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의 자학을 해 보겠다.
살아가는 동안 수없는 상처와 이별을 겪었다. 지금도 그것들은 진행중이다. 지금은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그래 고등학생 때 쯤. 아무리 무릎꿇고 빌어도 돌이킬 수 없는 이별을 겪은 적이 있었다. 나는 그 사람에게 상처를 너무 많이 주었고, 그 사람은 나의 자존심을 짓밟아 부수어버렸다. 그 순간 이렇게 생각했었다.
'차라리 이 고통을 더 겪지 않았으면.'
나를 탓할 수도, 그 사람을 탓할 수도 없었다. 인간으로서 나의 마음이 너무나 나약해서 이런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아무런 고통도 그리움도 절망도 부끄러움도 없이 살아갈 수 있다면. 지난날 느꼈던 쾌락과 기쁨의 추억마저 뼈에 사무쳐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내 마음을 돌처럼 굳게 만들어버리고 싶었다. 인생을 살면서 사람들을 계속 만난다면, 차라리 내 추악함을 깨닫지 못하는 인간이 되고 싶었다. 파렴치한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무감각한 어른이 되었다. 지금의 나는 슬픈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을 아무렇지 않은 척 비웃는다. 슬픈 내용의 책을 보더라도 혼자서 방 안에 콕 박힌 다음 소리를 죽여 운다. 하지만 아직도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며 웃을 때, 나는 그 사람들이 나를 보면서 비웃는 것 같다는 피해망상에 시달린다. 그럴 땐 일부러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다음, 자리를 벗어난다. 아무튼 자기 혐오를 숨기느라 급급해 사랑이라는 감정까지 숨겨버린 나는 사회에게 속수무책으로 휘둘린다. 미소짓는 얼굴 속 또다른 못난 나. 현실에서는 이런 사람을 사회부적응자라 하겠지.
하지만 이 책 속에선 그 사회부적응자들이 주류가 된다. 그들은 과학의 힘을 빌어 무감각한 어른이 된다. 그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나이가 차면 주사를 맞는 성년식을 겪어야 한다.
그 세상 속에서도 비정상적인 사람들이 있다. 속칭 델리아라는 병을 겪는 사람들이다. 우리말로는 사랑이라고 한다.
애인과의 저녁 데이트를 위해서 자신의 점심값을 포기한다.
단 하루의 만남을 위해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독약을 삼킨다.
사랑에는 언제나 희생이 따른다.
그래서 사랑은 아름다워보인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책의 이름은 delirium이다. 우리나라 말로는 '섬망'이라고 번역된다. 무슨 일에나 과민반응을 보이게 되는 증상을 가리킨다. '치매'라는 증상하고도 동일시된다. 소설 속에서 델리아라는 병에 걸린 사람들은 벽에 머리를 부딪치거나 자살을 하는 등,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고 한다. 주인공 레나는 일명 '자살생존자'이다. 어머니는 사랑이라는 표현이 금지된 세상 속에서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자살을 택한 것이다. 그녀는 그 충격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나머지, 한시라도 바삐 자신의 고통이 멎기를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알렉스와 사랑에 빠진 이후 그녀는 자신이 선망했던 세상을 점점 등지게 된다. 감고 있던 한 쪽 눈을 뜨고 여태까지 보기를 거부했던 진실과 맞서게 된 것이다. 그러나 결국 양쪽 눈을 다 가진 물고기는, 외눈박이 천지인 물고기 사이에선 비정상적이다. 그 틈에선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
이 책은 나에게 '천사금렵구'라는 책을 떠올리게 했다.
이 만화책에 등장하는 두 주인공 세츠나와 사라는 남매관계이지만, 절절하게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
사라가 죽자 세츠나는 현실과는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녀를 되찾기 위해 천국을 헤멘다.
결국 그들은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을 하늘에서 쟁취하게 된다.
나에게도 현재 새로운 사랑이 생겼다. 딜러리엄이나 천사금렵구의 주인공과 같은 차별을 겪지는 않는다. 이성끼리의 사랑이고, 남매도 아니고, 어리지도 않다. 무엇보다 아직 이 세상에선 사랑을 귀하게 여기고 있다.
반대로, 그들과 같은 아슬아슬하고 짜릿한 금단의 즐거움을 누리지는 못한다.
가끔 금지된 사랑을 하는 이들이 부러울 때가 있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면, 사랑때문에 온갖 고통을 느끼며 고생하고 있는 이들은 화를 낼까?
어른이 되면 다시는 청춘 때의 기분을 느낄 수 없다. 그러나 그 때의 우리 사랑은 바뀌지 않는다.
'내가 그것을 느꼈다'라는 진실은 결코 변할 수 없다. 아무리 그 위에 담요를 덮어도 덮어도 사랑에서부터 뿜어나오는 빛은 너무도, 아플 정도로 찬란해서..
어쩌면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지금 다시 사랑을 하고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P.S 어떤 분은 이 책 줄거리를 듣고 <이퀄리브리엄>이라는 영화가 떠올랐다고 한다. 그 영화에서도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자들을 말살하는 세계가 등장한다고 한다. 매트릭스에 도전하려고 했던 게 오링이었지만 그럭저럭 재밌다고 한다. 예산 부족때문에 후기가 안 나온 게 아쉬울 정도라나? 본인도 한 번 보려고 한다.
클릭하면 제 블로그로 이동합니다♥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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