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야기 Ⅱ/기타

[미나비리스] '아이에게 배우는 어른이 있는 세상. 쪽팔립니까?' [열하일기 下: 박지원]


열하일기(하)(겨레고전문학선집03)
카테고리 인문 > 한국문학론
지은이 박지원 (보리, 2004년)
상세보기


열하 태학에는 늙은 학구가 있었는데, 이름은 왕곡정이다. 왕곡정은 한인인 어린아이 호삼다에게 글을 가르쳤다. 호삼다는 나이 열세 살이었다. 또 만주 사람으로 왕나한이란 자가 있었는데, 나이는 바로 일흔셋으로 호삼다에 비하면 한 갑자가 더한 무자생이다. 곡정에게 강의를 받는데 매일 신새벽이면 삼다와 함께 책을 끼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발걸음을 맞추어 곡정을 찾는다. 더러 곡정이 이야기때문에 틈이 없을 때는 노인은 언뜻 몸을 돌려 호삼다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주저하지 않고 글을 한 차례 받아 가지고 간다.- p. 208

 전에 열하일기 중권을 도둑맞았었다는 것까지 이야기했었다. 그런데 정말 어지간히 정신없고 혼란스러웠나보다. 열하일기 하권의 후기를 쓰지 않았다니.. (눈물) 좋은 글귀에 있는 것도 페이스북에 적은 짜투리 후기덩어리들을 뒤적거린 결과 간신히 발견해냈다. 아무튼 난 정확히 10월 21일에 이 책을 다 뗐다. 다른 책들의 반납기간이 밀리는 것도 다 감수하고 열하일기 상중하를 열심히 뗀 게 언젠데 후기를 쓰지 않았다니. 정말 자학스러울 정도로 세게 내 머리를 한 대 때리고 싶다. 그렇지만 어차피 밀린 것은 밀린 것이고, 워낙 강렬한 문체이다 보니 이 책을 읽었을 때의 느낌이 아직도 살아있다. 그러므로 내가 기억하고 있는 한도의 느낌들을 충분히 옮겨내겠다.

 청나라에서도 특별한 경우라 하지만, 위에 있는 글은 정말 보면 볼수록 감탄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그놈의 인권 때문에 마음대로 학생들을 때릴 수도 없다"라고 불평하는 선생이 있는 우리나라와 비교해보라. 정말 보기가 민망하고 화가 날 정도로 차이가 나지 않는가. 박지원은 초반엔 오랜 시절부터 역사의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던 우리나라의 과거들을 낱낱이 들추며, 망한 명나라의 환상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선비들을 격렬하게 비난하고 있다. 본인은 요즘에도 별로 다르지 않다고 본다. 우리나라는 정말 시대에 따라 빠릿빠릿하게 행동할 줄 모른다. 눈치볼 줄도 모르고 염치도 없다. 좋은 점은 다 빼버린 채 네거티브로 FTA 체결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명나라와의 신의를 지킨다'는 변명과 '미국과의 대의를 지킨다'라는 변명의 차이점은 대체 무엇인가.

 단 한 가지 결정적인 단점이 있다. <곡정필담>에서 곡정이 지적했듯, 박지원 또한 중국의 옛 사상인 유교에 너무 깊이 빠져있다. 정치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탓인지, 그의 이론은 너무나 단순명확하고 순수하다는 생각이 든다. 원리만으로 세상이 바로잡힐 수는 없는 법이다. 중국도 많은 피를 뿌렸고, 청나라도 결국 세계를 오랑캐 취급만하지,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해서 서양에게 망했다. 이 책을 보면서 우리나라에서 직접 생겨난 철학과 사상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다. 단, 현재 세계의 상황을 볼 때 피를 쏟아내진 못하고 그래서도 안 된다. 전쟁이 아닌 갈등을, 육탄전이 아닌 심리전과 두뇌싸움을 벌이면서 직접 찾아내야 한다고 본다. 우리들의 근본적인 철학을 말이다.

정조가 언젠가 박지원에게 이 글이 너무 위험하다는 식의 지적을 하며, 전향을 하면 문인자리를 주겠다는 식의 떡밥을 던지셨나보다. 그러나 박지원은 한번 글을 썼으니 이제와서 철회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임금의 제안을 거절하다니 정말 베짱 두둑한 분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그 분은 지금의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고 싶으셨을 게다.

리뷰어 미나비리스(김정원) 블로그 '마호가니 서재에서 헤드폰을 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