간섭하는 법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말한다. 두 번째 주장은 시장을 옹호하는 공리주의자들이 내세우는 근거다. 이들은 자유시장이 전체의 행복을 증진시키며, 두 사람이 거래할 때 둘 다 이익을 얻는다고 말한다. 거래가 당사자에게 모두 이익이 되고 어느 누구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는 한, 전체 공리는 당연히 높아진다.
 
이번 장에서는 전쟁 수행과 대리 임신이라는, 성격이 매우 다른 두 가지 행위의 대가로 돈을 지불할 때의 도덕성 문제를 따져보려 한다. 논란의 대상인 이 두 사례에서 시장의 옳고 그름을 생각해본다면, 정의에 관한 대표적인 이론들의 차이점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 징집과 고용, 무엇이 옳은가?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벌어지던 처음 몇 달 동안은 축제 분위기와 애국심에 고조되어 북부 남자들 수만 명이 군에 자원했다. 그러나 북군이 불런에서 패배하고, 뒤이어 조지 매클랠런 장군의 리치먼드 점령 작전이 실패하면서, 북부 사람들은 전쟁이 쉽게 끝나지 않으리라고 예감하기 시작했다. 1862년 7월, 에이브러햄 링컨은 부족한 군인을 충당하기 위해 북부에서는 처음으로 징병법에 서명했다.
 
징병은 미국의 개인주의 전통을 거스르는 일이었다. 징집을 원치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고용해 대신 복무하게 할 수도 있었다. 대리인을 찾는 징집자들은 신문에 광고를 내어 최고 1500달러까지 제시했는데, 당시로서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남부연합 역시 유급 대리 복무를 허용하다 보니, “부자들의 전쟁, 가난한 자들의 싸움”이라는 표어가 생길 정도였고, 북부에서도 이러한 불만이 터져나왔다.
 
남북전쟁 때의 병역 제도는 병역을 할당하는 정당한 방법일까? 내가 학생들에게 이 질문을 던지면 거의 다 정당하지 않다고 대답한다. 돈 있는 사람들이 대리인을 고용해 자기 대신 싸우게 하는 행위는 부당하다는 것이다. 나는 학생들에게 다시 묻는다. 징병제가 좋은지, 아니면 지금처럼 100퍼센트 자원병제가 좋은지. 학생 대부분은 자원병 제도를 좋아한다. 하지만 이 경우 어려운 질문 하나가 생긴다. 부자가 자기들의 전쟁을 대신 싸워줄 사람을 고용한다는 이유로 남북전쟁 때의 병역 제도를 부당하다고 말한다면, 자원병에 대해서도 똑같이 반박할 수 있지 않겠는가?
물론 고용하는 방법은 다르다. 앤드루 카네기는 자기를 대신할 사람을 찾아 직접 돈을 지불해야 했다. 오늘날에는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에서 싸울 사람을 군이 모집하고, 납세자가 단체로 그들에게 돈을 지불한다. 그렇다면 우리도 입대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고용해, 그에게 목숨을 걸고 대신 전쟁을 치러달라는 셈이 아닐까? 이 경우 앞의 경우와 도덕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가? 남북전쟁 때 대리인을 고용한 제도가 부당하다면, 자원병 제도 역시 부당하지 않은가?
 
이 문제를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남북전쟁 때의 병역 제도는 제쳐두고, 군인을 모집하는 두 가지 경로인 징병과 시장을 생각해보자.
① 징병 : 군 복무에 적합한 시민을 모두 불러들이거나, 제비뽑기로 사람을 뽑아 사병을 모으는 방법.
② 자원군 : 식당, 은행, 소매점 등의 사업처럼 노동시장을 이용해 모병.
미국인 대다수는 자원군을 좋아하며, 징병제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자원군과 징병제를 둘러싸고, 정치철학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가 새롭게 떠올랐다. 개인의 자유와 시민의 의무에 관한 문제다.
 
이제까지 살펴본 병역을 할당하는 세 가지 방법, 즉 징병제, 대리인을 고용하는 징병제, 시장체제를 비교해보자. 어떤 방법이 가장 공정하겠는가?
① 징병제
② 유급 대리인을 허용하는 징병제 (남북전쟁 병역 제도)
③ 시장체제 (자원군)
 
 
 
- 자원군 옹호
자유지상주의자라면 답은 분명하다. 징병제는 강제성을 띤 일종의 노예제라서 부당하다. 이 제도는 국가가 시민을 소유하고 멋대로 다룰 수 있음을 암시하며, 따라서 시민에게 전쟁에 나가 목숨을 걸고 싸우라고 강요할 수 있다는 뜻이다. “징병은 두말할 것 없이 노예제다.”
그러나 징병을 노예제와 똑같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선택권을 제한하고 따라서 전체 행복을 감소시킨다는 이유로 징병에 반대할 수 있다. 공리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징병 반대 논리다. 대리인 고용을 허용하는 제도와 비교해, 징병은 서로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거래를 금지하여 사람들의 행복을 감소시킨다는 주장이다. 만약 앤드루 카네기와 그의 대리인이 모두 거래를 원한다면, 이들을 막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교환의 자유는 양자의 공리를 모두 높이면서 다른 누구의 공리도 줄이지 않는다. 따라서 공리주의 논리로 보자면, 남북전쟁 병역 제도(정책2)가 순수 징병제(정책1)보다 낫다.
 
남북정쟁 병역 제도(정책2)와 자원군(정책3)을 비교하면, 대리인 고용을 허용하면 애초에 징병을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차라리 노동시장에서 병사를 모집하면 간단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공리주의 관점에서 보자면, 자원군은 세 가지 중에 최고의 선택이다. 주어진 보상에 근거해 입대를 할지 말지 선택하게 한다면, 사람들은 자신의 공리를 극대화할 수 있을 때만 군 복무에 응한다. 복무를 원치 않는 사람은 자신의 의지를 거슬러 입대를 강요받아 공리를 잃는 상황에 놓이지 않아도 된다.
 
그렇다면 자유지상주의 논리로 보나, 공리주의 논리로 보나, 군 복무 할당 방법에서 자원군이 최고의 선택이고, 그다음이 남북전쟁 때의 혼합형 제도이며, 징병제는 가장 바람직하지 못한 선택이 된다. 그러나 이 순위 매기기에 두 가지 반박이 가능하다. 하나는 공정성과 자유에 관한 반박이고, 또 하나는 시민의 미덕과 공동선에 관한 반박이다.
 
반박 1 : 공정성과 자유
첫 번째 반박은 대안이 제한적인 상황에서는 자유시장이 그다지 자유롭지 못하다는 주장이다. 극단적인 예를 생각해보자. 다리 아래에서 잠을 자는 노숙자는 그 행위를 선택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를 자유로운 선택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게다가 그가 아파트보다 다리 아래에서 자는 것을 더 좋아하리라고 추측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의 선택이 노숙을 좋아하는 취향에서 나왔는지, 아파트에서 잘 형편이 못 되는 경제적 이유에서 나왔는지를 알려면 주변 사정을 알아야 한다. 그는 지금 자유의사로 행동하는 것일까? 어쩔 수 없이 필요에 따라 행동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 질문이 병역 문제에는 어떤 식으로 적용될까? 자원군이 정당한지 부당한지를 판단하려면 먼저 사회의 제반 여건을 알아야 한다. 기회 균등은 적절한 수준인가, 아니면 어떤 사람은 삶에서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는가? 모든 사람에게 대학 교육을 받을 기회가 주어지는가, 아니면 어떤 사람의 경우 대학 등록금을 마련할 방법이 입대하는 길뿐인가?
 
자원군은 겉보기만큼 자발적이지 않을지 모른다. 실제로 강압적 요소가 끼어들 수 있다. 사회에서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없다면, 입대를 결정한 사람은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징집되는 셈이다. 오늘날의 자원군 구성 계층을 보면 이 반박이 어느 정도는 옳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04년 자원자 70퍼센트가 저소득층 출신의 흑인과 히스패닉 계.
이처럼 자원군을 지지하는 시장 논리에 대한 첫 번째 반박은 불공평 그리고 강제와 관련이 있다.
 
 
반박 2 : 시민의 미덕과 공동선
시장을 이용해 군 복무를 할당하는 문제에 대한 두 번째 반박을 살펴보자.
이 반박에 따르면 군 복무는 단순히 여러 직업 중 하나가 아니라 시민의 의무다. 모든 시민은 나라에 봉사할 의무가 있다. 군 복무가 시민의 의무라면, 그것을 시장에 내놓고 거래하는 것은 잘못이다.
 
역시 시민의 책임인 배심원 의무를 생각해보자. 배심원 의무를 이행하다 죽은 사람은 없지만, 배심원으로 불려가는 일은 귀찮다. 특히 다른 일이나 다급한 약속과 겹치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사람을 사서 배심원을 대신하게 하는 일은 허용되지 않는다. 노동시장을 이용해 자원자로만 이루어진 전문 유급 배심원 제도를 만들지 않는다. 왜 그럴까? 시장 논리로 보자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징집에 반대하는 공리주의 논리를 그대로 이용해 배심원 징발에 반대할 수도 있다. 즉 바쁠 때는 대리인을 고용해 배심원 의무를 맡기면 두 사람 모두에게 이익이다. 강제성을 띤 배심원 의무를 아예 없애면 더 좋을 것이다. 그리고 필요한 인원과 자질을 고려해 노동시장에서 배심원을 모집한다면, 그 일이 내키는 사람은 하고 내키지 않는 사람은 안 해도 그만이다.
 
이처럼 배심원 제도에 시장을 이용하면 사회의 공리가 높아지는데, 왜 그렇게 하지 않을까? 그 이유는 유급 배심원을 뽑으면 소외계층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을 수 있고 따라서 재판의 질이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부자라고 해서 부자가 아닌 사람보다 더 훌륭한 배심원이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어떤 경우든, 적절한 보수와 복리후생을 정해, 필요한 교육 수준과 능력을 갖춘 사람을 모집하면 되지 않겠는가.
 
우리가 배심원을 고용하기보다 징발하는 이유는 법정에서 정의를 집행하는 행위를 모든 시민이 함께 나눠야 할 책임으로 보기 때문이다. 배심원은 단지 투표만 하지 않는다. 이들은 증거와 법을 하나하나 심사숙고하는데, 여기에는 각계각층 사람들로 구성된 배심원들의 서로 다른 경험이 큰 도움이 된다. 배심원 업무는 단지 사회문제를 푸는 하나의 방식에 그치지 않는다. 시민 교육의 장이자, 민주 시민의 표현 방식이기도 하다. 배심원 의무가 늘 교화적이지는 않지만, 모든 시민은 그것을 이행해야 한다는 생각은 법정과 사람들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군 복무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징병에 찬성하는 쪽은 군 복무 역시 배심원 의무처럼 시민의 책임이라고 주장한다. 군 복무는 민주사회의 시민 의식을 드러낼 뿐 아니라 심화시킨다. 이런 견해에서 보면, 군 복무를 상품 취급해 사람을 사서 대신하게 하는 반박에 따르면, 군인을 고용해 전쟁터에 나가 대신 싸우게 하는 것은 잘못이다. 가난한 사람에게 공평치 못한 처사라서가 아니라 시민의 의무를 저버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군 복무는 (그리고 어쩌면 국가에 봉사하는 일은) 모든 시민이 수행해야 하는 의무일까, 아니면 (광업이나 어업 같은) 힘든 직업처럼 위험한 일의 하나이며 따라서 노동시장의 원리에 따라야 마땅할까? 이 질문에 답을 하려면 더 포괄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민주사회의 시민이라면 서로에게 어떤 의무를 지며, 그 의무는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 정의에 관한 서로 다른 이론은 이 질문에도 서로 다른 답을 내놓는다. 군인을 징집해야 할지, 고용해야 할지는 시민 의무의 기본과 범위를 살펴본 뒤에 결정한다면 한결 수월할 것이다. 그전에 노동시장 활용과 관련한 논쟁을 하나 더 살펴보자.
 
 
 
- 대가를 받는 임신
윌리엄 스턴과 엘리자베스 스턴은 뉴저지 테너플라이에 사는 부부로, 남편은 생화학자이고 아내는 소아과 의사다. 두 사람은 아이를 갖고 싶었지만, 아내 엘리자베스가 다발성경화증을 앓고 있어 아이를 가지려면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이들은 불임센터를 찾아갔고, 그곳에서 대리 출산을 알선해 주었다. 센터는 ‘대리모’를 찾는다는 광고를 냈다. 대리모란 돈을 받고 다른 사람의 아이를 임신해주는 여자다. 메리 베스 화이트헤드가 지원. 1만 달러(아이를 넘겨받는 순간 지불)와 함께 의료비를 지급하기로 약속.

메리 베스는 임신을 했고, 1986년 3월에 여자아이를 출산했다. 스턴 부부는 아이에게 ‘멜리사’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런데 막상 출산하고 보니 아이와 떨어질 수 없었던 메리 베스 화이트헤드는 결국 아이를 주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아이를 데리고 플로리다로 도망쳤고, 스턴 부부는 메리 베스가 아이를 넘겨주어야 한다는 법원 명령을 얻어냈다. 플로리다 경찰은 메리 베스를 찾아냈고, 아이는 스턴 부부에게 넘겨졌으며, 양육권 다툼은 뉴저지 법원으로 넘어갔다. 
 
물론 흔한 상업 거래는 아니다. 그러다 보니 다음 두 가지 이유로 그 계약을 강제로 집행하기가 망설여진다. 첫째, 여자가 임신해 돈을 받고 아이를 넘겨주겠다고 약속할 때 관련 정보를 충분히 갖고 있었는가? 막상 아이를 넘겨줄 때 어떤 느낌이 들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는가?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동의했더라도 돈이 궁해서였고 아이와 떨어질 때 어떤 느낌일지 잘 알지 못했다면, 계약의 의미가 퇴색된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양쪽이 자유롭게 동의했더라도 아이를 사고팔거나 여성의 출산 능력을 빌려주는 행위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행위는 아이를 상품으로 전락시키고, 임신과 출산을 돈벌이로 만들어 여성을 착취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1심 하비 소코우 판사 : 두 가지 반론 무시. 애초의 합의에 손을 들어주면서, 계약의 신성함을 강조
상고→뉴저지 대법원 : 만장일치로 소코우 판사의 판결을 뒤집어 대리 출산 계약이 무효라고 판결.
 
대법원장 로버트 윌렌츠는 판결문에서, 대리 출산 계약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 계약이 전적으로 자발적이지 않았으며, 거기에는 아기를 파는 행위가 포함되었다고 주장했다. 우선 그 계약에 문제가 있다. 임신해서 아이를 낳으면 바로 넘겨주겠다는 메리 베스의 약속은 관련 정보가 충분히 제공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전적으로 자발적이지 않다. 일단 이이가 태어나면, 어머니는 분명한 정보를 갖고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그전에 내리는 결정은 “소송 위협에, 그리고 1만 달러의 유혹에” 어쩔 수 없이 내리는 결정이라서 “전적으로 자발적일 수 없는” 결정이다.
 
 
 
- 대리 출산 계약과 정의
그렇다면 ‘아기 M’ 사건에서 누가 옳았을까? 계약을 인정한 1심법원인가, 계약을 무효로 만든 상급 법원인가? 이 문제에 답하려면, 먼저 계약의 도덕적 효력과 대리 출산 계약에 대한 두 가지 반박을 따져보아야 한다.
대리 출산 계약을 지지하는 주장은 이제까지 우리가 살펴본 정의의 두 가지 이론, 즉 자유지상주의와 공리주의에서 출발한다. 자유지상주의는 이 계약이 선택의 자유를 반영한다는 근거를 내세운다. 성인들이 합의하여 맺은 계약을 지키는 것은 자유를 존중하는 일이다. 반면에 공리주의는 전체 행복이 커진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양 당사자가 계약에 합의했다면, 둘 다 이익이나 행복을 얻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합의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그 거래로 다른 사람의 공리가 줄지 않는다면 대리 출산 계약을 비롯해 서로에게 이로운 교환은 장려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반박은 어떨까?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
 
 
반박 1 : 문제가 있는 합의
메리 베스 화이트헤드의 동의가 전적으로 자발적이었는가에 관한 첫 번째 반박은 사람들이 선택을 할 때 놓이는 상황에 주목한다. 이 주장의 핵심은 소위 자발적 동의의 진정성을 가르는 기준이다. 이 문제는 자원군 논쟁에서처럼 아기 M 사건에서도 중대한 쟁점이다.
 
이 경우에서 한 걸음 물러나, 의미 있는 합의의 조건에 관한 논쟁을 보자. 이는 사실 우리가 이 책에서 살펴보는, 정의를 이해하는 세 가지 방식 중 하나인, 정의란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둘러싼 공방과 같은 부류임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자유지상주의도 이 부류에 속한다. 자유지상주의는 사람들이 어떤 선택을 하든,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 그 선택을 존중해야 정의를 달성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정의를 자유 존중으로 보는 다른 이론들은 선택의 조건에 약간의 제한을 둔다. 이들은 월렌츠 판사가 아이 M 사건에서 그랬듯이, 압력을 받는 상황에서의 선택이나 정보가 부족한 상태에서의 합의는 진정한 자발적 선택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 논쟁을 좀더 정확히 평가하기 위해 존 롤스의 정치철학에 눈을 돌리는 것도 좋다. 존 로스는 자유진영에 선 사람으로, 정의에 관한 자유지상주의의 설명을 거부한다.
 
 
반박 2 : 비하와 고귀한 재화
아기나 여성의 출산 능력처럼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도 있다는 두 번째 반박은 어떠한가? 그런 것들을 사고파는 행위는 정확히 무엇이 문제인가? 가장 설득력 있는 답은, 아기나 임신을 상품으로 취급하는 행위는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비하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이 대답의 바탕에는 재화나 사회적 행위의 가치는 단지 우리가 부여하기 나름만은 아니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가치 부여 방식은 재화나 행위의 종류에 따라 달라진다. 자동차나 토스터 같은 상품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하는 방법은 그것을 사용하거나, 팔아서 이익을 남기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상품으로 취급해서는 곤란하다. 예를 들어, 인간을 단순히 사고파는 상품으로 취급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인간은 존중받아야 하는 존재이지, 사용하는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존중과 사용은 가치를 부여하는 두 가지 서로 다른 방식이다.
현대의 도덕철학자인 엘리자베스 앤더슨은 이 논리를 대리 출산 논쟁에 적용했다.
 
앤더슨 주장의 핵심은 재화라고 해서 다 같은 재화가 아니라는 점이다. 따라서 모든 재화의 가치를 이익의 수단이나 물건의 효용만을 따져 평가해서는 안 된다. 만약 이 주장이 옳다면, 세상에는 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존재하는가도 설명할 수 있다.
이 주장은 공리주의에도 도전한다. 정의가 단지 쾌락을 극대화하여 고통의 양(量)을 넘어서게 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모든 재화를, 그로 인한 쾌락이나 고통을, 단 하나의 통일된 방법으로 무게를 달아 가치를 평가하면 그만이다. 벤담은 바로 이 목적을 위해 공리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앤더슨은
 
그런데 그 높은 기준이란 대체 무엇이며, 각 재화와 사회적 행위에 걸맞는 평가 방법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한 가지 답은 자유에 대한 생각에서 출발한다. 인간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으니, 물건 취급 받아서는 안 되며, 존엄성을 가진 존재로 존중받아야 한다. 이런 시각은 인간과 물건의 차이를 강조하면서, 이를 도덕성의 근본 차이로 인식한다. 이런 시각을 가장 강력하게 옹호한 사람이 다음 장에서 살펴볼 이마누엘 칸트다.
 
 
 
- 외주 임신
새로운 불임 치료술이 개발되면서 대리 출산 경제학에 변화가 생기고, 윤리적으로 더욱 골치 아픈 문제들이 생겨났다. 이제까지 대리 출산 계약을 맺은 사람은 대개 “난자와 자궁을 한 묶음으로 구매해야” 했다. 그러나 이제는 “한 곳에서 난자를, 한 곳에서 자궁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대리 출산 양상이 바뀌면서 수요뿐만 아니라 공급도 늘어났다. 대리모는 현재 임신 한 건당 2만~2만 5000달러를 받는다. 그리고 총비용(의료비와 법적 비용 포함)은 보통 7만 5000~8만 달러에 이른다.
 
가격이 이 정도까지 치솟다 보니, 값싼 대안을 찾기 시작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오늘날 같은 세계경제체제에서, 돈을 지불하는 임신의 수요자도 다른 상품이나 서비스처럼 좀더 값싼 공급자를 찾아 밖으로 논을 돌리게 되었다. 2002년, 인도는 외국인 고객을 유치할 목적으로 상업적 대리 출산을 합법화했다.
 
아이를 출산하는 행위와 전쟁을 수행하는 행위만큼이나 서로 이질적으로 보이는 행위는 또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인도의 대리 출산과 앤드루 카네기가 남북전쟁에서 자기 대신 싸울 군인을 고용한 사례에는 뭔가 공통점이 있다. 이 상황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생각하다 보면, 정의의 개념을 서로 다르게 규정하게 하는 두 가지 질문에 직면한다. 자유시장에서 우리의 선택은 얼마나 자유로운가? 세상에는 시장이 존중하지 않는, 그리고 돈으로 살 수 없는 미덕과 고귀한 재화가 과연 존재할까?

5강. 중요한 것은 동기다 : 이마누엘 칸트
 
칸트의 철학은 어렵다. 하지만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는 중대한 질문을 다룬다. 도덕의 최고 원칙은 무엇인가? 그리고 자유란 무엇인가? 칸트를 이해하는 것은 철학을 이해하는 일일뿐 아니라, 공적 삶의 핵심 사고방식을 살펴보는 일이다.
 
보편적 인권을 믿는 사람이라면 공리주의자는 아닐 것이다. 모든 인간은 그가 누구든, 어디에 살든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면, 단순히 집단적 행복의 도구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을 존중하면 장기적으로는 공리가 극대화된다는 이유로 인권을 옹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 권리를 존중하는 이유는 권리를 가진 사람을 존중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고통을 안겨준 행위를 비난하되, 전체 공리가 줄었다는 이유로 비난하는 것과, 그런 행위는 기분적으로 도덕성에 문제가 있고 아이에게 부당한 처사라는 이유로 비난하는 것은 다르다.
 
권리가 공리에 좌우되지 않는다면, 권리의 도덕적 근거는 무엇일까? 여기에 자유지상주의자들이 한 가지 답을 제시한다. 개인은 타인의 행복에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자기소유라는 기본권을 침해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내 삶, 내 노동, 나라는 인간은 내게, 오직 내게만 속한다. 사회가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다.
그러나 이제까지 살펴보았듯이, 꾸준히 거론되는 자기소유라는 개념에는 열렬한 자유지상주의자만이 찬성할 수 있는 것들이 내포되어 있다. 즉 낙오자를 보호할 안전장치가 없는 자유시장, 불평등을 해소하고 공동선을 장려할 거의 모든 수단을 배제하는 최소국가, 합의를 완벽한 행위로 칭송하여 합의한 식인 행위나 노예 매매처럼 스스로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행위마저 인정하는 사고방식이다.
 
 
- 칸트의 권리 옹호
이마누엘 칸트는 의무와 권리에 대해 다른 어떤 철학자보다 분명하고 영향력 있는 설명을 제시한다. 그의 설명은 우리는 자신을 소유한다거나 우리 목숨과 자유는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주장에 근거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우리는 존중받아야 하는 존엄성을 지닌 이성적 존재라는 생각에 기초한다.
 
칸트는 행복 극대화와 미덕 장려를 거부한다. 둘 중 어느 것도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정의와 도덕을 자유와 연관시키는 두 번째 시각을 열렬히 옹호한다. 그가 내세우는 자유는 까다롭다. 우리가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팔 때 행사하는 선택의 자유보다 훨씬 더 까다롭다. 칸트는 우리가 흔히 시장의 자유나 소비자의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 자유에는 애초에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욕구를 충족하는 행위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 행복 극대화의 문제점
칸트는 공리주의를 거부한다. 공리주의는 권리를 따질 때도 최대행복에 기여하는지 계산기를 두드려보는 탓에 권리를 무기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우연히 생기는 욕구에서 도덕원칙을 끌어내려 함으로써 도덕을 생각하는 방식부터 그르친다. 많은 사람에게 쾌락을 준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옳다고 할 수는 없다. 다수가 특정 법을 지지한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옳다고 할 수도 없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아무리 열렬히 지지한다 해도 그렇다.
 
공리주의가 말하는 행복 원칙은 “도덕성 확립에 어떤 식으로든 전혀 기여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그를 선하게 만드는 것과는 사뭇 다른 일이며, 이익 추구에 신중하거나 약삭빠르게 만드는 것은 덕이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과는 다른 일이기 때문이다.” 도덕을 사람들의 흥미와 기호를 기준으로 평가한다면 도덕의 위엄이 땅에 떨어진다. 그리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법을 가르치지 못하고, “계산에만 밝은 사람이 되게 할 뿐”이다.
 
칸트는 사람은 누구나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자신을 소유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성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자율적 존재이며, 자유롭게 행동하고 선택할 능력이 있다.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은 자유롭게 행동하는 능력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이 두 가지 능력이 합쳐져 우리는 특별한 존재,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존재가 된다. 이 능력으로 우리는 단지 식욕만을 느끼는 동물에서 벗어난다.
 
 
- 자유란 무엇인가?
칸트의 도덕철학을 이해하려면 그가 말하는 자유를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자유를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상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칸트의 생각은 다르다. 그가 생각하는 자유는 좀더 엄격하고 까다로운 개념이다.
 
칸트의 논리는 이렇다. 다른 동물처럼 쾌락이나 고통 회피를 추구한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식욕과 욕구의 노예로 행동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행동은 우리 밖에 주어진 어떤 목적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허기를 달래려고 이 길로 가고, 갈증을 해소하려고 저 길로 간다. 이때 욕구는 내가 선택한 게 아니라 이미 갖고 있는 욕구일 뿐이다.
 
칸트가 말하는 자율적 행동의 의미를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은 그 반대 개념과 대조하는 것이다. 칸트는 ‘타율’이라는 말을 만들어 이를 포착했다. 내가 타율적으로 행동한다면, 내 밖에 주어진 결정에 따라 행동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설명해보자. 당구공을 손에서 놓으면, 공은 땅에 떨어진다. 이것은 공의 자유로운 행위가 아니다. 공의 움직임은 자연법칙, 그러니까 중력의 법칙에 지배받는다.
 
여기서 자율로서의 자유와 칸트가 말하는 도덕의 연관관계를 볼 수 있다. 자유로운 행동은 주어진 목적에 걸맞은 최선의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를 선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만이 할 수 있고 당구공은 (그리고 대부분의 동물은) 할 수 없는 선택이다.
 
 
- 도덕이란 무엇인가? 동기를 찾아라
칸트에 따르면, 어떤 행동의 도덕적 가치는 그 결과가 아니라 동기에 있다. 중요한 것은 동기이며, 그것은 특정한 종류라야 한다. 중요한 건 옳은 일을 하는 것이며, 그 이유는 옳기 때문이라야지, 이면에 숨은 동기 때문이어서는 안 된다.
“선한 의지가 선한 까닭은 그것이 어떤 효과나 결과를 낳아서가 아니다”라고 칸트는 말한다. 그것은 널리 인정받든 그렇지 않든 그 자체로 선하다. “비록 이 의지가 원래 의도를 널리 퍼뜨릴 힘이 매우 부족하다 해도, 아무리 노력해도 성과를 얻을 수 없다 해도, 그것은 그 자체로 충분한 가치를 지닌 보석처럼 빛날 것이다.”
 
칸트는 단지 의무 동기만이 어떤 행동에 도덕적 가치를 부여한다고 말할 뿐, 우리에게 특별히 어떤 의무가 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도덕의 최고 원칙이 무엇을 명령하는지도 말해주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어떤 행동의 도덕적 가치를 평가할 때 그 동기를 따질 뿐, 결과를 따지지 않는다고 말할 뿐이다.
만약 의무가 아닌 다른 동기로, 이를테면 자기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행동한다면, 그것은 도덕적 가치가 부족한 행동이다. 비단 내 이익만이 아니라 내 바람, 욕구, 기호, 식욕을 채우려는 모든 시도도 마찬가지다. 칸트는 자신이 ‘끌림 동기’라 부른 것을 의무 동기와 대조해 비교한다. 그러면서 의무 동기에서 나온 행동만이 도덕적 가치를 지닌다고 주장한다.
칸트는 의무와 끌림의 차이를 보여주는 몇 가지 예를 제시한다.
 
ㆍ계산적인 가게 주인과 ‘바른 거래 사무국’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이, 이를테면 어린 아이가, 가게에 들어와 빵을 사려고 한다. 주인이 원래 빵 값보다 돈을 더 받아 바가지를 씌워도 아이는 그 사실을 모를 것이다. 하지만 주인은 아이를 그렇게 이용한 사실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소문이 퍼져 장사에 타격을 입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이에게 바가지를 씌우지 않기로 한다. 그리고 정상적인 값을 부른다. 이때 가게 주인은 옳은 일을 했지만, 그 이유는 옳지 않다. 그가 아이와 정직하게 거래한 유일한 이유는 자신의 평판 때문이다. 자기 이익만을 위해 정직하게 행동했을 뿐이다. 따라서 가게 주인의 행동은 도덕적 가치가 부족하다.
 
 
- 도덕의 최고 원칙은 무엇인가?
도덕이 의무감에서 행동하는 것이라면, 의무의 필수 조건을 밝히는 일이 남는다. 칸트에게 이를 파악하는 것은 곧 도덕의 최고 원칙을 파악하는 것이다. 도덕의 최고 원칙은 과연 무엇인가? 칸트가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에서 추구하는 목표도 바로 이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다.
칸트가 세 가지 중요한 개념인 도덕, 자유, 이성을 어떻게 연관 짓는지 살펴본다면, 칸트의 대답에 좀더 쉽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 개념들을 대조 또는 이원론으로 설명한다.
ㆍ대조1(도덕) : 의무 대 끌림
ㆍ대조2(자유) : 자율 대 타율
ㆍ대조3(이성) : 정언명령 대 가언명령
 
의무와 끌림이라는 첫 번째 대조는 이미 살펴보았다.
두 번째 대조는 내 의지가 결정되는 방식인 자율과 타율이다. 칸트에 따르면, 내 의지가 자율적으로 결정될 때만이, 그러니까 내 의지가 내가 나에게 부여한 법칙에 지배될 때만이 나는 자유롭다.
내 의지가 타율적으로 결정된다는 말은 내 외부에서 결정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때 어려운 질문이 하나 생긴다. 자유가 내 욕구와 끌림을 따르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은 외부 영향으로 결정되는 욕구나 끌림에서 나오지 않던가?
그 답은 결코 명확치 않다. 칸트가 관찰하기로는 “자연의 모든 것은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자연스러운 필요 법칙, 물리법칙, 인과법칙 등. 여기에는 우리도 포함된다. 우리도 어쨌거나 자연의 존재니까. 인간이라고 자연법칙에서 예외일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자유롭게 행동하는 능력이 있다면, 물리법칙이 아닌 다른 무언가에 따라 행동할 수도 있을 것이다. 칸트는 모든 행동은 특정 법칙에 지배된다고 주장한다. 우리 행동이 물리법칙에만 지배된다면, 우리는 당구공과 다를 바 없다. 따라서 자유롭게 행동한는 능력이 있다면, 저절로 주어진 법칙만이 아니라 자신에게 부여한 법칙에 다라 행동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법칙이 어디서 나올까?
칸트의 답은 이성이다. 우리는 감각이 전달하는 쾌락과 고통에 지배되는 감각적 존재일 뿐 아니라, 이성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존재다. 만약 이성이 우리의 의지를 결정한다면, 그 의지는 자연이나 끌림의 명령에 구애받지 않는 선택의 힘이 될 수 있다.
공리주의자들은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보았지만, 이때의 이성은 도구로서의 이성이다. 이들은 이성의 역할을 어떤 목적이 추구할 가치가 있는가를 결정하는 게 아니라 우연히 생긴 욕구를 총족하여 공리를 극대화할 방법을 찾는 것이라고 보았다.
 
칸트는 이성이 이런 부차적 역할을 할 뿐이라는 생각을 거부한다. 그에게 이성은 한낱 열정의 노예가 아니다. 칸트는 도덕과 관련된 이성을 도구로 여기지 않고 “어떤 경험적 목적에도 상관없이 선험적으로 정해지는 순수 실천 이성”으로 여긴다.
 
 
- 정언명령 대 가언명령
그러나 이성이 어떻게 이를 해낼 수 있을까? 칸트는 이성이 의지에 명령하는 두 가지 방법을 구별한다. 하나는 잘 알려진 가언(假言)명령이다. 가언명령은 이성을 도구로 활용한다. ‘X를 원한다면 Y를 하라’는 식이다. 말하자면, ‘사업가로 좋은 명성을 얻고 싶다면 고객을 정직하게 대하라’는 명령이다.
칸트는 언제나 조건이 따라붙는 가언명령을 조건 없는 명령인 정언(定言)명령과 대조한다. “어떤 행동이 다른 것의 수단으로만 바람직하다면, 이때의 명령은 가언명령이다. 어떤 행동이 그 자체로 바람직하다면, 따라서 이성에 부합하는 의지에 꼭 필요하다면, 이때의 명령은 정언명령이다.” ‘정언’이라는 말이 전문 용어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흔히 쓰는 말과 아주 동떨어진 것도 아니다. 칸트가 말하는 ‘정언’은 조건이 없다는 뜻이다.
 
ㆍ정언명령 1 : 당신의 행동준칙을 보편화하라
칸트가 말하는 보편적 법칙의 첫 번째 공식은 이렇다. “행동준칙에 따라 행동하되, 이는 보편적 법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준칙이라야 한다.” 칸트가 말하는 ‘행동준칙’은 내 행동에 근거가 되는 규칙이나 원칙을 뜻한다. 그의 말은 궁극적으로, 모순이 없이 보편화할 수 있는 원칙에 따라서만 행동해야 한다는 뜻이다.
 
ㆍ정언명령 2 :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라
그 어떤 이익이나 목적도 도덕법의 기초로 삼을 수 없다고 말한다. 도덕법은 사람, 즉 그 자체가 목적인 사람에게만 관련되기 때문이다.
무엇이 그 자체가 목적이면서 존재만으로도 절대적 가치를 지닐까? 칸트의 답은 인간이다. “인간은, 그리고 일반적으로 모든 이성적 존재는, 이런저런 의지에 따라 임의로 사용되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으로 존재한다.”
 
 
- 도덕과 자유
우리는 이제 칸트가 생각한, 도덕과 자유의 연관 관계를 발견할 수 있다. 도덕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도덕법을 생각해, 의무감에 따라 행동한다는 뜻이다. 도덕법은 정언명령인 인간 자체를 목적으로 여겨 존중해야 한다는 원칙으로 이루어진다. 정언명령에 따른 행동만이 자유로운 행동이다. 가언명령에 따른 행동은 외부에 주어진 이익이나 목적을 의식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나는 진정으로 자유롭지 못하다. 내 의지는 내가 아니니 외부 힘에 의해, 내가 놓인 환경의 필요에 의해, 어쩌다 생긴 내 바람과 욕구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자율적으로 행동할 때, 내가 나에게 부여한 법칙에 따라 행동할 때만이 본성과 환경의 명령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한 법칙은 특정한 바람이나 욕구에 구애받지 않는다. 따라서 칸트가 말하는 자유와 도덕의 까다로운 개념은 서로 연결된다. 자유롭게 행동하기, 즉 자율적으로 행동하기란 도덕적으로 행동하기, 즉 정언명령에 따라 행동하기와 똑같은 하나의 개념이다. 

6강. 평등 옹호 : 존 롤스
 
존 롤스는 정의를 고민하는 올바른 방법은 원초적으로 평등한 상황에서 어떤 원칙에 동의해야 하는가를 묻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선 한 가지 생각해볼 문제가 있다. 롤스의 사고실험은 정의를 고민하는 올바른 방법일까? 실제로는 동의에 이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정의의 원칙을 끌어낸단 말인가?
 
미국인은 대부분 사회계약에 서명한 적이 없다. 사실 미국 사람 중에 헌법 준수에 동의한 사람은 귀화한 시민, 즉 시민권을 받는 조건으로 충성을 맹세한 이주민들 뿐이다. 나머지 사람은 동의하라는 요구도, 심지어 동의하느냐는 질문도 받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법을 준수해야 할까? 그리고 무슨 근거로 우리 정부가 국민의 합의를 기반으로 설립됐다고 말할 수 있는가?
미국의 정치철학자 존 롤스는 이 질문에 명쾌한 답을 내놓는다. 그는 《정의론》이라는 책에서, 정의를 고민하는 올바른 방법은 원초적으로 평등한 상황에서 어떤 원칙에 동의해야 하는가를 묻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 계약의 도덕적 한계
롤스의 가언계약에 담긴 도덕적 효력을 평가하려면, 실제 계약의 도덕적 한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두 사람의 거래에서 합의조건이 공정하리라고 생각하기 쉽다. 다시 말해, 계약은 두 사람이 정한 조건을 정당화한다고 본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적어도 계약자체만으로는 정당성을 보장하지 못한다. 실제 계약은 도덕성을 보장하는 장치가 아니다. 당신과 내가 거래를 했다고 해서 그것이 공정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실제 계약이라도 “공정한 계약인가, 두 사람이 무엇에 동의했는가?”를 항상 물어야 한다. 이 물음에 답을 하려면 계약 자체에만 초점을 맞추어서는 안 된다. 별도의 공정성 기준이 필요하다.
 
법 전문가들은 오래전부터 이 문제로 논쟁을 벌였다. 합의만으로도 의무가 생길 수 있을까, 아니면 이익이나 도움을 주고받은 연후에야 의무가 생길까? 이 논쟁은 우리가 쉽게 지나치는 계약의 도덕성 문제를 언급한다. 즉 실제 계약은 자율과 호혜라는 두 가지 이상을 실현하는 한, 도덕적 무게를 갖는다는 점이다.
현실에서 자율과 호혜라는 이상은 불완전하게 실현된다. 어떤 약속은 비록 자발적이지만 상호 이익을 실현하지 않는다. 또 어떤 때는 계약을 하지 않았더라도 호혜원칙을 근거로 내가 얻은 이익에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의무가 생길 수 있다. 여기서 합의의 도덕적 한계가 드러난다. 즉 어떤 경우엔 합의만으로는 도덕적 의무가 생기지 않고, 또 어떤 경우에는 합의가 반드시 필요치 않을 수도 있다.
 
 
- 합의만으로는 부족할 때 : 야구 카드와 물이 새는 변기
합의만으로는 부족한 두 가지 예를 살펴보자.
 
ㆍ야구 카드 : 형은 야구선수들과 카드의 가치에 대해 동생보다 많이 알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더러는 동생에게 불공정한 거래를 제안했다. 형은 유리한 카드를 동생은 잘 몰라서 그냥 교환.
 
ㆍ물이 새는 변기 : 몇 년 전에 신문에 난 사건. 홀로 사는 할머니. 어느 날 화장실 변기가 샜다. 할머니는 수리할 사람을 불렀고, 자그마치 5만 달러를 들여 고치기로 했다. 그리고 2만 5000달러를 계약금으로 지불하고 나머지는 할부로 지급하겠다는 계약서를 썼다. 할머니는 은행에 가서 2만 5000달러를 출금하려 했고, 은행원은 그렇게 큰돈을 어디에 쓰려느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배관공에게 주어야 한다고 했다. 은행원은 경찰에 연락했고, 경찰은 그 못된 수리업자를 사기죄로 체포했다.
변기 수리에 5만 달러를 약속한 계약은 두 사람이 아무리 자유롭게 동의했다 해도 터무니없이 불공정한 계약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 사건은 계약의 도덕적 한계 두 가지를 잘 보여준다. 첫째, 동의했다고 해서 그 합의가 공정하다는 보장은 없다. 둘째, 합의만으로는 도덕적 의무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이런 계약은 상호 이익은커녕 호혜라는 이상을 조롱할 뿐이다.
 
 
- 합의가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을 때 : 흄의 집과 유리닦이
18세기 스코틀랜드 도덕철학자 데이비드 흄. 흄은 젊었을 때 로크의 사회계약 사상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썼다. 그리고 몇 년 뒤, 합의는 의무의 기본이 아니라는 그의 반박이 시험대에 오르는 일이 생겼다.
흄은 에든버러에 집을 한 채 갖고 있었다. 그는 집을 친구인 제임스 보스웰에게 임대해주었고, 보스웰은 다시 다른 사람에게 임대했다. 보스웰에게 임대받은 사람은 집을 수리해야겠다고 생각했고, 흄과 상의도 없이 사람을 불러 일을 시켰다. 집을 수리한 사람은 일을 끝낸 뒤 흄에게 청구서를 보냈다. 흄은 합의한 적이 없다는 이유로 지불을 거절했다. 그는 집을 수리할 사람을 부른 적이 없었다. 사건은 법정 공방으로 이어졌다. 집을 수리한 사람은 흄이 합의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집은 수리해야 하는 상태였고, 그는 수리를 마쳤다.
 
이익을 봤다면 애초에 합의하지 않았더라도 대가를 지불할 의무가 있다는 생각은 흄의 집수리 예에서 볼 때 도덕적으로 그럴듯하다. 그러나 이 논리는 무리하게 강요하는 판매 전략이나 다른 부정적인 경우에도 쉽게 적용될 수 있다. 1980~90년대 초반, 뉴욕 시 ‘유리닦이’가 사람들을 위협했다. 이들은 유리를 닦는 고무밀대와 물이 든 양동이를 들고 다니면서, 빨간불에 멈춰 선 자동차를 덮쳐(대개는 운전자의 허락도 받지 않고) 앞 유리를 닦은 다음 돈을 요구했다. 흄의 집을 수리했던 사람이 주장한, 이익에 다른 의무론을 바탕으로 한 요구다. 그러나 합의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행위와 구걸 행위의 차이가 모호하다. 루돌프 줄리아니 당시 뉴욕시장은 이 유리닦이들을 체포하라고 경찰에 명령했다.
 
 
- 이익인가, 합의인가? 샘의 자동차 수리
 
 
- 완벽한 계약 상상하기
이런 불행한 일들은 계약의 도덕성에 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계약은 서로 다른 두 가지 이상, 즉 자율과 호혜에서 도덕적 효력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실제 계약에는 대개 그 이상이 부족하다. 내가 누군가와 거래할 때 그가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면, 내 동의는 전적으로 자발적이라기보다는 압력이나 강요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다. 내가 누군가와 협상할 때 교환 대상에 대해 상대가 더 많은 정보를 갖고 있다면, 그 거래는 서로에게 이익이 된다고 보기 어렵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내가 사기를 당하거나 속을 수도 있다.
 
실제 삶에서는 사람마다 처한 위치가 다르다. 따라서 협상력과 지식에서 늘 차이가 생기게 마련이다. 그 경우 동의했다는 사실만으로는 공정성을 보장할 수 없다. 실제 계약이 도덕성을 보장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따라서 “공정한 계약인가, 두 사람이 무엇에 동의했는가?”를 항상 물어야 옳다.
 
그러나 힘과 지식이 동등하고 처한 위치가 똑같은 사람들 사이의 계약을 상상해보자. 그리고 계약 대상이 배관이나 일반적인 거래가 아니라, 우리 삶을 지배하고 우리에게 시민의 권리와 의무를 할당하는 원칙이라고 상상해보자. 이런 조건에서 맺은 계약엔 강제나 속임수 등의 불공정한 요소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계약 조건이 무엇이든, 동의라는 미덕만으로도 그 조건은 공정할 것이다.
그런 계약을 상상할 수 있다면, 원초적으로 평등한 위치에서의 가언합의라는 롤스의 생각에 도달한 셈이다. 무지의 장막은 원초적 위치에 필요한 힘과 지식의 평등을 보장한다. 누구도 상대의 사회적 지위, 상대의 장단점, 상대의 가치와 목적을 모른다는 점을 보장함으로써, 하다못해 무의식으로라도 거래의 우위를 차지하는 사람이 없도록 한다.
 
반박2 : 노력
롤스는 타고난 재능은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는 이유로, 정의를 능력 위주로 해석하는 논리를 거부한다. 그렇다면 재능을 열심히 갈고닦은 경우는 어떠한가? 빌 게이츠, 마이클 조던. 비록 재능은 타고났지만, 그러한 노력의 대가는 받을 자격이 있지 않은가?
롤스는 노력도 혜택받은 가정환경의 산물일 수 있다고 대답한다. “노력하고 도전해서 소위 자격을 갖춘 사람이 되려는 의지조차도 행복한 가정과 사회적 환경의 영향이다.” 성공의 다른 요소들처럼 노력 역시 스스로에게 공을 돌릴 수 없는 우연의 영향을 받는다. “분명 노력하려는 의지도 타고난 능력과 기술 그리고 선택 가능한 대안들에 영향을 받는 듯하다.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 타고난 조건이 좋은 사람이 성실하게 노력할 가능성도 높고…”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은 노력에 관한 롤스의 주장에 맞닥뜨렸을 때, 상당수가 크게 반발한다. 학생들은 하버드 대학 입학을 비롯해 자신이 성취한 일은 열심히 노력한 결과이지,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도덕적으로 임의의 요소들 덕분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노력해서 얻은 대가마저도 도덕적 자격을 주장할 수 없다고 말하는 정의론을 많은 사람이 미심쩍은 눈길로 바라본다.
노력에 관한 롤스의 조장을 다함께 토의한 뒤에 나는 비과학적인 설문조사를 실시한다.
사람은 노력하고 열심히 일한 대가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 주장에 의문을 제기할 이유는 더 있다.
체격 좋고 힘 센 사람, 작고 허약한 사람. 벽돌 나르기.
마이클 조던을 보자. 맞다. 그는 열심히 연습했다. 하지만 그보다 못한 선수 중에는 그보다 더 열심히 연습하는 선수들도 있다. 그렇다고 연습 시간을 고려해, 그들이 조던보다 더 높은 연봉으로 계약할 자격이 있다고 말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능력 위주 사회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아무리 노력을 떠들어도, 그들이 진정으로 보상받을 가치가 있다고 믿는 것은 기여한 내용이나 업적이다. 노동윤리를 갖는 게 노력의 결과든 아니든, 우리가 기여한 것들은 어느 정도는 공을 내세울 수 없는 타고난 재능에서 나온다.
 
 
- 도덕적 자격 거부하기
재능의 도덕적 임의성에 관한 롤스의 주장이 맞다면, 그 주장은 놀라운 결론에 이른다. 분배 정의는 도덕적 자격을 포상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롤스는 이 결론이 정의에 대한 일반의 상식과는 거리가 있음을 인정한다. “소득과 부, 그리고 삶에서 일반적으로 좋은 것들은 도덕적 자격에 다라 분배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상식으로 통하는 경향이 있다. 이 경우 정의는 미덕을 기준으로 하는 행운이다. 이제 공정성을 기준으로 하는 정의는 이러한 생각을 거부한다.”
 
롤스는 성공에 이르는 사회적, 경제적 장벽만 제거된다면 누구나 재능이 선사하는 포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능력 위주 사회의 기본 전제에 의문을 제기하며 그것을 비판한다.
우리는 사회에서 맨 처음 주어진 출발선은 당연히 내 몫이라고 말할 자격이 없듯이, 내게 분배된 타고난 재능도 당연히 내 몫이라고 말할 자격이 없다. 능력을 갈고닦게 만드는 내 우월한 성격은 당연히 내 몫이라는 생각 역시 문제가 있다. 그러한 성격 형성에는 어렸을 때 좋은 가정과 사회 환경이 크게 영향을 미치고, 그러한 영향은 우리 노력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격이라는 개념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
 
분배 정의가 도덕적 자격을 포상하는 것이 아니라면, 열심히 일하고 규칙을 따르는 사람도 노력한 대가를 요구할 수 없다는 뜻일까? 꼭 그렇지는 않다. 롤스는 도덕적 자격과 자신이 “합법적 기대를 요구할 권리”라 부른 것의 중요하고도 미묘한 차이를 지적한다. 그 차이는 이렇다. 자격과 달리, 합법적 권리는 특정한 게임 규칙이 정해졌을 때 생긴다. 하지만 애초에 게임 규칙을 어떻게 정하는지는 말해주지 못한다.
도덕적 자격과 합법적 권리의 충돌은 정의를 둘러싼 뜨거운 논란을 분명히 보여준다. 어떤 사람은 부자의 세율을 높이는 것은 그들이 도덕적으로 소유할 자격이 있는 것을 빼앗는 행위라고 말한다. 또 대학 입학 심사에서 인종적ㆍ민족적 다양성을 고려한다면, 학업적성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지원자들이 도덕적으로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을 못 받는다고 말한다. 또 누군가는 그러한 이점을 누릴 도덕적 자격을 갖춘 사람은 없다며, 그 전에 어떤 게임 규칙을 적용할지부터(세율이나 입학 기준 등) 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누가 무엇을 얻을 권리가 있는지 말할 수 있다.
 
확률에 좌우되는 게임과 실력에 좌우되는 게임의 차이를 생각해보자. 내가 만약 복권을 사서 당첨되면 돈을 받을 권리가 있다. 하지만 내게 당첨금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복권은 확률 게임이기 때문이다. 당첨이 되고 안 되고는 내 미덕이나 실력에 달려 있지 않다.
이번에는 보스턴 레드삭스가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했다고 상상해보자. 이로써 이들은 트로피를 받을 권리를 얻는다. 그러나 이들에게 승리할 자격이 있는가에는 의구심을 품을 수 있다. 그 답은 이들이 어떻게 경기를 치렀는가에 달렸다. 이들이 우승한 원인이 요행인가, 아니면 월등한 경기력인가?
실력 게임에서는 확률 게임과 달리, 승자가 될 권리가 있는 사람과 이길 자격이 있는 사람이 서로 다를 수 있는 이는 특정한 미덕을 실천하고 선보이는 행위를 포상하기 때문이다.
 
롤스는 분배 정의가 미덕이나 도덕적 자격을 포상하는 게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보다는 게임의 규칙이 정해졌을 때 생기는 합법적 기대를 충족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일단 정의의 원칙이 사회 협력의 조건을 정하면, 사람들은 그 규칙에 따라 자기가 벌어들인 이익을 가질 권리가 생긴다. 그러나 조세제도에 따라 수입의 일부를 내놓아 어려운 사람을 돕는 데 써야 한다면, 자신이 도덕적으로 마땅히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을 빼앗긴다고 불평할 수 없다.
 
그런 다음, 공정한 체제는 사람들이 무엇을 요구할 권리가 있는가에 대답한다. 그리고 사람들의 합법적 기대를 사회제도에 기초한 것으로 보고, 그것을 충족시킨다. 그러나 합법적 권리는 사람들의 진정한 가치에 비례하지 않을뿐더러 그와 무관하다. 사회의 기본 구조를 규제하는 정의의 원칙은 도덕적 자격을 언급하지 않으며, 분배되는 몫도 그러한 자격에 좌우되는 경향을 보이지 않는다.
 
롤스가 도덕적 자격을 분배 정의의 기초로 인정하지 않는 근거는 두 가지다.
① 내가 경쟁에서 승리할 확률이 높은 재능을 가졌다 해도, 그 재능이 전적으로 노력의 결과는 아니다.
② 특정한 시기에 사회가 가치를 두는 자질 역시 도덕적으로 임의성을 띤다. 나는 의문의 여지없이 나만의 재능을 가졌다고 외친들, 내 재능으로 얻는 포상 역시 수요와 공급이라는 우연에 좌우될 것이다. 중세 토스카나에서는 프레스코 벽화를 그리는 화가들이 우대받았다. 21세기 캘리포니아에서는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그렇다. 내 기술이 결실을 많이 맺고 적게 맺고는 사회가 무엇을 원하느냐에 달렸다. 어떤 자질이 사회에 기여하느냐는 그때그때 사회가 어떤 자질을 높게 평가하느냐에 달렸다.
 
성공한 사람은 성공에서 이러한 우연이 차지하는 부분을 쉽게 지나친다. 우리 중 상당수는 사회가 높이 평가하는 자질을 어느 정도는 타고나는 행운을 누린다. 그렇다 보니, 이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가 정신을 발휘한다. 관료사회에서는 상사와 무난히 잘 어울린다. 대중 민주주의사회에서는 화면을 잘 받으려 노력하고, 짧고 내용 없는 말을 잘 지어낸다. 소송하기 좋아하는 사회에서는 법학전문대학원에 다니거나, 법학전문대학원 입학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능력을 키운다.
 
우리 사회가 그런 것들에 가치를 두는 현상은 노력의 결과가 아니다. 그런 재능을 지닌 사람이 지금처럼 기술이 발달했거나 소송을 무척 좋아하는 사회가 아니라 수렵사회나 무사가 우대받는 사회, 아니면 육체적 힘이나 종교적 경건함을 드러내는 사람에게 가장 큰 포상이나 명성을 안겨주는 사회에 산다고 생각해보라. 그의 재능은 분명 지금 수준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다른 재능을 개발했을 게 틀림없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가치나 미덕은 지금보다 적은 것일까?
 
롤스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아마 지금보다는 포상을 적게 받을 것이다. 하지만 포상받을 권리가 적을지언정 다른 사람보다 가치가 적다거나 자격이 모자란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사회에서 인정을 덜 받고, 사회가 포상하는 재능을 덜 가진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게임의 규칙이 재능에 포상하고 우리는 그 이익을 챙길 권리가 있을지언정, 우리가 가진 풍부한 자질을 높이 평가해주는 사회에 살 특별한 자격이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해이자 자만이다.
 
 
- 삶은 불공평한가?
삶은 공평하지 않다. 자연이 낳은 것을 정부가 수정할 수 있다고 믿고 싶은 유혹도 생긴다. 그러나 우리가 한탄하는 적잖은 불공평에서 얼마나 많은 이익을 잊고 있는지 깨다는 것 또한 중요하다. 무하마드 알리가 위대한 권투선수가 될 수 있는 기술을 타고났다는 사실은 결코 공평치 못하며, 무하마드 알리가 하룻밤에 수백만 달러를 벌어들이는 능력을 가졌다는 사실도 분명 공평치 못하다. 그러나 평등이라는 추상적 이상을 추구하느라, 알리가 하룻밤 경기에서 벌 수 있는 돈이 최하층 사람이 부두에서 하루 동안의 비숙련 노동으로 벌 수 있는 돈보다 많아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알리를 보며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불공평한 일이 아니겠는가?
 
롤스는 《정의론》에서, 프리드먼의 견해에 반영된 자기 위안 식 조언을 거부한다. 그는 격앙된 어조로, 우리가 잊기 쉬운 익숙한 진실을 이야기한다. 즉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은 마땅히 존재해야 하는 방식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재능이 분배되는 방식과 사회 환경의 우연성이 부당하다는 이유로 제도를 강제하는 것은 언제나 문제가 있게 마련이며, 그러한 부당함은 인간의 합의에도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거부해야 한다. 더러 부당함을 간과하는 구실로도 이용되는 그 주장은 부당함을 묵인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태도와 똑같이 취급한다. 자연의 분배 방식은 공정하지도, 불공정하지도 않다. 인간이 태어나면서 특정한 사회적 위치에 놓이는 것 역시 부당하지 않다. 그것은 단지 타고나는 요소일 뿐이다. 공정이나 불공정은 제도가 그러한 요소들을 다루는 방식에서 생겨난다.
 
롤스는 우리가 그러한 요소를 다룰 때, “서로의 운명을 공유하고” “우연히 주어진 선천적이거나 사회적인 환경을 (자신을 위해) 이용하려면 그 행위가 반드시 공동의 이익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데 동의하자고 제안한다. 롤스의 정의론이 궁극적으로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 이론은 미국 정치철학이 아직 내놓지 못한, 좀더 평등한 사회를 옹호하는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임에 분명하다. 

7강. 소수집단우대정책 논쟁
 
 
취업과 대학 입학에서 인종과 민족을 고려하는 행위는 부당한가? 인종별 우대정책은 권리를 침해하는가? 대학이 경매로 입학생을 뽑아도 되는가? 소수집단우대정책 지지자들이 인종과 민족을 고려하는 이유로 제시하는 표준화된 시험의 불균형 바로잡기, 과거의 잘못 보상하기, 다양성 증대는 어떻게 볼 것인가?
  
셰릴 홉우드. 백인 여성, 중산층 집안.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면서 혼자 힘으로 고등학교, 지역 전문대학, 그리고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를 다녔다. 그 뒤 텍사스로 이사해, 텍사스 법학전문대학원에 입학원서를 냈다. 그러나 학업 평균 성적이 3.8점이고 입학시험도 그런대로 잘 보았는데(83점) 떨어졌다.
백인 여성인 홉우드는 입학을 거절당한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합격생 중에는 홉우드보다 대학 성적은 물론이고 입학시험 점수도 낮은 흑인과 멕시코계 미국인들도 있었다. 학교는 사회적 소수자에게 가산점을 주는 소수집단우대정책을 시행하고 있었다. 사실 대학 성적과 입학시험 점수가 홉우드와 비슷한 소수집단 학생들은 전원 합격했다.
홉우드는 연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면서, 자신은 차별에 희생되었다고 주장했다. 대학은 법률사무소뿐만 아니라 입법부와 법정을 포함해 텍사스 법조계에 인종적, 민족적 다양성을 높이는 것이 텍사스 법학전문대학원의 사명 중 하나라고 답했다. 학교는 이를 달성하기 위해 소수집단 지원자에게는 비소수집단 지원자보다 낮은 입학 기준을 정해두었다. 대학 당국자는 그러한 기준에도 불구하고 입학한 소수집단 학생들 모두 학업을 수행할 자질이 있으며, 거의 모두 무사히 졸업하여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 사실이 홉우드에게는 위안이 되지 못했고, 홉우드는 여전히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으며 입학을 허락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취업과 대학 입학에서 인종과 민족을 고려하는 행위는 부당한가?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 소수집단우대정책 지지자들이 인종과 민족을 고려하는 이유로 제시하는 세 가지 항목인 표준화된 시험의 불균형 바로잡기, 과거의 잘못 보상하기, 다양성 증대를 살펴보자.
 
 
- 시험 격차 바로잡기
표준화된 시험으로 학업 성취 가능성을 예측하려면 시험 점수를 해석할 때 학생의 가정, 사회, 문화, 교육 배경을 고려해야 한다. 사우스브롱크스에 있는 열악한 공립학교에 다닌 학생이 학업적성시험에서 700점을 받았다면, 맨해튼에서도 부유한 지역인 어퍼이스트사이드에서 일류 사립학교를 졸업한 학생이 700점을 받은 것보다 더 잘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학생의 인종, 민족, 경제 배경을 고려해 시험 점수를 평가한다고 해서, 대학은 학업 성취가능성을 보고 학생을 뽑아야 한다는 생각에 위배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학생의 배경을 고려하는 것은 학업 성취 가능성을 가장 정확히 측정하려는 시도다.
그러나 소수집단우대정책과 관련한 진짜 논쟁은 나머지 두 가지 이유인 보상 논리와 다양성 논리에서 일어난다.
 
 
- 과거의 잘못 보상하기
보상 논리는 소수집단우대정책을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는 행위로 본다. 소수집단 학생들을 불리한 처지에 몰아넣은 역사적 차별을 보상하는 차원에서 우대해야 한다는 논리다. 이에 따라, 입학 허가를 가장 우선하는 혜택으로 보고, 그 혜택을 나누어 줌으로써 과거의 부당함과 지금도 이어지는 결과를 보상하려 한다.
 
그러나 이 보상 논리는 만만찮은 도전에 직면한다. 비판자들은 보상받는 사람이 애초의 피해자가 아닐 수 있으며, 보상하는 사람에게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을 책임이 없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다. 소수집단우대정책의 수혜자 가운데 상당수가 중산층 소수집단 학생들로, 이들은 도심 빈민가의 흑인과 히스패틱 젊은이들이 겪는 고통을 경험하지 않았다. 풍요로운 휴스턴 교외에 사는 흑인 학생이 그들보다 형편이 더 어려운 셰릴 홉우드보다 더 큰 혜택을 누려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소수집단우대정책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정책의 요지가 불리한 처지에 놓은 사람을 돕는 것이라면, 인종이 아니라 계층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인종별 우대정책이 목적이 노예제와 인종차별정책이라는 역사적 부당함을 보상하려는 것이라면, 그 부당 행위에 가담하지도 않는 홉우드 같은 사람에게서 보상을 끌어내는 것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는가?
 
소수집단우대정책을 지지하는 보상 논리가 이 반박에 답할 수 있을까? 이는 집단적 책임이라는 어려운 문제에 달렸다. 우리는 과거 세대가 저지른 잘못을 보상할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도덕적 의무가 어떻게 생기는지부터 자세히 알아봐야 한다. 우리는 개인의 의무만 다하면 되는가, 아니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과거 역사에도 책임을 느껴야 하는가? 이 문제는 뒤에서 다룰 예정이니 일단 접어두고, 우선 다양성 논리를 살펴보자.
 
 
- 다양성 증대
소수집단우대정책을 지지하는 다양성 논리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집단적 책임이라는 개념과는 무관하다. 입학에서 혜택을 받은 소수집단 학생이 개인적으로 차별이나 불이익을 당한 적이 있는지를 증명하는 문제와도 무관하다. 다양성 논리를 내세우는 이들은 입학 허가를 수혜자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목적을 실현하는 수단으로 본다.
 
다양성 논리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두 가지 반박을 내놓는다. 하나는 현실적 반박이고, 또 하나는 원칙적 반박이다. 현실적 반박은 소수집단우대정책의 효과에 의문을 품는다. 인종별 우대정책은 다원화 사회를 활성화하거나 편견과 불평등을 줄이기보다는 소수집단 학생들의 자부심을 훼손하고, 모든 집단이 인종을 더욱 의식하게 만들며, 인종간의 긴장을 높이고, 자신도 행운을 누려야 할 사람이라고 느끼는 백인들의 분노를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실적 반박은 소수집단우대정책이 부당하다는 게 아니라, 그 정책이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고 득보다는 해가 많으리라는 주장이다.
 
 
- 인종별 우대정책은 권리를 침해하는가?
원칙적 반박은 다양성이 존재하는 강의실과 더욱 평등한 사회를 추구한다는 목적이 얼마나 가치 있든 간에, 소수집단우대정책이 그것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실현하든 간에, 입학에서 인종이나 민족을 따지는 것은 부당하다는 주장이다. 그러한 정책은 자기 잘못도 없이 경쟁에서 불이익을 받아야 하는 셰릴 홉우드 같은 지원자의 권리를 침해하기 때문이다.
 
권리를 중시하는 법철학자 로널드 드워킨은 이 반박을 설명하면서, 소수집단우대정책에서 인종을 고려하는 것은 그 누구의 권리도 침해하지 않는다. 그는 묻는다. 홉우드의 어떤 권리가 부정되었는가? 홉우드는 누구에게나 자기 통제력을 벗어난 인종 등의 요소로 판단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대학 입학 심사에서 고려하는 전통적인 기준에는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요소도 엄연히 포함된다. 아이다호가 아닌 매사추세츠 출신이라거나, 형편없는 축구 선수라거나, 노래를 부를 때마다 음정은 따로 논다거나 하는 것들은 내 잘못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학업 적성시험을 잘 볼 적성이 부족한 것도 내 탓이 아니다.
 
입학과 관련한 권리를 오로지 학문적 기준으로 한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훌륭한 축구선수라거나, 아이다호 출신이라거나, 무료 급식소에서 자원봉사를 했다는 것들은 고려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 기준으로 볼 때, 학업 성적, 시험 점수, 기타 학업 성취 가능성을 보여주는 수치에서 상위권에 속한다면 입학을 허가받을 자격이 있다. 다시 말해, 학문적 능력만 본다면 자격을 갖추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드워킨이 지적하듯이, 그런 권리란 없다. 오로지 학문적 자질만을 고려해 입학생을 뽑는 대학도 있겠지만, 다수의 대학은 그렇지 않다. 대학은 다양한 방법으로 본연의 사명을 정한다. 드워킨의 주장에 따르면, 그 어떤 지원자도 대학에 이래라저래라 하면서, 대학의 사명은 무엇이어야 하고, 학문이든 운동이든 특정 실력을 기준으로 입학 기준을 정하면, 내가 다른 사람보다 그 기준에 더 부합한지 판단한 뒤에 그에 걸맞는 합법적인 기대를 품게 된다. 그리고 학문적 가능성, 민족적ㆍ지역적 다양성, 운동 능력, 과외활동, 지역 봉사활동 등을 고려해 지원자 가운데 상위권에 드는 사람은 입학할 권리가 인정되며, 만약 이들이 제외된다면 그건 부당하다. 그러나 애초에 어떤 기준으로도 인정받을 권리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바로 여기에 소수집단우대정책을 지지하는 다양성 논리와 관련해 심오하면서도 논란의 여지가 있는 핵심 주장이 담겼다. 입학 허가는 뛰어난 능력이나 미덕을 포상하는 영광스러운 절차가 아니라는 것이다. 시험 점수가 높은 학생도, 불리한 처지에 놓은 소수집단 학생도 입학을 허가받을 도덕적 자격은 없다. 입학 허가가 정당한 경우는 학생의 능력이나 미덕을 포상할 때가 아니라 대학이 정한 사회적 목적에 부합할 때뿐이다. 학교의 사명이 관련 능력을 정하지, 학생의 능력이 학교의 사명을 정하지 않는다. 대학 입학의 정의에 관한 드워킨의 설명은 소득 분배의 정의에 관한 롤스의 설명과 같은 맥락이다. 즉 그것은 도덕적 자격의 문제가 아니다.
 
 
- 인종분리정책과 반유대적 할당제
그렇다면 대학은 내키는 대로 사명을 정할 수 있으며, 그 사명에 걸맞은 입학 정책은 모두 공정하다는 뜻일까? 그렇다면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도 미국 남부의 대학에서 시행하던 인종분리정책은 어떠한가?
 
소수집단우대정책을 옹호하는 사람이 다양성 논리를 내세웠듯이, 대학이 스스로 정한 사명에 맞춰 입학 기준을 정하면서 특정 인종을 배제하거나 제한을 두는 식으로 인종차별 조치를 취할 경우 이를 비난할 수 있을까? 남부 분리주의자들이 특정 인종을 배제하던 행위와 오늘날 소수집단우대정책에서 특정 인종을 포함하는 행위 사이에 원칙적 차이가 있을까? 이 물음에 가장 분명한 답은, 분리주의자들의 시대에는 텍사스 법학전문대학원이 특정 인종을 열등의 상징으로 이용한 반면, 오늘날의 인종 우대는 누구를 모욕하거나 부정적으로 낙인찍지 않는다는 점이다. 홉우드는 자신의 탈락을 부당하다고 여길지언정, 그것이 증오나 경멸을 표한다고 볼 수는 없다.
 
드워킨의 답은 이렇다. 분리주의 시대에 특정 인종을 배제한 행위는 “어떤 인종이 다른 인종에 비해 유전적으로 더 가치 있다는 경멸스러운 사고방식”에 기초한 반면, 소수집단우대정책에는 그러한 편견이 없다. 소수집단우대정책이 주장하는 내용은 단지, 중요한 전문직에서 다양성 증대가 중요해지다 보니, 흑인이나 히스패닉이라는 사실은 “사회적으로 유용한 특성”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홉우드처럼 입학은 거절당한 지원자로서는 달갑지 않겠지만, 거기에는 분명 도덕적 요소가 담겼다. 텍사스 법학전문대학원은 홉우드가 열등하다거나 대신 입학한 소수집단 학생들이 홉우드에 비해 우대받을 당연한 자격이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단지 강의실과 법조계에서 인종적, 민족적 다양성을 확보하는 것이 학교의 교육 목적에 들어맞을 뿐이다. 더불어 그러한 목적 추구가 입학에서 제외된 사람들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 실망한 지원자들은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법적으로 항의할 수 없다.
 
 
- 백인 우대 정책?
여기 다양성 논리를 시험할 질문이 있다. 때로는 백인을 우대하는 것도 정당화될 수 있을까? 스타렛 시티(Starrett City) 사례를 생각해보자. 이곳은 2만 명이 입주한 뉴욕 브루클린의 아파트 단지로, 연방정부가 보조하는 최대 규모의 중류층 주택단지 조성 계획에 따라 설립되었다. 1970년대 중반에 문을 연 이 단지는 인종 통합 공동체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이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공동체의 민족적ㆍ인종적 구성 비율을 조절하는 ‘입주자 조절 정책’을 실시하면서, 흑인과 히스패닉을 전체 입주자의 40%로 제한했다. 한마디로 항당제다. 이 비율의 근거는 편견이나 경멸이 아니라. 도시 생활의 경험에서 나온 인종적 ‘한계점’이론이다. 이곳 관리자들은 타 지역에서 ‘백인 이탈 현상’이 일어나고 주민 통합이 깨지는 한계점을 피하고나 했다. 그러면서 인종적, 민족적 균형을 유지해 안정되고 인종적으로 다양한 공동체를 만들고자 했다.
 
이 방법은 효과가 있었다. 이곳은 대단히 살기 좋은 공동체가 되었고, 많은 가족이 여기 들어와 살고 싶어 했다. 스타렛 시티는 대기자 명단을 작성했다. 백인보다 흑인에게 돌아가는 할당량이 적은 탓에, 흑인 가족은 백인 가족보다 더 오래 기다려야 했다. 1980년대 중반을 기준으로, 백인 가족은 서너 달을, 흑인 가족은 최장 2년을 기다려야 했다.
자, 여기, 백인 신청자에게 혜택을 주는 할당제가 있다. 인종적 편견이 아닌, 공동체 통합이라는 목표에 근거한 할당제다. 일부 흑인 신청자들은 인종에 근거한 이 정책이 부당하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스타렛 시티가 현재의 할당제를 유지하되, 국가는 소수집단을 위한 주택 조성 계획을 더 추진하라고 판결했다.
 
스타렛 시티가 인종을 기반으로 실시한 아파트 할당제는 부당할까? 그렇지 않다. 소수집단우대정책을 지지하는 다양성 논리를 인정한다면, 부당하지 않다. 인종적, 민족적 다양성은 주택 정책과 대학 강의실에서 각각 다르게 적용되며, 이때 문제가 되는 요소도 다르다. 그러나 공정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두 경우는 같은 부류다. 다양성이 공동선에 봉사한다면, 그리고 누구도 증오나 경멸로 차별받지 않는다면, 인종별 우대는 어떤 사람의 권리도 침해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도덕적 자격이라는 롤스의 견해에 따르면, 독립적으로 규정되는 능력을 기준으로 아파트나 신입생 강의실 자리를 차지할 당연한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기 때문이다. 어떤 능력이 인정받는가는 주택 당국이나 대학 당국이 사명을 결정한 뒤에야 정해질 수 있다.
 
 
- 정의는 도덕적 자격에서 분리될 수 있는가?
도덕적 자격을 분배 정의의 기초로 삼지 않는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솔깃하고 또 한편으로는 불안하다. 솔깃한 이유는 성공은 미덕에 씌워주는 왕관이라거나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보다 부자가 될 자격이 있다는, 능력 위주 사회에서 흔히 나타나는 그 잘난 사고방식을 허물기 때문이다. 롤스가 우리에게 일깨워준 대로 “뛰어난 재능을 타고 날 자격이 있다거나 애초부터 사회에서 유리한 출발선에 설 자격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의 장점을 높게 쳐주는 사회에 살게 된 것도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그저 행운일 따름이다.
 
정의를 도덕적 자격에서 분리할 때의 불안감은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일자리와 기회는 그것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돌아가는 보상이라는 믿음은 특히 미국 사회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 정치인들은 “열심히 일하고 규칙을 따르는 사람”은 앞서 갈 자격이 있다고 끊임없이 외치고, 아메리칸드림을 실현하는 사람들에게 성공은 미덕을 반영한다고 격려한다. 이러한 확신은 좋게 말해, 장단점이 있다. 이 확신에 집착하면 사회 결속에 걸림돌이 된다. 성공을 우리 노력의 결과로 여길수록, 뒤처진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은 줄어들기 때문이다.
 
성공을 미덕에 대한 포상으로 보아야 한다는 이 끈질긴 믿음은 단순한 오해이며, 버려야 할 그릇된 통념이다. 행운의 도덕적 임의성에 관한 롤스와 드워킨처럼, 자격 논쟁에서 정의 논의를 무 자르듯 완전히 잘라내기란 정치적ㆍ철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왜 그런지 보자.
우선, 정의는 흔히 영광과 관계된다. 분배 정의에 관한 논쟁은 누가 무엇을 갖는가의 문제만이 아니라 영광과 포상을 얻는 데 어떤 자질이 필요한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둘째, 사회조직이 자체적으로 사명을 결정한 뒤에야 비로소 무엇이 능력으로 인정받는지 정해진다면 문제가 복잡해질 수 있다. 정의에 관한 논쟁에서 흔히 거론되는 각종 학교, 대학, 그리고 전문직, 공직 관련 조직은 사명을 멋대로 정할 수 없다. 그 사명은 적어도 얼마간은 조직이 내세우는 차별적 선으로 규정된다. 법학전문대학원, 군대, 오케스트라가 어떤 사명을 일관되게 수행해야 하는가에는 이론의 여지가 있지만, 사명이 무엇이든 상관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어느 사회조직이건 적합한 선이 있으며, 조직의 역할을 할당할 때 이러한 선을 무시한다면 자칫 타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
 
 
- 대학이 경매로 입학생을 뽑아도 될까?
홉우드 사건은 정의와 영광이 어떻게 얽히는가를 보여준다. 도덕적 자격은 누가 입학 허가를 받아야 하는가와 관련이 없다는 드워킨의 주장이 옳다고 해보자.
이 문제는 대학이 마음대로 사명을 정해도 좋은가를 묻는 두 번째 질문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인종ㆍ민족 우대는 잠시 접어두구, 소수 집단우대정책을 둘러싼 또다른 논쟁인 ‘유산 우대’ 논쟁을 생각해보자. 기여 입학생. 많은 대학이 학업 성적과 시험 점수가 낮아도 이러한 학생들을 받아들인다. 이를 극단적인 상황으로 확대해, 대학이 입학 정원의 10퍼센트를 경매에 부쳐 높은 가격을 부른 입찰자에게 입학을 허가한다고 상상해보자.
이 제도는 공정할까?
 
그러나 이 기준은 너무 허술하다. 돈 많은 부모는 자녀에게 아이비리그 입장권을 사줄 수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불공평해 보인다. 그렇다면 어떤 점이 부당할까?
경매와 관련해 눈살이 찌푸려진 이유는 지원자의 기회보다 대학의 청렴성과 관련이 깊다. 더 높은 값을 부른 입찰자에게 자리를 파는 행위는 교육 기관보다는 록 콘서트나 스포츠 행사에 더 어울린다. 좋은 것에 접근할 기회를 분배하는 방식은 그것의 본질 및 목적과 관련된다.
그렇다면 대학의 목적은 무엇인가? 하버드는 월마트도, 백화점도 아니다. 대학의 목적은 수입을 극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과 연구로 공동선에 기여하는 것이다. 대학에 들어갈 기회를 할당할 때의 정의는 대학이 마땅히 추구해야 하는 선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은 대학 입학은 돈 받고 파는 행위가 왜 부당한가를 설명해준다.
 
정의에 관한 논쟁을 영광, 미덕, 선의 의미에 관한 논의에 묶어두는 것은 대책 없는 의견 차이를 봉합하는 비결처럼 보일 수도 있다. 사람들은 영광과 미덕을 저마다 달리 생각한다. 대학이든, 기업이든, 군대든, 전문 직업 세계든, 아니면 광범위한 정치 공동체든, 각 사회조직의 적절한 사명은 논란의 여지가 많은 까다로운 문제다. 그러다보니 이러한 논란과 거리를 둘 수 있는 정의와 권리의 기본을 찾고 싶은 유혹이 생기게 마련이다.
이것은 근현대의 정치철학이 풀고자 하는 숙제이다. 이제까지 살펴보았듯이, 칸트와 롤스의 철학은 좋은 삶에 관한 서로 다른 시각들 사이에서 중립을 지킬 수 있는 정의와 권리의 기본을 찾으려는 과감한 시도였다. 그렇다면 이 시도가 성공했는지 확인해보자. 

8강. 누가 어떤 자격을 가졌는가? :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의란 사람들에게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인가? 능력과 자격의 근거는 무엇인가? 이는 분배와 미덕이 정의와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묻는 것이다. 이를테면 플루트를 분배한다고 해보자. 누가 최고의 플루트를 가져야 하는가?
 
웨스트 텍사스 앤드루스 고등학교에 다니는 1학년 캘리 스마트는 인기 있는 응원단원이다. 뇌성마비를 앓아서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했지만, 응원단원으로서 캘리의 열정은 꺾이지 않았다. 캘리는 2군 경기 때 사이드라인 쪽에서 미식축구 선수들과 관중을 열광케 했다. 하지만 시즌이 끝나면서 응원단에서 방출되는 신세가 되었다.
 
일부 응원단원과 학부모들의 촉구로, 학교 관계자는 캘리에게 이듬해 응원을 준비하면서 다른 단원들처럼 다리 일자로 뻗기와 공중회전을 비롯해 엄격한 체조 훈련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응원단장의 아버지는 캘리의 응원단 활동에 반대하는 의견을 이끌었다. 캘리의 안전이 우려된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캘리의 어머니는 캘리가 박수갈채를 받는 데 분노해서 반대한다고 생각했다.
캘리 이야기는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하나는 공정성 질문이다. 캘리가 응원단원으로서 자격을 갖추려면 반드시 체조를 해야 하는가? 아니면 캘리의 장애를 생각할 때, 그것은 부당한 요구인가?
두 번째 질문은 분노에 관한 것이다. 왜 응원단장의 아버지는 분노했을까? 내 예감은 이렇다. 그의 분노는 캘리가 자격도 없으면서 영광을 누린다는 생각에서 나왔을지 모른다. 딸의 뛰어난 능력을 보며 느끼는 자부심을 캘리가 조롱한다는 생각이다.
 
이 일화가 보여주듯이, 응원 같은 사회적 행위는 도구적 목적(팀 응원)만이 아니라 영광과 모범을 제시하는 목적(특정한 우수성과 미덕은 축하하기)도 수행한다. 고등학교는 응원단원을 뽑을 때, 애교심을 높일 뿐 아니라 학생들이 존경하고 따르고 싶어 하는 자질을 살펴본다. 이 일과 관련해 격렬한 논란이 일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응원단에 속한 학생들(그리고 그 부모들)이 캘리의 적격 여부 논란에서 위기감을 느낀 까닭 역시 그와 관련된다. 부모들은 딸들이 갖춘, 응원단원의 전통적 미덕이 존중받기를 원한 것이다.
 
 
- 정의, 텔로스, 영광
 
이런 점에서 볼 때, 웨스트 텍사스의 응원단 관련 소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을 이해하는 지름길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정치철학의 핵심은 두 가지인데, 캘리 논란에서 이 두 가지가 그대로 드러난다.
① 정의는 목적론에 근거한다. 권리를 정의하려면 문제가 되는 사회적 행위의 ‘텔로스(목적,목표,본질)’를 이해해야 한다.
② 정의는 영광을 안겨주는 것이다. 어떤 행위의 텔로스를 이성적으로 판단하거나 논한다는 것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그 행위가 어떤 미덕에 영광과 포상을 안겨줄 것인가를 추론하거나 논의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과 정치학을 이해하는 관건은 그 둘의 무게와 상호관계를 파악하는 것이다.
근현대의 정의론은 영광, 미덕, 도덕적 가치 문제에서 공정성과 권리를 분리하고자 한다. 여러 목적에 중립적인 정의의 원칙을 찾아내, 사람들이 자신의 목적을 직접 선택하고 추구하게 하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가 중립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의에 관한 논쟁은 영광, 미덕, 그리고 좋은 삶의 본질에 관한 논쟁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왜 정의와 좋은 삶이 서로 연관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지 이해한다면, 그것을 분리하는 것은 무엇과 관련된 문제인지 이해하기가 수월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의란 사람들에게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인가? 능력이나 자격의 근거는 무엇인가? 이는 분배되는 것이 무엇인가에 달렸다. 정의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대상과 그것이 할당될 사람”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우리는 “평등한 사람들에게는 평등한 대상들이 할당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때 어려운 질문이 생긴다. 어떤 점에서 평등인가? 답은 우리가 무엇을 분배하는가, 그리고 그와 관련한 미덕은 무엇인가에 달렸다. 이를테면 플루트를 분배한다고 해보자. 누가 최고의 플루트를 가져야 하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대답한다. 최고의 플루트 연주자가 가져야 한다고.
정의는 능력에 따라. 우수성에 따라 차별적으로 적용된다. 플루트 연주의 경우 능력이란 플루트 연주 실력이다. 만약 정의가 부, 타고난 신분, 외적 아름다움, 우연(제비뽑기) 같은 기준에 따라 차별 적용 된다면 부당한 일이다.
 
플루트의 목적은 뛰어난 음악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따라서 이 목적을 가장 훌륭히 실현할 수 있는 사람이 최고의 플루트를 가져야 한다.
자, 이제, 최고의 악기를 최고의 음악가에게 주었으니, 최고의 음악을 빚어내는 긍정적 효과도 나타날 테고, 모두가 즐거워함으로써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도 실현될 것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이유는 이러한 공리주의적 사고방식을 뛰어넘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재화의 목적에서 그 재화의 적절한 분배에 이르기까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추론 방식은 목적론적 추론의 예를 보여준다. 그는 재화를 공정하게 분배하려면 해당 재화의 텔로스, 즉 목적을 물어야 한다고 말한다.
 
 
- 목적론적 사고 : 테니스 코트와 《곰돌이 푸》
목적론적 추론은 정의를 고민하는 방식 치고는 낯설지만, 분명 일리가 있다. 이를테면 대학 내 최고의 테니스 코트 사용권을 어떻게 할당할지 결정해야 한다고 가정해보자. 사용료를 비싸게 매겨놓고, 돈을 많이 내는 사람에게 우선권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대학 총장이나 노벨상을 수상한 과학자처럼 거물급 교수에게 우선권을 줄 수도 있다. 그런데 유명한 과학자 두 사람이 그물을 겨우 넘길 정도의 형편없는 게임을 하고 있다고 해보자. 이때 대학 테니스부원이 오더니 코트를 사용하겠다고 한다. 그렇다면 과학자 두 사람을 질이 조금 떨어지는 코트로 옮기도록 하고, 2류 선수가 쓰기에는 아까운 그 좋은 코트를 테니스부원이 사용하도록 해야 하는가?
 
이번에는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이 경매에 나왔다고 생각해보자. 어느 돈 많은 수집가가 이자크 펄먼보다 더 높은 경매가를 불렀다. 이 수집가는 바이올린을 거실에 전시하고 싶어 한다. 그렇다면 경매 자체가 불공정해서가 아니라 그 결과가 적절치 않다고 여겨 그것을 낭비라거나 심지어는 불공정하다고 여기지 않겠는가? 이러한 반응 뒤에는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은 전시가 아닌 연주를 위해 만들어 졌다는 (목적론적)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
 
고대에는 오늘날보다 목적론적 사고가 더 흔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불이 위로 솟는 이유는 본래의 자리인 하늘에 닿기 위해서고, 돌이 아래로 떨어지는 이유는 원래 속해 있던 땅에 가까워지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자연은 의미 있는 질서에 따라 움직인다고 여기던 시절이었다. 자연을 이해하고 그곳에서 우리 위치를 이해하는 것은 곧 자연의 목적과 본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근대 과학이 출현하면서 자연은 더 이상 의미 있는 질서로 인식되지 않았다. 그보다는 자연을 물리법칙이 지배하는 세계로 인식하는 기계론적 사고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자연현상을 목적과 의미로 설명하는 것은 이제 순진하고 의인화한 사고로 여겨졌다. 이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목적론적으로 정돈된 통합체로 보려는 유혹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이러한 시각은 세계를 그렇게 보지 않도록 교육받아야 하는 아이들에게서 특히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때, 밀른이 쓴 《곰돌이 푸》를 읽어주면서 그러한 현상을 목격했다. 그 이야기는 자연을 의미와 목적에 따라 움직이는 매혹적인 대상으로 바라보는 아이다운 시각을 보여준다.
 
곰돌이 푸는 숲을 걸어가다 커다란 참나무를 만난다. 나무 꼭대기에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곰돌이 푸는 나무 발치에 앉아 머리를 발바닥 사이에 두고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푸는 먼저 이렇게 중얼거렸어요. “저 윙윙거리는 소리에는 뭔가 뜻이 있어. 아무 뜻도 없이 저렇게 그냥 윙, 윙 할 리는 없다고. 윙윙 소리가 난다면, 누가 일부러 윙윙 소리를 내는 거야. 윙윙 소리를 내는 이유는 ‘내가’ 알기로 딱 하나, 저기 꿀벌이 있다는 뜻이지.”
푸는 다시 한참 생각하다가 말했어요. “그리고 저기 꿀벌이 있는 이유는 ‘내가’ 알기로 딱 하나, 꿀을 만들기 위해서야.”
그러더니 푸는 일어나서 말했어요. “그리고 꿀을 만드는 이유는 ‘내가’ 알기로 딱 하나, ‘나더러’ 그걸 먹으라는 이야기지.” 푸는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어요.
꿀벌에 관한 푸의 아이다운 생각의 흐름은 목적론적 추론의 좋은 예다. 어른이 되면서 우리는 대개 자연을 이런 식으로 바라보는 태도를 버리고, 매혹적이지만 기묘한 대상으로 바라본다. 과학이 목적론적 사고를 거부하자, 정치와 도덕도 그러한 사고를 거부하려 든다. 그러나 사회조직과 정치 행위를 생각할 때 목적론적 추론을 버리기는 쉽지 않다.
 
 
- 대학의 텔로스는 무엇인가?
우리는 소수집단우대정책 논쟁을 아리스토텔레스의 플루트 이야기를 바탕으로 바꾸어볼 수 있다. 우선 분배 기준부터 찾아보자. 입학할 권리가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이 질문의 답을 찾다 보면 “대학의 목적, 즉 텔로스란 무엇인가?”를 묻게 된다.
 
텔로스는 대개 명확하지 않으며 논란의 여지가 있다. 대학은 학문을 장려하기 위해 존재하며, 따라서 학업 성취 가능성이 대학 입학의 유일한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가 하면, 대학은 특정한 시민의 목적에 봉사하기 위해 존재하기에, 이를테면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의 지도자가 될 능력 등을 입학 기준에 넣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처럼 대학의 텔로스를 가려내는 일은 적절한 입학 기준을 결정하는 데 필수이다. 이는 대학 입학에서 정의의 목적론적 측면을 드러낸다.
 
대학의 목적에 관한 논쟁과 밀접하게 연관된 것이 영광에 관한 문제다. 대학은 어떤 미덕과 우수성에 영광과 포상을 안겨주어야 하는가? 대학은 학문적 우수성만을 찬양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소수집단우대정책을 거부하기 십상이고, 대학은 특정한 공적 이상을 추구하기 위해서도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그 정책을 당연히 받아들일 것이다.
 
대학에 관한 논의, 나아가 응원단과 플루트에 관한 논의가 자연스럽게 이런 식으로 흘러간다는 사실은 아리스토텔레스 요지의 타당성을 증명한다. 다시 말해, 정의와 권리에 관한 논의는 대개 사회조직의 목적, 즉 텔로스에 관한 논의이며, 텔로스 논의는 사회조직이 어떤 미덕에 영광과 포상을 안겨주어야 하는가를 둘러싼 서로 다른 견해들을 반영한다.
 
문제가 되는 활동의 텔로스, 즉 목적을 두고 사람들이 이견을 보이면 어찌해야 할까? 사회조직의 텔로스를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사회조직의 목적을 이성으로 판단할 수 있다고 믿는다. 조직의 본질은 단번에 정해져 불변하는 것이 아니며, 단순히 의견을 내놓는 문제도 아니다.
그렇다면 의견이 대립할 때 사회조직의 목적을 이성적으로 정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리고 영광과 미덕이라는 개념은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론에서 이 질문에 일관된 답을 내놓는다.
 
 
- 정치의 목적은 무엇인가?
요즘에는 분배 정의를 토론할 때면 주로 소득, 부, 기회의 분배를 이야기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분배 정의는 대개 돈이 아닌 공직과 영광의 분배와 관련한 문제였다. 누가 통치권을 쥐어야 하는가? 정치권력은 어떻게 분배해야 하는가?
그 답은 언뜻 명확하고도 당연해 보인다. 한 사람이 한 표 행사하기, 그 외의 방법은 차별적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배 정의 이론들이 하나같이 차별적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문제는 ‘어떤 차별이 정당한가?’이다. 그 답은 해당 활동의 목적에 달렸다.
 
그렇다면 정치 권리와 권력을 어떻게 분배해야 하는지 이야기하기 전에 정치의 목적, 즉 텔로스부터 물어야 한다. “정치 연합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플루트의 목적은 연주와 관련이 있고, 대학의 목적은 교육과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정치 활동의 목적이나 목표도 그런 식으로 정할 수 있을까?
 
오늘날 우리는 정치에 특별하고도 본질적인 목적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정치는 다만 시민이 지지하는 다양한 목적에 가능성을 열어둘 뿐이다. 그렇기에 선거라는 것이 있어, 특정 시기에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어떤 목적과 목표를 추구할지 선택하지 않는가? 정치 공동체에 미리 특정한 목적이나 목표를 부여한다면 시민이 직접 결정할 권리를 차단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공유할 수 없는 가치를 부여할 위험도 있다. 정치의 텔로스, 즉 목적을 단정하지 않으려는 성향은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마음을 반영한다. 우리는 정치를 사람들 스스로 목적을 선택하는 과정으로 간주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은 다르다. 그에게 정치의 목적은 어느 목적에도 치우치지 않는 권리의 틀을 정하는 게 아니라 좋은 시민을 양성하고 좋은 자질을 배양하는 것이다.
“폴리스는 한 장소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모임도 아니고, 상호 부정을 방지하고 교환을 편리하게 하기 위한 모임도 아니다.” 그것들은 폴리스의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폴리스의 목적과 목표는 좋은 삶이며, 사회생활의 여러 제도는 그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
 
정치 공동체가 좋은 삶을 구현하기 위해 존재한다면, 거기에서 공직과 영광의 분배는 무엇을 암시할까? 이 역시 플루트의 경우와 매 한가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번에도 대상의 목적에서 그것을 분배하는 적절한 방법을 이끌어낸다. “이러한 성격의 연합에 가장 크게 기여하는 사람”은 바로 시민의 미덕이 탁월한 사람, 공동선을 숙고하는 데 가장 뛰어난 사람이다. 최고의 부자도, 다수도, 가장 잘생긴 사람도 아닌, 시민의 자질이 가장 뛰어난 사람이 정치적으로 인정받고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
 
 
- 정치에 참여하지 않고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정치의 목적은 좋은 삶의 구현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옳다면, 가장 훌륭한 시민의 미덕을 발휘하는 사람이 가장 높은 공직과 영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결론 내리기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정치는 좋은 삶을 위해 존재한다는 그의 말은 과연 옳은가? 좋게 말해, 논란의 여지가 있는 주장이다. 오늘날 우리는 대개 정치를 좋은 삶에 반드시 필요한 활동이 아니라 필요악으로 여긴다. 정치라고 하면, 흔히 타협, 가식, 특별한 이해관계, 부패를 떠올린다. 정치를 사회 정의의 도구로, 즉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이상적인 경우라도, 정치를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이자 여러 소명 중 하나로 여기지, 선의 필수요소로 여기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왜 정치 참여를 좋은 삶의 필수 요소라고 생각할까? 왜 우리는 정치 없이는 더없이 훌륭하고 미덕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없을까?
 
그 답은 우리 본성에 있다. 우리는 폴리스에 살면서 정치에 참여할 때만이 인간의 본성을 아낌없이 실현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를 “꿀벌이나 기타 무리지어 사는 동물보다 훨씬 더 정치적인” 존재로 본다. 그 이유는 이렇다. 자연은 어느 것 하나 헛되이 만들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에겐 다른 동물과 달리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이 있다. 다른 동물은 소리를 내고, 소리는 쾌락과 고통을 나타낼 수 있다. 그러나 인간 고유의 특징인 언어는 단지 쾌락과 고통을 기록하는 수단은 아니다. 언어는 무엇이 공정하고 무엇이 불공정한지 선언하고, 옳고 그름을 구별한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소리 없이 파악하지 않고, 말로 표현한다. 언어는 선을 식별하고 고민하는 매체다.
 
그런데 왜 유독 정치에서만 언어력과 사고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왜 가족, 친족, 또는 다른 모임에서는 불가능할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설명한 미덕과 좋은 삶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런데 미덕으로 가득한 삶을 구현하려면 왜 폴리스에 살아야만 하는가? 집에서, 철학 수업에서, 또는 윤리 책을 읽고 그 내용을 필요한 곳에 적용하면서 건전한 도덕철학을 배울 수는 없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식으로는 미덕을 갖출 수 없다고 말한다. “도덕적 미덕은 습관의 결과로 생긴다.” 행동으로 터득하는 것이다. “미덕은 우선 그것을 연습해야 얻을 수 있다. 예술이 그러하듯이.”
 
 
- 행동으로 터득하기
이 점에서, 미덕 갖추기란 플루트를 배우는 것과 마찬가지다. 악기 연주를 책이나 강의로 배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연습을 해야 한다. 뛰어난 연주자의 연주를 듣거나 그들의 설명을 들으면 도움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직접 연주해보지 않고는 바이올린 연주자가 될 수 없다. 도덕적 미덕도 마찬가지다. “공정하게 행동해야 공정한 사람이 되고, 절제된 행동을 해야 절제하는 사람이 되고, 용감한 행동을 해야 용감한 사람이 된다.”
 
실천적 지혜는 정치적인 면이 내재된 도덕적 가치다. 실천적 지혜가 있는 사람은 자신뿐만 아니라 같은 시민들에게 그리고 인류 전체에 무엇이 이로운지 심사숙고할 줄 안다. 심사숙고는 철학적 사고가 아니다. 언제든 바뀔 수 있는 특정 상황에 관심을 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의 행동에 주목한다. 하지만 단순히 계산에 머물지 않는다. 주어진 상황에서 얻을 수 있는 인간의 최고선을 찾아내려 한다.
 
 
- 정치와 좋은 삶
우리는 이제 아리스토텔레스가 왜 정치를 여러 소명 중 하나가 아니라 좋은 삶의 필수 요소라고 생각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첫째, 폴리스의 법은 우리에게 좋은 습관을 심어주고 좋은 인격을 형성하여, 시민의 미덕을 갖추게 한다. 둘째, 시민의 삶은 자칫 휴면 상태에 빠지기 쉬운 심사숙고 능력과 실천적 지혜를 발휘하게 한다. 집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구석에 틀어박혀, 어떤 정책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중요한 행동을 같이 하고 공동체 전체의 운명을 책임지는 것과는 다르다. 실제 무대로 올라가 대안을 저울질하고, 우리 생각을 논의하고, 통치하고 통치 받을 때만이, 한 마디로 시민이 될 때만이 심사숙고에 능해진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는 시민은 우리가 생각하는 시민보다 더 숭고하고 까다로운 존재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치는 어느 모로 보나 경제와 다르다. 정치의 목적은 단지 공리를 극대화하거나, 개인의 이익 추구를 위해 공정한 규칙을 제공하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 우리의 본성을 표현하고, 좋은 삶의 본질과 인간의 능력을 펼쳐 보이는 것이다.
 
케이시 마틴은 다리가 불편한 프로 골퍼였다. 혈액순환 장애로 골프 코스를 걸어가려면 심한 고통이 따르고 출혈과 골절이라는 심각한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마틴은 이런 장애에도 불구하고 늘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 마틴은 미국 프로골퍼협회(PGA)에 토너먼트 경기중에 골프 카트를 이용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PGA는 최고 프로 터너먼트에서는 카트 이용을 금지한다는 규정을 들어, 이 요구를 거절했다. 마틴은 결국 소송을 제기했다. 그는 미국장애인법(1990년)을 지적했다. 이 법은 애초 활동의 “본성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는 범위에서, 장애인에게 합당한 편의시설을 제공하도록 규정한다.
 
이 사건은 전형적인 아리스토텔레스식 정의에 의문을 제기한 셈이다. 마틴에게 골프 카트를 이용할 자격이 있는지 판결하려면, 법원은 문제가 되는 활동의 본질을 결정해야 한다. 코스를 걷는 것은 골프의 본질인가, 부차적 행위인가? PGA 주장대로, 걷는 것도 골프의 본질에 해당한다면 마틴에게 카트를 타도록 허용하는 것은 경기의 “본성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조치다. 권리에 관한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법원은 골프의 텔로스, 즉 본질을 정해야 했다.
골프의 본질에 관해 누구의 의견이 맞든 간에, 케이시 마틴의 카트 사건에 대한 연방대법원 판결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을 생생히 보여준다. 정의와 권리에 관한 논쟁은 사회 제도나 조직의 목적, 그것이 나누어 주는 재화, 그리고 영광과 포상을 안겨주는 미덕에 관한 논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법을 만들 때 이런 문제에 중립을 지키려 노력하지만, 좋은 삶의 본질을 논하지 않고는 공정성을 말하기가 불가능해 보인다. 

9강.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의무를 지는가? : 충직 딜레마
 
공개 사죄와 보상, 역사적 부당 행위에 대한 집단적 책임, 가족과 시민에 대해 느끼는 책임감, 동료와의 연대, 내 마을과 공동체와 국가에 대한 충직, 내 국가와 국민에게 느끼는 자부심, 형제애와 자식의 도리 같은 충직이 대체 정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우리 의무는 모두 의지나 선택에서 나왔을까?
“미안해”라고 말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한 나라를 대표해 공개적으로 미안하다고 말하기란 특히 어려운 일일 것이다. 지난 몇 년은 역사에 기록된 부당 행위를 공개적으로 사죄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힘겨운 논쟁이 봇물처럼 터진 시기였다.
 
 
- 사죄와 손해배상
사죄로 얼룩진 정치의 상당 부분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자행된 만행과 관련이 있다. 독일은 유대인 대학살 책임을 인정해, 생존자와 이스라엘을 상대로 수백억 달러 상당의 배상금을 지출했다. 지난 수 년 동안 독일 정치 지도자들은 공개 사죄하면서, 나치에 대한 책임을 다양한 모습으로 인정했다. 1951년 하원 연설에서, 콘라트 아데나워 독일 수상은 “독일 국민의 절대 다수가 유대인을 상대로 저질러진 범죄를 증오하고, 그 범죄에 동참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입에 담기 힘든 범죄가 독일 국민의 이름으로 저질러졌으며, 그에 대한 도덕적ㆍ물질적 보상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했다. 2000년에는 요하네스 라우 독일 대통령이 이스라엘 국회 연설에서 유대인 대학살을 사죄하고, “독일인이 한 일을 용서해달라”고 했다.
 
일본은 전쟁에서 저지른 만행을 사죄하는 데 인색했다. 1930~40년대에 일본군은 한국과 다른 아시아 국가의 여성과 여자아이들을 강제로 끌어가 성 노예로 이용했다. 1990년대 이후 일본은 소위 ‘위안부 여성’에게 공식 사죄와 배상을 하라는 세계 각국의 압력에 직면해왔다. 1990년대에 희생자들에게 민간 기금이 전달되었고, 일본 지도자들은 일부 행위에 사죄를 표했다. 그러나 2007년에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일본군은 여성을 성 노예로 동원한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미국 의회는 일본 정부에 위안부 여성을 노예로 삼은 일본군의 책임을 공식 인정하고 사죄하라고 촉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국가는 역사적 잘못을 사죄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집단 책임과 공동체의 요구라는 다소 어려운 질문부터 생각해보아야 한다.
공개 사죄를 정당화하는 주요 근거는 정치 공동체에 의해 부당함을 강요당한 사람들을 기억하고, 그 부당함이 희생자와 후손에게 미치는 지속적인 영향을 인식하여, 부당 행위를 저지른 사람이나 그것을 막지 못한 사람들의 잘못을 배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이 사죄를 정당화하기에 충분한지는 상황에 따라 다르다. 더러는 공개 사죄나 배상을 하려는 시도가 오래전의 증오를 불붙이거나, 역사적 적개심을 강화하고 피해의식을 공고히 하며 분노를 키우는 등 득보다 실을 더 많이 낳기도 한다. 공개 사죄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문제를 걱정한다.
 
 
- 조상의 죄를 우리가 속죄해야 하는가?
역사적 부당 행위에 대한 사죄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흔히 내세우는 또다른 논리에 초점을 맞춰보자. 상황이 바뀌어도 달라지지 않는 원칙적 논리로, 앞선 세대가 저지른 잘못을 현 세대가 사죄해서는 안 되며, 사죄할 수도 없다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일어난 일을 어떻게 사죄할 수 있겠는가?
① 존 하워드 오스트레일리아 총리 원주민에 대한 공식 사죄 거부
② 헨리 하이드 공화당 의원 노예제에 대한 배상 문제 비판
 
사죄에서 중요한 부분은 사고방식이다. 그리고 사고방식에서 중요한 점은 책임 의식이다. 누구든 부당한 행위를 한탄할 수는 있다. 그러나 사죄는 그 부당함과 어떻게든 관련이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다. 사죄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도덕적 이해관계를 정확히 파악한다. 그리고 현 세대가 앞선 세대의 죄와 관련해 도덕적 책임을 질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 도덕적 개인주의
공식 사죄에 대한 원칙적 반박은 무시하기가 쉽지 않다. 그것은 우리가 한 행동만 책임질 뿐, 다른 사람의 행동이나 내 힘이 닿지 않는 일까지 책임질 수는 없다는 생각을 기초로 한다. 우리는 부모나 조부모 또는 같은 동포의 죄에 책임을 질 수는 없다.
그러나 이는 문제를 소극적으로 바라보는 태도다. 공식 사죄에 대한 원칙적 반박은 강력하고 솔깃한 도덕적 개념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무게감이 느껴진다. 우리는 그것을 ‘도덕적 개인주의’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도덕적 개인주의는 사람은 이기적인 존재라고 전제하지 않는다. 도덕적 개인주의가 강조하는 것은 자유의 진정한 의미다. 도덕적 개인주의자들에게 자유란 내가 자발적으로 초래한 의무만일 떠맡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내가 다른 사람에게 빚을 졌다면, 그것은 합의라는 행위, 즉 암묵적으로든 가시적으로든 내 선택이나 약속이나 동의의 결과다.
 
만약 정의를 생각할 때 특정한 정체성을 배제해야 한다면, 오늘날 독일인이 유대인 대학살을 배상할 특별한 책임을 떠맡거나 현 세대 미국인이 노예제나 인종차별정책의 부당함을 배상해야 할 특별한 책임을 느낄 이유는 없다. 왜 그럴까? 일단 독일인,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을 배제하고, 나를 자유롭고 독립된 자아라고 생각한다면, 그 같은 역사적 부당함을 배상해야 할 책임이 다른 사람이 아닌 내게 있다고 말할 근거가 없다.
인간은 자유롭고 독립적인 자아라는 생각은 여러 세대에 걸친 집단적 책임뿐만 아니라 훨씬 폭넓은 문제에 영향을 미친다. 도덕적 행위자에 대한 이런 사고방식은 정의를 좀더 일반적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우리가 자유로운 선택권을 지닌 독립적 존재라면, 우리 권리를 규정하는 정의의 원칙을 설정할 때 특정한 도덕적ㆍ종교적 사고에 좌우되지 말아야 하며, 좋은 삶을 규정하는 서로 다른 시각들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려 노력해야 한다.
 
 
- 정부는 도덕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하는가?
정부는 좋은 삶의 의미를 두고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고대의 정치 개념에서 탈피했다는 증거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는 정치의 목적은 수월한 경제 교환과 국가 방위의 공동 책임에 그치지 않는다. 정치는 좋은 인격을 기르게 하고 좋은 시민이 되도록 한다. 따라서 정의에 관한 논의는 좋은 삶에 관한 논의일 수밖에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썼다. “이상적인 헌법의 본질을 조사하기 전에, 가장 바람직한 삶의 본질부터 결정해야 한다. 그것이 불분명하면, 이상적 헌법의 본질 또한 불분명할 수밖에 없다.”
 
정치는 미덕을 키우는 것이라는 생각은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생소하고 위험하기까지 하다. 미덕이 무엇에 좌우되는지,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말한다 한들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법이 특정한 도덕적ㆍ종교적 이상을 권장하려 한다면, 배타적이고 강압적인 수단이 동원되지 않겠는가? 미덕을 권장하려 애쓰는 국가를 생각할 때, 우리는 맨 먼저 아테네의 폴리스를 떠올리지 않는다. 그보다는 간통에 돌을 던지고, 의무적으로 부르카를 입게 하고, 세일럼에서 마녀사냥을 하는 등, 과거와 오늘날의 종교적 근본주의를 떠올린다.
 
칸트와 롤스가 보기에, 좋은 삶에 대해 종교적으로든 세속적으로든 특정한 개념을 강조하는 정의론은 자유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 정의론은 타인의 가치를 강요함으로써, 인간을 자기 목표를 선택할 능력이 있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자아로 존중하지 않는다. 이처럼 선택이 자유로운 자아와 중립 상태는 밀접하게 연관된다. 여러 목적에 구애받지 않는 중립적인 권리의 틀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자유롭고 독립적인 자아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중립은 도덕적ㆍ종교적 논란에서 어느 쪽도 편들지 않으며, 시민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선택할 자유를 부여한다.
 
정의론과 권리는 도덕적으로 중립의 지킬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분명 맞는 이야기다. 칸트와 롤스는 도덕적 상대주의자는 아니다. 자기 목적은 자기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그 자체로 대단한 도덕적 사고다. 하지만 어떻게 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어떤 목적을 추구하든, 다른 사람에게도 동일한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그만이다. 중립적 틀의 매력은 어떻게 살아야 바람직하고, 무엇이 좋은 삶인지 단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칸트와 롤스는 자신들이 특정한 도덕적 이상을 지지한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이들은 선을 이야기하면서 권리를 배제하는 이론에 대항한다. 공리주의도 그중 하나다. 공리주의 쾌락 또는 행복극대화를 선으로 간주하면서, 권리에 초점을 둔 어떤 제도가 그것을 성취하겠느냐고 묻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선에 관해 사뭇 다른 이론을 제시한다. 그가 말하는 선은 쾌락을 극대화하는 게 아니라 우리 본성을 실현하고 인간 고유의 능력을 개발하는 것이다. 인간의 선을 미리 정해놓고 그것을 바탕으로 추론한다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추론은 목적론적이다.
 
이는 칸트와 롤스가 거부하는 추론법이다. 두 사람은 권리를 선보다 앞세운다. 두 사람은 권리를 선보다 앞세운다. 의무와 권리를 정하는 원칙은 좋은 삶에 대한 주관적 견해에 기초해서는 안 된다. 칸트는 “도덕의 최고 원칙을 둘러싼 철학자들의 혼동”을 이야기한다. 고대 철학자들은 “윤리적 고민을 최상의 선을 정의하는 데 온통 쏟아 붓고는” 그 선을 “도덕법을 결정하는 근거”로 삼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러나 칸트에 따르면, 이는 앞뒤가 바뀐 일이다. 자유와도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가 자신을 자율적 존재로 여긴다면 도덕법부터 정할 일이다. 그런 뒤에야, 즉 의무와 권리를 규정할 원칙에 도달한 뒤에야, 비로소 그 원칙에 맞는 선이 무엇인지 물을 수 있다.
 
롤스는 정의의 원칙과 관련해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평등한 시민의 자유는 목적론적 원칙에 근거할 때 위태로워진다.” 권리가 공리주의적 계산에 좌우되면 얼마나 취약해지는가는 쉽게 알 수 있다. 종교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존중되는 이유가 오로지 전체의 행복을 늘리기 위해서라면, 어느 날 절대 다수가 내 종교를 업신여기고 금지하려 든다면 어찌되겠는가?
 
하지만 공리주의 정의론이 롤스와 칸트의 유일한 표적은 아니다. 권리를 선에 앞세우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는 정의 역시 문제가 되는 선의 텔로스, 즉 본질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공정한 정치 질서를 고민하려면, 좋은 삶의 본질부터 따져야 한다. 어떤 삶의 방식이 최선인가를 알아내기 전까지는 공정한 헌법의 틀을 잡을 수 없다. 그러나 롤스는 생각이 다르다. “목적론적 원칙의 체계에는 심각한 오류가 존재한다. 그 원칙은 애초부터 권리와 선을 잘못 연관시킨다. 우리는 독립적으로 규정된 선을 보고 그에 따라 삶의 틀을 형성하려 해서는 안 된다.”
 
 
- 정의와 자유
이 논쟁의 관건은 정의를 어떻게 추론해야 하는가라는 추상적 문제에 머물지 않는다. 권리를 선에 앞세우는 문제를 둘러싼 논쟁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자유에 관한 논쟁이다. 칸트와 롤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을 거부하는 이유는 우리가 선을 스스로 선택할 여지를 남겨두지 않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이 어떻게 이런 우려를 낳는가는 쉽게 알 수 있다. 그는 정의를 사람과 목적 또는 선의 적합성 문제로 본다. 그러나 우리는 정의를 적합성의 문제가 아닌 선택의 문제로 보는 성향이 있다.
정의는 좋은 삶을 단정하지 않고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은 인간을 도덕적 선입견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선택할 권리를 지닌 자아로 본다는 뜻이다.
 
중립을 강조하는 정의론은 평등주의자에게나 자유지상주의자에게나 강한 호소력을 지닌다. 이런 정의론은 정치와 법이 다원화 사회에 만연한 도덕적ㆍ종교적 논쟁에 말려들지 않을 수 있다는 희망을 제시한다. 아울러 인간의 자유를 대담하게 표현하여, 우리는 졸지에 자신을 억누르는 도덕적 의무를 만들어낸 사람으로 내몰린다.
하지만 그 이론이 아무리 호소력이 있다 해도, 자유를 바라보는 시각에는 문제가 있다. 좋은 삶에 관한 대립하는 여러 시각 사이에서 중립적인 정의의 원칙을 찾으려는 열망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내가 내린 결론은 그렇다. 나는 지금까지 소개한 여러 철학적 주장과 씨름하면서, 그 주장이 공적인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지켜보았다. 그 결과 선택의 자유는, 공정한 조건에서 이루어질 경우에도, 정의로운 사회의 기초로는 충분치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게다가 중립적인 정의의 원칙을 찾다 보면 엉뚱한 길로 빠진다는 느낌마저 든다. 본질적인 도덕 문제를 다루지 않고서는 권리와 의무를 규정하기가 때로 불가능하다. 설령 가능하다 해도, 그것은 바람직한 규정이 아닐 것이다. 왜 그런지 설명해보겠다.
 
 
- 공동체의 요구
자유주의자들이 생각하는 자유의 약점은 그 호소력과 밀접히 연관된다. 자신을 자유롭고 독립적인 자아로 여긴다면, 그래서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도덕에 구속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공통적으로 인식하고 칭찬하기 까지 하는 다양한 도덕적ㆍ정치적 의무를 이해할 수 없다. 여기에는 연대와 충직의 의무, 역사적 기억과 종교적 신념에 관한 의무가 포함된다. 이는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한 공동체와 전통이 요구하는 도덕이다. 우리 자신을 ‘부담을 감수하는 자아’로 여기지 않는 한, 즉 내가 정하지 않은 도덕적 요구도 받아들일 자세를 취하지 않는 한, 우리가 경험하는 도덕과 정치에서 그 의무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란 어려운 일이다.
 
롤스의 《정의론》이 미국의 자유주의에 풍부한 철학적 발상을 제공한 지 10년이 지난 1980년대에, (나를 포함해) 수많은 비판자들이 자유로운 선택권을 지닌, 방금 설명한 부담을 감수하는 자아라는 이상을 수정했다. 이들은 권리를 선에 앞세우라는 요구를 거부하면서 목적과 애착에서 관심을 끊고 정의를 이성적으로만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현대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공동체주의자’로 불렸다.
 
이들은 대개 공동체주의자라는 용어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특정 공동체가 규정하는 것은 무엇이든 정의가 될 수 있다는 상대론적 견해를 암시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려는 중요한 문제 하나를 던진다. 공동체가 주는 부담은 억압적일 수 있다는 점이다.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유는 계급, 신분이나 서열, 관습이나 전통, 타고난 지위로 정해지는 운명을 인정하려는 정치론에 대한 해독제로 발전했다. 그렇다면 공동체의 도덕적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만약 인간은 자발적 존재라는 개념이 희박하다면, 만약 의무가 전부 우리의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우리를 소속되어 있으면서도 자유로운 자아로 볼 수 있겠는가?
 
 
- 이야기하는 존재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는 이 문제에 대단히 설득력 있는 답을 제시한다. 그는 《덕의 상실》이라는 책에서, 우리가 도덕적 행위자로서 목적과 목표에 도달하는 방법을 설명한다. 매킨타이어는 인간을 자발적 존재로 보는 시각의 대안으로 서사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인간은 이야기하는 존재다. 우리는 서사적 탐색으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답하려면 그전에 ‘나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가?’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매킨타이어가 관찰하기에, 모든 체험된 서사에는 특정한 목적론이 깃들어 있다. 이는 외적 권위가 부여한 고정된 목적이나 목표가 있다는 뜻이 아니다. 목적과 예측 불능은 공존한다. “허구의 서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우리도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삶에는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 특정한 형식이 있다.”
 
삶이란 특정한 통합이나 일관성을 갈망하는 서사적 탐색을 규정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여러 갈림길에 마주쳤을 때, 우리는 완전한 삶, 내가 관심을 갖는 삶으로 이끄는 길을 찾아내려 애쓴다. 도덕적 고민은 내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라기보다 내 삶의 이야기를 해석하는 것에 가깝다. 여기에는 선택이 끼어들지만, 그것은 해석에서 나오는 선택일 뿐, 의지에서 나오는 절대적 행위가 아니다. 내 앞에 놓인 어느 길이 내 삶의 궤적과 가장 잘 어울리는지는 나보다 남이 더 분명히 알 수도 있다. 도덕적 행위자를 서사로 설명하는 방식에는 이러한 가능성을 허용하는 미덕이 있다.
 
이 설명은 내 삶이 속한 더 큰 삶에서는 도덕적 고민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는가를 보여주기도 한다. 매킨타어어는 이렇게 쓴다. “나는 개인이라는 ‘자격’만으로는 결코 선을 추구하거나 미덕을 실천할 수 없다.” 내가 속한 이야기와 타협할 때만이 내 삶의 서사를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 매킨타이어에게 도덕적 고민의 서사적 또는 목적론적 측면은(아리스토텔레스에게 그랬듯이) 전체의 일부라는 소속과 밀접히 연관된다.
 
우리는 누구나 특정한 사회적 정체성을 지닌 사람으로서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이해한다. 나는 누군가의 아들이거나 딸, 또는 사촌이거나 삼촌이다. 나는 이 도시나 저 도시의 시민이며, 이 조합 아니면 저 조합의 회원이다. 나는 이 친족, 저 부족, 이 나라에 속한다. 따라서 내게 이로운 것은 그러한 역할과 관련된 사람들에게도 이로워야 한다. 이처럼 나는 내 가족, 내 도시, 내 부족, 내 나라의 과거에서 다양한 빚, 유산, 적절한 기대와 의무를 물려받는다. 이는 내 삶에서 기정사실이며 도덕의 출발점이다. 또한 내 삶에 도덕적 특수성을 부여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아를 서사적으로 보는 관점과 명확히 대조되는 입장이다. 내 삶의 이야기는 언제나 내 정체성이 형성된 공동체의 이야기에 속하기 때문이다. 나는 과거를 안고 태어나는데, 개인주의자처럼 나를 과거와 분리하려는 시도는 내가 맺은 현재의 관계를 변형하려는 시도다.
 
인간을 서사적 존재로 보는 매킨타이어의 시각은 인간을 자유로운 선택권을 지닌, 부담을 감수하지 않는 자발적 존재로 보는 시각과 분명히 대조된다. 우리는 이 둘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둘 중 어느 시각이 도덕적 고민을 더 잘 포착하는지 자문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추상적으로 대답하기는 힘든 문제다. 두 시각을 평가하는 다른 방법은 어느 쪽이 도덕적ㆍ정치적 의무를 더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지 묻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그리고 사회계약의 결과로도 돌릴 수 없는 도덕적 의무가 있지는 않은가?
 
 
- 합의를 넘어서는 의무
롤스는 없다고 대답할 것이다. 자유주의적 사고에 다르면, 의무는 오로지 두 가지다. 인간이기에 생기는 자연적 의무와 합의에서 생기는 자발적 의무다.
자연적 의무는 보편적이다. 인간으로서 다른 인간, 즉 이성적 존재에게 지는 의무다. 인간을 존중하고, 정당하게 행동하며, 잔인한 행동을 삼가는 등의 의무가 여기에 속한다. 이런 의무는 자율적 의지(칸트) 또는 가언적 사회계약(롤스)에서 생기기에, 합의라는 절차가 필요없다. 내가 당신을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했을 때만 나는 당신을 죽이지 않을 의무가 있다고 말할 사람은 없다.
자연적 의무와 달리 자발적 의무는 보편적이지 않고 특수하며, 합의에서 생긴다. 내가 당신 집에 페인트칠을 해주기로 약속했다면 나는 약속을 이행할 의무가 있다.
 
따라서 인간을 자발적 존재로 볼 것인가, 서사적 존재로 볼 것인가를 결정하는 한 가지 방법은 사회계약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세 번째 범주의 의무를 인정하는가를 묻는 것이다. 그 의무를 연대 의무 또는 소속 의무라고 말해두자. 자연적 의무와 달리 연대 의무는 보편적이지 않고 특수하다. 그 의무에는 우리가 떠안아야 할 도덕적 책임이 있다. 이 책임은 상대를 이성적 존재가 아닌, 역사를 공유하는 존재로 인식한다. 그러나 자발적 의무와 달리, 합의에 좌우되지는 않는다. 이 책임에 담긴 도덕의 무게는 소속된 자아라는 도덕적 고민에서, 그리고 내 삶의 이야기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포함된다는 인식에서 나온다.
 
ㆍ도덕적 책임의 세 범주
1. 자연적 의무 : 보편적이고, 합의가 필요치 않다.
2. 자발적 의무 : 특수하고, 합의가 필요하다.
3. 연대 의무 : 특수하고, 합의가 필요치 않다.
 
 
- 연대와 소속
이제 연대 의무 또는 소속 의무의 예를 몇 가지 제시해보겠다. 각 사례에 도덕적 무게가 실려 있는지 살펴보고, 그럴 경우 이를 사회계약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자.
 
ㆍ가족의 의무
가장 기본적인 예는 가족 구성원으로서 서로에게 느끼는 특수한 의무다. 두 아이가 익사 직전인데, 오직 한 명밖에 구할 시간이 없다고 치자. 한 명은 당신의 아이고, 한 명은 모르는 사람의 아이다. 그렇다면 당신의 아이를 구하는 것이 잘못일까? 동전을 던져 정해야 옳을까? 사람들은 당신의 아이를 구하는 행위가 전혀 잘못이 아니며, 동전을 던져야 공정하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하다고 말할 것이다. 이런 반응의 바탕에는 부모라면 자식을 행복하게 할 특별한 책임이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이 책임은 합의에서 나온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아이를 갖기로 했다면, 특별한 애정으로 돌보겠노라고 자발적으로 동의했다고 보는 견해다.
 
합의라는 요소를 배제하기 위해, 자식이 부모에게 지는 책임을 생각해보자. 도움의 손길이 절실한 노부모 두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자. 한 사람은 내 어머니고,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어머니다. 두 사람을 다 보살핀다면야 칭찬할 만한 일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자기 어머니를 돌볼 특별한 책임이 있다고들 말할 것이다. 이 경우, 합의로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지는 분명치 않다. 나는 부모를 선택한 적도, 부모를 갖기로 선택한 적도 없으니까.
 
내 어머니를 돌봐야 하는 도덕적 책임은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는 사실에서 나온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머니가 나를 키우고 보살폈으니 그것을 갚아야 할 의무가 있다. 어머니가 제공한 혜택을 받아들였다면, 어머니가 도움이 필요할 때 은공을 갚겠다고 합의한 셈이라는 이야기다. 합의와 상호 이익을 따지는 이 계산은 가족의 의무를 설명하기에는 너무 매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주장을 인정한다고 치자. 그렇다면 책임을 소홀히 하고 무관심한 부모를 둔 자식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하겠는가? 아이를 어떻게 키웠느냐에 따라 나중에 부모가 되어 도움이 필요할 때 자식에게 요구할 수 있는 책임의 정도가 달라진다고 말해야 할까? 부모 노릇을 못한 경우라도 자식은 그 부모를 보살필 책임이 있다면, 도덕적 책임은 상호 이익과 합의라는 자유주의 윤리를 넘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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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강. 정의와 공동선
 
구제금융이나 상이군인훈장, 대리 출산이나 동성혼, 소수집단우대정책이나 군 복무, 최고경영자의 임금이나 골프 카트 이용권을 두고 어떤 논란을 벌이든, 정의는 영광과 미덕, 자부심과 인정에 관한 대립하는 여러 개념과 밀접히 연관된다. 정의는 올바른 분배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것은 올바른 가치 측정의 문제이다.
 
많은 사람이 존 F. 케네디와 버락 오바마의 비슷한 점을 이야기한다. 둘 다 젊고, 연설을 잘하고, 사기를 북돋는 정치인으로서, 두 사람의 당선은 미국의 지도력이 다음 세대로 넘어갔다는 신호였다. 그리고 둘 다 미국인을 결집해 시민이 참여하는 새 시대를 열고자 했다. 그러나 정치에서 종교의 역할에 관해서는 양극단의 견해를 보였다.
케네디 : 카톨릭 신자. 개신교의 우려에 대해 - 자신의 종교가 공직 수행에 아무 역할도 하지 않을 것이다.
오바마 : 자신의 그리스도교 신앙을 묘사하면서, 종교가 정치 논의와 무관하지 않다고 주장.
 
 
- 중립을 지키려는 열망
종교를 공적인 것이 아닌, 사적인 것으로 보는 케네디의 견해는 가톨릭에 반대하는 세력을 누그러뜨릴 필요성에서 나온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1960~70년대에 꽃피운 공공철학을 반영한다. 정부는 도덕적ㆍ종교적 문제에서 중립을 지켜, 무엇이 좋은 삶인지 개개인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철학이다.
 
그가 구사하는 정치 언어에는 자유주의적 중립을 뛰어넘는 도덕적, 영적 차원이 존재했다.
정의와 권리에 관한 논의를 좋은 삶에 대한 논의에서 분리하려는 시도는 두 가지 이유로 잘못이다. 본질적인 도덕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정의와 권리의 문제를 결정할 수 없고, 설령 그럴 수 있다 해도 바람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익히 들어온 두 가지 정치 문제를 생각해보자. 문제의 근본적인 도덕적, 종교적 입장을 정리하지 않고서는 해결할 수 없는 낙태와 배아줄기세포 연구 문제다.
 
 
- 낙태와 줄기세포 논란
어떤 사람은 무고한 생명을 앗아가는 낙태는 금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은 어느 순간부터 인간의 생명이 시작되는가에 대한 도덕적, 신학적 논쟁에서 법은 어느 쪽도 편들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발달중인 태아의 도덕적 지위는 워낙 날카롭게 대립하는 도덕적ㆍ종교적 문제이니, 정부는 중립을 지키고 여성 스스로 낙태를 결정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낙태 논쟁처럼, 배아줄기세포 연구 허용 문제도 어느 순간부터 인간인가에 대한 도덕적, 종교적 입장을 정리하지 않고는 해결할 수 없다. 초기 배아가 사실상 인간과 마찬가지라면, 배우줄기세포 연구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일리가 있다. 아무리 의학적 전망이 밝아도 인간의 사지를 절단하는 행위를 정당화할 수는 없으니까.
낙태와 배아줄기세포 연구에서, 근본적인 도덕적ㆍ종교적 문제를 다루지 않고는 법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두 경우 모두 중립은 불가능하다. 문제가 되는 행위가 인간의 생명을 빼앗는가, 아닌가가 논란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물론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루는 도덕적, 정치적 논란은 흔치 않다. 따라서 자유주의적 중림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낙태와 줄기세포 논란은 특별한 경우라며, 인간의 정의를 내려야 하는 문제를 제외하고는 도덕적ㆍ종교적으로 어느 쪽도 편들지 않고 정의와 권리에 관한 논쟁을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역시 옳지 않다.
 
 
- 동성혼
동성혼 논란을 생각해보자. 국가는 결혼의 목적과 동성애의 도덕적 지위에 관한 도덕적, 종교적 논란에 개입하지 않고 동성혼을 인정해야 할까? 어떤 사람들은 그렇다면서, 사적 판단을 배제한 자유로운 선택을 근거로 동성혼을 지지한다. 즉 개인적으로 게이나 레즈비언 관계에 찬성하든 반대하든, 사람들은 저마다 결혼 상대를 자유롭게 고를 수 있어야 한다. 이성에게만 결혼을 허용하고 동성에게는 허용하지 않는다면 게이와 레즈비언을 부당하게 차별하고 법 앞에서의 평등을 부정하는 꼴이다.
이 주장이 국가가 동성혼을 인정해야 하는 충분한 근거가 된다면, 결혼의 목적과 결혼이 추구하는 선에 관한 논란에 의존하지 않고도 자유주의적 공적 이성의 테두리 안에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사적 판단을 배제한 채 동성혼에 찬성할 수는 없다. 이 문제는 결혼의 텔로스, 즉 목적이나 요지를 규정하는 특정한 견해에 좌우된다.
 
따라서 동성혼에 찬성하는 주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이 비차별과 선택의 자유에 의존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누가 결혼할 자격이 있는지를 결정하려면, 결혼의 목적과 결혼이 칭송하는 미덕을 생각해야만 한다. 그러다 보면 도덕적 논란이 이는 영역에 도달하는 데, 이때 좋은 삶을 두고 대립하는 기념들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기란 불가능하다.
 
 
- 정의와 좋은 삶
여기까지 오는 동안 우리는 정의를 이해하는 세 가지 방식을 탐색했다. 어떤 이는 정의란 공리나 행복 극대화, 즉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정의란 선택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선택은 자유시장에서 사람들이 실제로 행하는 선택일 수도 있고(자유지상주의의 견해), 원초적으로 평등한 위치에서 ‘행할 법한’ 가언적 선택일 수도 있다(자유주의적 평등주의의 견해). 마지막으로 어떤 이는 정의란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고민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쯤에서 독자들도 눈치챘겠지만, 나는 세 번째 방식을 좋아한다. 왜 그런지 설명해보겠다.
공리주의적 이해 방식은 두 가지 단점이 있다. 첫째는 정의와 권리를 원칙이 아닌 계산의 문제로 만든다는 점이고, 둘째는 인간 행위의 가치를 하나의 도량형으로 환산해 획일화하면서 그것들의 질적 차이를 무시한다는 점이다.
 
자유에 기초한 이론들은 첫 번째 문제를 해결하지만 두 번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자유 이론은 권리를 진지하게 다루고, 정의는 단순한 계산 이상이라고 주장한다. 자유에 기초한 이론들 사이에서도 ‘어떤’ 권리가 공리주의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중시되어야 하는가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지만, 근본 권리로 존중받을 권리를 가려내기 전에, 사람들의 기호를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
이 부분이 내게는 오류로 보인다. 정의로운 사회는 단순히 공리를 극대화하거나 선택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만으로는 만들 수 없다. 좋은 삶의 의미를 함께 고민하고, 으레 생기게 마련인 이견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문화를 가꾸어야 한다.
 
하나의 원칙이나 절차가 있어서, 그에 따라 소득ㆍ권력ㆍ기회를 정당하게 분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 원칙을 찾을 수만 있다면, 좋은 삶을 토론하는 과정에서 생기게 마련인 논란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논란을 피하기란 불가능하다. 정의에는 어쩔 수 없이 판단이 끼어든다. 구제금융이나 상이군인훈장, 대리 출산이나 동성혼, 소수집단우대정책이나 군 복무, 최고경영자의 임금이나 골프 카트 이용권을 두고 어떤 논란을 벌이든, 정의는 영광과 미덕, 자부심과 인정에 관한 대립하는 여러 개념과 밀접히 연관된다. 정의는 올바른 분배만의 문제는 아니다. 올바른 가치 측정의 문제이기도 하다.
 
 
- 공동선의 정치
문제는 도덕적이고 영적인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는 정치를 구상하고, 더불어 그런 문제를 성이나 낙태만이 아니라 경제와 시민의 관심사라는 폭넓은 영역으로 끌어내는 정치를 구상하는 일이다.
내가 본 사람 중에, 이 방면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일문은 1968년에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선 로버트 케네디였다. 그에게 정의는 단순히 국민총생산의 규모와 분배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더 높은 도덕적 목적과 관련이 있었다. “물질적 빈곤을 없애려고 아무리 노력한들, 더 어려운 일은 따로 있습니다. 우리 모두를 괴롭히는 만족의 결핍에 맞서는 일입니다.” 미국인들은 “단순한 물질 축적”에 탐닉해 있었다.
 
케네디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시대에 나타난 자기만족과 물질적 집착을 향한 도덕적 비난이 빈곤, 베트남전쟁, 인종차별의 부당함에 대한 그의 견해와는 별개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케네디는 그것들이 서로 연관된다고 보았다. 그러한 부당함을 바로 잡으려면 주변에서 발견되는, 삶에 안주하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심판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국가에 대한 미국인의 자부심을 일깨우며 공동체 의식을 호소했다.
40년이 지나 2008년 대통령 선거운동 중에 버락 오바마 역시 더 원대한 목적을 추구하는 공적인 삶에 목마른 미국인의 갈증을 이용해 도덕적, 영적 갈망이 담긴 정치를 역설했다.
 
그렇다면 공동선을 추구하는 새로운 정치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예상되는 몇 가지 주제를 살펴보자.
 
 
① 시민 의식, 희생, 봉사
정의로운 사회에는 강한 공동체 의식이 필요하다면, 사회는 시민들이 사회 전체를 걱정하고 공동선에 헌신하는 태도를 키울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자면 공적인 삶에서 시민이 드러내는 자세와 기질인 ‘마음의 습관’에 무관심할 수 없다. 사회는 좋은 삶에 관한 지극히 사적인 견해를 배격하고, 시민의 미덕을 키울 길을 찾아야 한다.
전통적으로는 공립학교가 시민 교육을 담당했다. 어떤 세대에서는 교육이 아니라, 실용적인 교육, 그리고 경제적ㆍ종교적ㆍ인종적 배경이 다른 청소년들이 같은 사회제도 안에서 교류하며 자연스럽게 익히는 시민 교육을 뜻한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공립학교가 열악한 상황에 처한다면, 그리고 미국 사회의 극소수만이 군 복무를 담당한다면, 미국처럼 거대하고 다양한 민주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에 필요한 연대와 상호 책임 의식을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② 시장의 도덕적 한계
우리 시대에 가장 두드러진 성향 하나는 시장과 시장 친화적 사고가 시장과는 거리가 먼 기준의 지배를 받던 전통적 삶의 영역까지 파고든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국가가 병역이나 죄수 심문을 민간 도급업체나 별도 인력을 고용해 맡길 때, 부모가 개발도상국가 사람들에게 돈을 주고 임신과 출산을 의뢰할 때 콩팥을 공개시장에서 사고팔 때 어떤 도덕적 문제들이 생기는지 앞에서 살펴본 바 있다.
이는 공리와 합의만을 묻는 게 아니다. 그것은 군 복무, 출산, 가르침과 배움, 범죄자 처벌, 새 시민을 받아들이는 일 같은 중요한 사회적 행위의 가치를 측정하는 올바른 방법에 관한 물음이기도 하다. 사회적 행위를 시장에 맡기면 그 행위를 규정하는 규범이 타락하거나 질이 떨어질 수 있기에, 시장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보호하고 싶은 비시장 규범이 무엇인지 물을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선의 가치를 측정하는 올바른 방법을 놓고 공개 토론을 벌여야 한다. 시장은 생산활동을 조직하는 데 유용한 도구다. 그러나 사회제도를 지배하는 규범을 시장이 고쳐 쓰기를 원치 않는다면, 시장의 도덕적 한계를 공론에 부칠 필요가 있다.
 
 
③ 불평등, 연대, 시민의 미덕
미국 내 빈부 격차는 최근 10~20년 사이에 점점 커지더니 급기야 1930년대 이후 한 번도 나타나지 않은 수준까지 이르렀다. 그런데도 불평등은 정치 문제로 확대되지 않았다. 2008년 대선 운동 때 소득세율을 1990년대 수준으로 되돌리겠다는 지극히 소박한 제안을 내놓은 버락 오바마는 공화당 상대 후보에게서 부를 퍼뜨리려는 사회주의자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오늘날의 정치가 불평등에 좀처럼 주목하지 않는다고 해서 정치철학자들도 그렇다는 뜻은 아니다. 소득과 부의 공정한 분배는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정치철학 논쟁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철학자들은 이 문제를 공리나 합의라는 맥락에서 바라보는 성향이 있고, 그런 탓에 정치 청문회를 열고도 남을, 도덕과 시민성 회복의 핵심인 불평등에 반대하는 주장을 간과하고 만다.
더 중요한 세 번째 이유는, 빈부 격차가 지나치면 민주 시민에게 요구되는 연대 의식을 약화시킨다는 사실이다. 왜 그럴까? 불평등이 깊어질수록 부자와 가난한 자의 삶은 점점 더 파괴된다.
결국 불평등은 공리나 합의에 미치는 영향과는 별개로 시민의 미덕을 좀먹는다. 시장에 매료된 보수주의자들과 재분배에 주목하는 자유주의자들은 이러한 손실을 간과한다.
불평등이 시민에게 미치는 결과와 그것을 바로잡을 방법에 초점을 맞춘다면, 비슷한 소득 재분배 주장으로는 불가능한 바람직한 정책을 찾아내 사람들의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분배정의와 공동선의 연관성을 강조할 수도 있다.
 
 
④ 도덕에 기초하는 정치
좋은 삶에 관한 문제에 공적으로 개입하는 행위는 시민의 삶을 침해하는 행위이자 자유주의적 공적 이성의 범위를 넘어서는 행위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흔히 정치와 법은 도덕적, 종교적 논쟁에 휘말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강압과 배타성을 우려해서다. 일리 있는 우려다. 다문화 사회의 시민들은 도덕과 종교에 이견을 보인다. 앞에서 주장했듯이 정부가 이러한 이견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기란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한 정치는 가능하지 않을까?
내 생각으로는 가능하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이제까지 익숙한 정도보다 좀더 적극적으로 시민의 삶에 개입해야 한다. 최근 10~20년간 우리는 시민의 도덕적ㆍ종교적 신념을 존중한다는 것은 (적어도 정치적 목적에서는) 그 신념을 모른 척하고, 방해하지 않으며, 공적 삶에서 그것을 가급적 언급하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이런 식의 회피에서 나온 존중은 가짜이기 십상이다. 그런 태도는 도덕적 이견을 회피한다기보다는 억누르는 쪽에 가깝다. 그러다 보니 반발이나 분노를 유발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공개 담론을 줄이고, 이 뉴스에서 저 뉴스로 숨어 다니며 추문이나 자극적인 기사 또는 시답잖은 소식에 매달린다.
도덕적 이견에 좀더 적극적으로 개입한다면 상호 존중의 토대를 약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더 강화시킬 수 있다. 우리는, 동류 시민이 공적 삶에서 드러내는 도덕적ㆍ종교적 신념을 피하기보다는 때로는 그것에 도전하고 경쟁하면서, 때로는 그것을 경청하고 학습하면서, 더욱 직접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어려운 도덕 질문을 공개적으로 고민한다고 해서 어느 상황에서든 합의를 끌어낼 수 있다거나, 심지어 타인의 도덕적ㆍ종교적 견해를 평가할 수 있다고 장담하긴 어렵다. 도덕적ㆍ종교적 교리를 더 많이 알수록 그것이 더 싫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일단 해보기 전까지는 어찌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도덕에 기초하는 정치는 회피하는 정치보다 시민의 사기 진작에 더 도움이 된다. 더불어 정의로운 사회 건설에 더 희망찬 기반을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