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키호테'의 제5변주는 돈키호테가 도르시네아 공주를 몽상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도르시네아 공주는 돈키호테가 사랑하는 사람으로, 잘 알려진 대로 망상 속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p. 40
청소년기에 벌써 인생을 알만한, 노을이 질만한 일을 겪었다는 건 참 슬픈 일이다. 일단 난 쓰시마도 미나미도 어느 쪽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쓰시마는 여자친구가 심한 실수를 한 뒤에 멋대로 말도 제대로 안하고 차버렸으니 당황할 만도 하고. (그렇지만 선생님에게 한 짓을 정당화하자는 건 아니다.) 미나미는 놀랍게도 본인을 무척 닮은 인물이라, 나로서는 그저 변명할 수밖에 없다.
남자친구가 호주로 2년 유학을 간다고 했을 때, 기분이 상했다. 군대에서 2년 있을 때는 그럭저럭 버티긴 했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2년이나 더 먼 나라에 가는 걸 버틸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영어영문학과로서 본인은 한국을 벗어난 적이 없다. 대학에 있을 때는 집안 경제가 좀 위태로웠던 관계로, 유학을 간다고 쉽게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서울에서 자취하는 것도 힘들 지경인데 오죽하겠는가. 그런데 남자친구가 나보다 먼저 유학을 간다는 사실이 몹시 싫었고 질투가 났다. 미나미는 소설 속에서 이렇게 말한다. '쓰시마 넌 돈 많으니까 나도 같이 유학보내달라고 부모님한테 말씀드려줘.' 아마 미나미도 자신이 쓰시마와 유학을 같이 갈 수 있을거라 기대하고 한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쓰시마가 부모님에게 거절당했다고 말을 했을 때 '역시...'라고 대답한 반응을 봐도 알 수 있다. 자존심이 강한 그녀가 쓰시마에게 쓸데없는 강짜를 부릴 정도로 망가졌던 것이다. 아마 내가 똑같은 상황에 처했더라면,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고등학생 시절의 나도 아직 철이 덜 든 상태에다가, 자존심은 엄청 높았고, 할 줄 아는 건 공부랑 독서밖에 없었던 아이였으니까. 심지어 이미 관계가 끊겼다고 생각하면 냉정하게 연락을 끊는 행동까지, 나랑 너무나 닮아서 할 말이 없을 정도이다. 아니, 아마 지금 그런 상황에 처했다고 하더라도 미나미와 똑같이 했을지 모른다. 미나미가 했던 단 하나의 실수만 뺀다면.
결론은 '인간에겐 노력해도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 라는 거다. 주어진 대로 사는 거다. 만족하지 못하면 만족하지 못한 대로, 그대로 사는 거다. 쓰시마는 이 책에서 처음으로 음악연주 자체를 즐기게 된다.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쳤을진 몰라도 그것이 그에게 있어선 최선의 선택이었다. 쓰시마는 무언가 잘못되었었다는 사실만은 결코 잊지 않았다. 과거로부터 도망가지도 않았다. 뭐 자신의 잘못에 관련된 이야기는 왠지 어중간하게 말한 듯한 면이 있지만, 이해해주자. 그는 자신이 나약하고 비겁한 인간이라는 것을 자각했다. 소크라테스처럼. 자각한다는 것은 단순히 막연하게 눈치챈다는 것이 아니라, 명확하게 스스로 이해하고 받아들여 인정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바흐의 나장조 쿠탕트보다 더 어렵고 힘든 것이 삶이다. 그러나 흘러가다보면 꽤 괜찮다고 생각되는 순간이 오기도 한다. 자살이라던가, 나 자신에게서 도망치는 짓을 그만두라고 이 책은 요구하고 있다. 더 노력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자신의 역량이 이 정도라는 것을 알아채고 내려놓을 건 내려놓으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사실 '내려놓기'만큼 어려운 것은 없다. 쓰시마가 자신을 가다듬을 수 있었던 것은 선생님들, 이토, 아유카와 등의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어린 시절을 이겨낸 것은 책,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책이라면 아낌없이 구입해주셨던 부모님 덕분이었다. 말하자면 운이 좋았다는 이야기이다. 성공에만 99%의 노력과 1%의 운이 따르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일에 이 1%는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모든 건 지나간다. 일단 배를 타라. 그러나 수면은 끝없이 흔들리고 있다는 걸 잊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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